66화
“어떤 거요?”
“성녀가 원하는 삶이 뭔지.”
“아.”
나는 단박에 그때의 상황을 기억해냈다.
어떻게 잊겠는가.
“제가 원하는 삶이요?”
“저는-.”
“성녀야말로, 연애하는 걸 원하는 거 아닌가?”
내가 원하는 삶이 연애하는 거 아니냐는 흐름으로 질문이 이어졌고.
그러다 슬린 경을 좋아하는 거 아니냐고 하셔서 내가 얼떨결에 폐하한테 고백해버리게 된 그 상황……!
크흡. 내 주둥아리가 친 수많은 사고에 순위를 매긴다면 그게 1순위이다.
아직도 수치스러워서 이불을 뻥뻥 차고 다닌다니까…….
내 이불 조만간 구멍 날 듯.
“다시 말씀드리지만요. 폐하, 제가 원하는 삶이 연애는 아니에요.”
“……그때는 내가 대답을 잘랐지. 미안하군.”
아니, 사과받으려고 다시 말씀드린 건 아닌데요…….
어쨌든. 나는 그때 못한 말을 또렷한 목소리로 내뱉었다.
“제가 원하는 삶은요, 폐하가 행복해지는 삶이에요.”
폐하는 내 말을 말장난 정도로 여겼는지 미간을 슬쩍 움직였다.
“진심인데요.”
“……이해가 안 가는군.”
본인의 행복을 부정하는 듯한 폐하의 말투.
순간 나는 느꼈다.
여기서 애매하게 끝내버리면 폐하는 앞으로 나와 이 주제를 가지고 대화하려 하지 않을 거란 걸.
나는 후회가 남지 않게 내 속에 있는 진심을 필터 없이 쏟아내기로 했다.
“제가 왜 원래 세계로 돌아갈 생각도 하지 않고 이 세계에 남아 있겠어요? 여기엔 집도 가족도 없는데.”
돈은 많고. 가족 같은 사람도 많지만.
게다가 사랑하는 사람도……!
아냐, 또 호흡 거칠어진다.
나는 최대한 진정하려고 노력하며 폐하의 미간에 집중했다.
미간에 올라온 폐하의 앞머리가 잘게 흔들렸는데, 이유는 모른다.
다른 곳을 보면서 폐하의 반응을 살필 여유는 없었거든.
나는 지금 태연한 얼굴을 유지해야 하니까……!
“전에도 말씀드렸지만, 제가 여기에 있는 건 오로지 폐하 때문이에요.”
“……신아리.”
폐하는 괴로운 듯한 음성을 토해냈지만, 애석하게도 내가 제대로 듣지 못했다.
“폐하의 얼굴! 미모! 그래요, 처음엔 이 완벽한 사람을 또 어디 가서 만나나 싶어서 눌러앉았는데요. 와. 어떻게 해? 이젠 반했는데! 내가 폐하 두고 어딜 갈 수 있겠어요……!! 이, 이 완벽한 사람을 두고!”
나는 올라오는 열을 못 이겨 소파에서 벌떡 일어났다.
“…….”
“진짜 너무하다 싶을 정도로 잘생긴 거 아니냐고요. 폐하, 요새 미모에 더 물오른 거 아세요? 그런데 주접은 못 떨게 하시지, 아침에 보러 오는 것도 며칠 쉬라 하시지……!”
내가 요즘 사랑 때문에 정신이 없어서 그렇지, 원래는 폐하 미모만 봐도 배가 부른 사람이었는데-!
“…….”
“저 폐하랑 연애 안 해도 되거든요. 그거 없어도 폐하 얼굴 보면서 잘 살 자신 있거든요……! 그러니깐 폐하는 꼭 행복해지셔야 해요. 그래야 옆에서 보는 저도 행복해질 테니까!”
폐하는 소파에 앉아 계속 날 보고 있었는데, 여전히 내 시야에 들어오는 건 폐하의 미간뿐이었다.
무슨 표정을 하고 계시는지는 알 수가 없었지만.
반응이 없으신 걸 보니 어이가 없다거나 그런 생각을 하시지 않았을까.
어쨌든, 말하다 보니 속이 후련해진다.
그래, 폐하는 행복해져야 한다!
불행이 웬 말이야!
내가 폐하 어렸을 적 단체 초상화 보고 얼마나 마음이 찢어졌는데!
그렇게 어렸을 때부터 불행했으면 이제는 행복만 보고 살아도 된다고!
나는 모공 하나 보이지 않는 폐하의 매끈한 미간을 향해 선전포고하듯 말했다.
