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5화
설마, 했으나 황제는 여느 때와 다름없이 싱그러운 미소를 지으며 개판이 난 회의장을 보고 있었다.
황제 폐하도. 저렇게 사람이 유하셔서야.
전 황제 폐하께선 호전적인 분이셔서 이런 꼴을 그냥 보고 계시진 못했는데.
그때는 황제파 귀족들의 권력도 강해서, 귀족파 놈들은 쥐 죽은 듯 살고 있었지.
지금이야 현 황제께서 많이 봐주시니 설쳐대고 있지만.
하지만 프라단 후작은 지금의 황제도 나쁘지 않았다.
저렇게 유한 모습을 보이다가도 한 방이 있으시더라니까.
어쨌든 좀 전의 살기는 잘못 느낀 모양이었다.
“후작님, 무슨 일이십니까?”
“아닐세. 내가 착각한 모양이야.”
프라단 후작은 다시 어제의 영광을 회고하며 옆의 귀족과 사담했다.
그리고.
“주변국의 귀빈들도 초대해서 성대하게 연회를 열어야 한다니까!”
“나라 망신시킬 일 있습니까! 조용히 넘어가야 합니다!”
오늘도 난장판이 된 회의장을 진정시키는 건 황제의 몫이었다.
“그만들 하게.”
대신들은 슬금슬금 황제의 눈치를 보며 과열된 분위기를 가라앉혔다.
조용해진 회의장 안에 황제의 차분한 목소리가 울렸다.
“경들의 의견은 잘 들었네. 탄신 연회는 성녀께 의사를 물어보고 그에 따라 진행하는 걸로 하지.”
***
회의가 끝난 후, 알렌드는 집무실로 들어갔다.
헨켈과 에본도 함께였는데, 앞으로의 일을 논의하기 위해서였다.
가장 먼저 입을 연 건 에본이었다.
“폐하, 랑데트 후작은-.”
“잠시.”
알렌드가 에본의 말을 저지했다.
그의 날카로운 시선이 집무실 벽 모서리를 향했다.
정확히는 모서리 옆의 창을 가리고 있는 커튼 뒤였다.
헨켈도 낯선 인기척을 감지했는지 허리춤에 찬 검 손잡이에 손을 가져갔다.
잠잠한 커튼 아래, 사람의 발이 보였다.
세 사람은 시선을 교환했다.
‘허술한 침입자군.’
황제가 나설 것도 없기에, 헨켈이 움직였다.
순식간에 달려나간 그는 커튼을 들춘 뒤, 곧바로 침입자를 제압하기 위해 검을 뽑았다.
하지만 그의 검은 갈 곳을 잃고 방황했다.
“……!”
들춘 커튼 뒤에 있어야 할 침입자의 모습이 보이지 않았던 것이었다.
정체를 모르는 침입자다.
헨켈은 빠르게 황제의 앞으로 이동해 그를 호위하고, 에본은 방해가 되지 않게 뒤로 물러났다.
세 쌍의 눈이 주시하는 가운데, 한 켤레의 부츠가 또각또각 앞으로 걸어 나왔다.
부츠는 저를 경계하는 헨켈의 검이 제게 닿지 않는 거리에서 걸음을 멈췄다.
뒤쪽에 굽이 있고 크기가 작은 것이, 여성용 부츠였다.
낮부터 헛것을 보고 있는 건가.
“……누군지 알겠습니다.”
짧은 정적이 흐르고.
에본은 확신에 찬 어조로 말했다.
그런 뒤, 성큼성큼 걸음을 옮겨 미동 없는 부츠 앞에 섰다.
“폐하의 집무실까지 와서, 이건 무슨 장난이지?”
아직 황궁이 아카데미인 줄 아는 건 아니겠지.
에본은 화를 꾹 누르며 부츠를 향해 손을 뻗었다.
허공에 보이지 않는 천이 잡히자 그걸 그대로 잡아당겼다.
“초비.”
“아…….”
“……!”
에본의 보라색 눈동자가 모습을 드러낸 침입자의 정체에 놀란 빛을 띠었다.
어느새 헨켈의 뒤로 도망친 에본과 자리를 맞바꾸듯, 황제가 침입자의 앞으로 걸어갔다.
“……어쩐 일입니까?”
“하하. 폐하, 안녕하세요.”
볕을 받아 반짝이는 흑발에 알렌드가 순간 시선을 빼앗긴 건 당연한 일이었다.