“아시겠죠? 이제 제 행복은 폐하의 행복에 달려 있어요.”
“…….”
“그러니까 폐하는 책임감을 느끼고 행복해지셔야 한다고요. 안 될 거 같으면 도와드릴게요.”
“신아-.”
“행복은…… 바로 지금부터……!”
***
“……해서 지난 성녀님의 탄신을 기념해 어떤 선물을 하는 게 좋을지 의견을 모아보고자 자리를 마련했습니다.”
성녀교의 간부, 제1 기사단의 부단장 에드워드가 단상에 올랐다.
훈련장을 하나 빌려 꾸민 임시 회의장이었다.
급히 소집해 시간이 되는 인원만 모인 것인데도 머릿수가 수십은 되어 북적거렸다.
“명색이 성녀교인데 다른 귀족들한테 질 수야 있겠습니까! 신성석으로 장식한 검은 어떻습니까?”
“성녀님께 신성석이 필요할까? 보석 장신구는 어때?”
“그런 흔한 것보단 의미 있는 쪽으로 방향을 틀어보는 건요?”
“성녀님의 이름으로 후원하는 학교를 하나 짓는 건 어떻습니까!”
“그것보다는…….”
인원이 많으니 의견도 많았다.
다들 적극적으로 참여했지만, 썩 괜찮은 의견이 나오지 않는다는 게 문제였다.
시간이 흘러도 이렇다 할 것이 나오지 않았다.
급기야 막 던지는 수준의 의견들이 주를 이루자, 에드워드가 단상을 두드렸다.
교원들의 이목이 그에게 집중됐다.
“의견은 나올 만큼 나온 거 같습니다. 그러니 지금까지 나온 의견을 종합해서 투표를 진행하는 걸로-.”
“크, 큰일 났습니다!”
기사 하나가 다급히 회의장 안으로 뛰어들어왔다.
그는 허둥지둥 에드워드에게 다가가 자신이 조금 전 들은 소식을 전했다.
“가, 간부님! 방금 황제 폐하의 명이 제국 전역에 떨어졌는데! 비상입니다!”
“무슨 일입니까?”
“그것이……!”
이어진 기사의 말에 회의장 안에 모인 교원들은 크나큰 실의에 빠졌다.
“성녀님께서…….”
“앞으로 탄신 선물을 안 받겠다 하셨다니…….”
이번 선물비용에 보태겠다고 갖고 있던 땅문서까지 판 기사도 있었다.
돈은 있는데 선물할 수가 없다니……!
분통을 터트리는 기사들 사이에서, 편안한 얼굴로 그들을 지켜보는 이가 둘 있었다.
“자넨 드렸는가?”
“네. 카디얀 님도 드리셨습니까?”
“나도 드렸지.”
기어코 검 외에 다른 것을 선물로 바친 카디얀과, 예배당에서 선물 증정식을 거행한 허퍼슨.
역시 이런 일은 기회가 왔을 때 빠르게 행동해야 하는 법이다.
‘후후후.’
두 사람은 패배자들의 괴로워하는 모습을 보며 승자의 미소를 지었다.
그러다 받은 선물도 반납한다는 이야기를 듣고 아리에게 달려가 제발 받아 달라 애원한 건 후의 일이었다.
***
데르아치 공국.
젠달 제국의 서북부에 있는 그 나라는, 비옥한 토지는 없었지만 넓은 사막이 있었다.
알렌드가 황제의 자리에 올랐을 때, 대공작이 된 데르아치가 직접 고른 땅이었다.
당시, 버리는 땅이나 다름없는 그곳을 왜 골랐느냐며 그의 안목을 비웃는 반응이 대부분이었다.
데르아치는 사막 옆에 일명 ‘공장’이라 불리는 건물을 만들기 시작했다.
손수건, 깃펜, 종이, 칫솔…….
대단한 물건은 없었으나 모두 소비자층이 넓은, 실생활에서 사용하는 것들이었다.
일정한 품질을 유지한 대량생산.
처음 보는 획기적인 방식에 사람들은 감탄했고, ‘공장’은 하나의 브랜드가 되어 빠르게 시장을 장악했다.
공장에서 나오는 제품은 기존의 시장을 무너트리고 시장을 독식했다.
수공업으로 소량의 상품을 만드는 기존의 방식이, 비슷한 품질의 제품을 대량으로 뽑아내는 공장의 경쟁상대가 될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제국 내 시장을 주무르는 ‘공장’.