초비의 망토 아래 숨겨져 있다 갑자기 드러난 침입자의 외향은,
세이칸 신의 현신이 지상에 강림했다는 착각을 일으킬 정도로 무척이나 신비했으니.
오랜만에 보는군.
지난번에 그렇게 돌려보낸 뒤로 열흘 정도가 흘렀다.
이전처럼 성녀가 멀리서 자신을 보는 것도 알았고.
자신도 종종 황궁을 누비는 성녀를 목격하긴 했지만.
이렇게 가까이에서 보는 건 오랜만이었다.
황제의 눈에 저도 모르는 따스한 빛이 스며들었다.
“성녀.”
***
“폐하! 도움! 헬프! 한 번만 살려주세요!”
내 도움 요청에 폐하는 에본 재상님과 헨켈 대장을 밖으로 보낸 뒤, 내가 앉은 소파의 맞은편에 앉았다.
“무슨 일인데?”
“저 사고 친 거 같아서요…….”
아무리 생각해도 이건 내 선에서 해결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었다.
쌓여가는 선물들을 애써 무시한 채, 프로딘타 궁을 나왔지만.
그 뒤의 여정도 만만치 않았다.
만나는 사람마다 자꾸 선물이라며 뭘 자꾸 안기고.
예배당에 도착한 뒤도 문제였다.
라울 신관님, 허퍼슨, 초비, 헬리, 그 외 이름도 모르는 사람들…….
자꾸 밀려 들어오는 선물에 도망치듯 밖으로 나왔더니.
예배당 건물 앞으로 전국 맛집에서나 볼 수 있을 법한 기다란 줄이 만들어져 있더라니까.
“그, 그만……!”
하지만 내가 그만이라 말해도 달라지는 건 없었다.
나는 이거 감당 못 한다.
여기서 탈출해야 해.
그래서 조기 퇴근을 요청하고 프로딘타 궁으로 돌아갔다.
그런 후, “방에서 혼자 있고 싶다.”라고 시간을 벌고선 망토를 입고 곧장 폐하의 집무실로 찾아온 것이었다.
“사고?”
“네. 들으셨을 거 같긴 한데, 저 생일…….”
“들었어. 지난달이었다며.”
으. 역시 소문 다 났잖아.
지난달이었다고 날짜마저 동네방네 다 퍼진 모양이었다.
앞으로 나 금언 수행해……! 흑흑.
“그럼 지금 저한테 선물이 밀려 들어오는 것도 아시겠네요……?”
폐하는 조금 마음에 안 드는 게 있는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하긴 그것 때문에 이렇게 황궁이 소란스러워졌으니.
나 같아도 마음에 안 들지!
슬쩍 눈치를 보고 있는데, 폐하가 무심한 말투로 툭 하고 말을 던졌다.
“그거.”
“네?”
“생일선물이야.”
“……?”
나는 폐하의 손가락이 가리키는 방향을 따라 시선을 옮겼다.
보이는 건 불안함에 깍지를 끼고 있는 내 두 손…….
“……제 손은 원래 제 건데요……?”
설마 ‘이 사태를 불러일으켰으니 양 손목을 잘라도 용서할 수 없겠지만, 생일이라니 이번만 봐주겠다. 그러니 내가 주는 생일선물은 네 양손이다.’
이런 말을 하시는 건가……!
나는 슬며시 옆에 있는 쿠션을 집어 내 손을 가렸다.
“감사합니다. 멀쩡히 두 손으로 살아갈 수 있게 해주셔서.”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폐하는 슬쩍 미간을 구기며 말을 이었다.
“지난번에 준 반지. 그게 내가 성녀한테 주는 생일선물이라고.”
“헐. 안 받을 건데요.”
“뭐?”
“바, 받을 수 없는데요! 이렇게 비싼 거!”
폐하가 하도 가격을 안 알려줘서 시아나한테 물어봤지.
“수호의 반지는 국보라서 역사적 가치까지 값을 매기기는 곤란할 거예요. 다만, 보석만으로 따지자면…….”
그리고 나는 실소를 흘렸다.
내 덕질 통장이 그렇게 작고 소중해 보일 줄이야.
폐하는 이게 얼만 줄이나 아실까……!
내 손가락에 무슨 짓을 했는지 아시냐 이 말이야……!
물론 그 덕분에 죽을 고비도 넘기고 신성력도 사용할 수 있게 됐긴 했지만……!