그게 사람들이 두려워하고 따르는 데르아치 대공작의 힘이었다.
‘삭막하네.’
델칸은 벽에 기대서서 맞은편 창문 너머로 하늘을 바라봤다.
회색빛의 하늘은 보니아에서 좀처럼 볼 수 없는 색이었다.
“시장하진 않으십니까? 먹을 것 좀 갖다 드릴까요?”
고개를 돌리자 30대의 남자가 보였다.
데르아치 대공의 대변인이라는 그는, 마르고 창백한 인상이라 곧 쓰러져도 이상하지 않을 듯했다.
“호위 중에는 아무것도 먹지 않습니다.”
델칸은 다시 고개를 정면으로 돌렸다.
시야에 굳게 닫힌 문이 들어왔다.
샤를이 랑데트 후작에게 요청한 데르아치 대공과의 자리.
데르아치는 샤를을 자신의 저택으로 초대했고, 그게 지금 델칸과 샤를이 대공저에 있는 이유였다.
“그러시군요. 그럼 실례하겠습니다.”
대변인은 닫힌 문에 노크한 뒤 안으로 들어갔다.
안에는 샤를과 대공이 대화를 나누는 중이었다.
열렸다 닫히는 문 사이로 대변인의 얕은 기침 소리가 들렸다.
‘둘 다 몸이 안 좋군.’
데르아치 대공도 그렇고 대변인이라는 자도 그렇고.
기력이 그리 좋지 않아 보였다.
저런 몸들로 어떻게 그 젠달을 치겠다는 건지.
“델칸, 보니아 왕국에 초대 성녀의 기록이 있는 거 아니?”
“왕실 금고에 있잖아.”
“그건 사실 몇 개를 섞어 적당히 지어낸 소설이지. 그거 말고 진짜 초대 성녀의 기록 말이야.”
샤를은 자신이 읽었다는 역사책의 내용 일부를 델칸에게 이야기했다.
믿을 수 없는 이야기였다.
델칸은 증거를 보여달라 했지만, 샤를은 “믿는 건 네 자유야.”라고 말하며 입을 다물었다.
“…….”
그 며칠 뒤, 샤를은 데르아치 대공을 만나러 간다고 했다.
델칸은 샤를을 말릴지, 아니면 그녀를 도와야 할지 판단이 서지 못했으나.
차마 그녀를 혼자 보낼 수 없어 이곳까지 따라오게 되었다.
델칸은 닫힌 문을 주시한 채, 머릿속으론 샤를이 말했던 성녀의 역사를 상기했다.
‘만약 샤를의 말이 사실이라면…….’
그렇다고 한다면 성녀를 젠달에 둘 순 없었다.
젠달 뿐만이 아니었다.
‘다른 곳도 위험해.’
그녀를 지킬 수 있는 건…….
델칸은 제 손을 세게 그러쥐었다.
이 일렁이는 마음이 또 그의 정신을 어지럽히기 전에 떨쳐내야 했다.
들끓는 피에 감정이 먹힌 후엔 자신도 저를 억누르기 힘드니.
툭. 툭.
손톱이 손바닥을 파고들자 주먹 진 손 틈으로 붉고 짙은 피가 맺혔다.
아슬아슬하게 매달려 있던 핏방울들은 이내 중력을 이기지 못하고 바닥으로 낙하했다.
한편, 문의 안쪽.
샤를과 데르아치는 테이블의 끝과 끝에 서로를 마주 보고 앉아있었다.
열 명이 앉을 수 있는 직사각형 테이블이었다.
어둡고 넓은 방을 밝히는 건 테이블 위에 켜져 있는 촛대 몇 개가 전부였다.
대리석 바닥에서 찬 공기가 올라왔다.
퀴퀴하고 불쾌한 냄새가 그녀의 코를 찔렀다.
‘기분 나쁜 곳이야.’
그렇게 생각하면서도 샤를은 자리를 뜰 순 없었다.
“그럼 보시게나.”
데르아치가 손짓하자 그의 대변인이 수레 하나를 끌고 왔다.
사람 하나는 탈 수 있을 만한 크기의 수레였다.
위쪽에 덮은 천을 벗겨 내자, 맹수를 가두는 우리가 드러났다.
악취는 더욱 짙어졌다.
샤를은 더 참지 못하고 손수건을 꺼내 코를 쥐어 잡았다.
“비추게.”
“네.”
대공의 명령에 대변인이 촛대를 들어 우리 속을 비췄다.
우리에 갇힌 것을 본 샤를은 역겨움을 감출 수 없었다.
“으어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