“너무 과하다고요……. 아니면 저한테 빌려주는 걸로 하시면 어때요? 선물이니까……. 일 년 동안 무이자로 빌려주신다거나……!”
“됐어. 선물은 주는 사람 마음 아닌가? 난 줬으니 알아서 해. 맘에 안 들면 버리던가.”
“익. 버릴 수 있을 리가 없잖아요. 애초에 빠지지도 않는다고요……!”
“그럼 받은 거네. 내 선물.”
초비한테 폐하가 통 크단 소리를 듣긴 했는데 이렇게 크실 줄 몰랐다.
이걸 어떻게 해야 하지……?
계산하느라 머릿속이 핑핑 돌았는데, 폐하는 지금 나한테 반지를 준 건 신경도 안 쓰는 눈치였다.
대신 뭐가 그리 즐거우신지 한층 밝아진 목소리로 내게 물었다.
“이제 내가 제일 먼저 성녀의 생일을 축하한 사람이 된 건가?”
“……?”
“시아나는 어제 줬다며. 나는 몇 달 전에 줬잖아.”
도통 무슨 말씀을 하시는지 모르겠지만…….
일단은 폐하가 기분 좋아 보이니 맞장구라도 치자.
반지는 둘째 치고 나 지금 사고 친 거 도와 달라고 온 입장이잖아.
나는 엄지를 세우며 호들갑을 떨었다.
“맞아요. 폐하가 제일 먼저 주셨죠!”
“흠.”
“와. 역시 제 마음을 뺏은 분은 뭐가 달라도 다르시다니깐요. 완전 멋있다. 역시 앞을 내다보실 줄 아신다니까! 저 지금 또 반할 뻔.”
“……그만해.”
그렇게 말씀하셔도 입꼬리 슬쩍 올라간 거 다 봤거든요.
“선물 감사합니다. 잘 사용할게요.”
나는 반지를 가리키고 웃으며 말했다.
분에 넘치는 선물이긴 하지만,
당장은 이게 없으면 신성력을 사용 못 하니까 받아 두는 편이 낫겠다 싶었다.
하지만 두고 봐요. 제가 언젠간 다른 걸로 갚아 드릴 거니까……!
“……다른 건 더 필요한 건 없나?”
“어? 선물 또 주시게요?”
“연회도 못 해줬으니까. 원하는 게 있으면 말해 봐. 뭐든 해주지.”
세상에. 폐하가 먼저 그런 소리를 하실 줄이야.
이때다 싶어 나는 눈을 빛냈다.
“폐하, 그럼 저 이행시 도와주시면 안 돼요?”
“……이행시?”
“두 글자로 된 단어로 즉석에서 시를 짓는 놀이인데요, 제가 지을 테니까 폐하가 단어 앞글자를 하나씩 말해주세요.”
“성녀가 시를 짓는다고?”
“네!”
“……알겠어.”
폐하는 떨떠름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곧 마주할지도 모를 감격스러운 상황을 상상하니 콧잔등이 시큰하다.
벌써 벅차오르는데 어떻게 하지……!
나는 청각과 시각을 집중하고 두근거리는 심정으로 입을 열었다.
“단어는 ‘누나’로 할게요. 이제 폐하가 글자 하나씩 말해주시면 돼요!”
“……누.”
“누가 세상에서 제일 잘생긴 줄 아세…….”
“하지 마.”
“네.”
살벌했다.
방금 살기 좀 느꼈던 거 같기도 하고.
역시 상상만큼은 안 되나. 현실은.
사실 이것도 예상했던 반응 중 하나라 타격이 없긴 했다.
“그러면 사심은 이쯤 하고요……. 저 이번 사태 때문에 폐하한테 조언을 구하고 싶은-.”
헙. 폐하랑 눈 마주쳤다.
요즘 폐하의 미간 보고 말하기 기술이 좀 늘어서, 얼굴을 마주 보고도 태연한 척 대화가 가능했는데.
가끔 이렇게 정말로 눈이 마주칠 때면 심장이 또 미칠 듯 뛴단 말이지.
저, 저, 저 미모 어쩔 건데……!
“하, 할 말 있으세요?”
으. 심장도 떨리고 성대도 떨리고.
하도 빤히 바라보시길래 무슨 할 말이 있으신가 하고 물었더니, 폐하가 기다렸다는 듯 입을 열었다.
“지난번에 물어봤던 거, 제대로 된 대답을 못 들은 거 같은데 다시 질문해도 되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