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4화
“성녀님, 저도 일이…….”
“카디얀 경은 여기 있어요.”
“……네.”
그런 뒤, 시아나의 명을 받았다는 사용인들이 와서 테이블을 정리하길래, 나는 터덜터덜 내 방으로 올라갔다.
설마 나 ‘눈치 없는 상사가 회식 자리에서 하면 안되는 행동’ 같은 걸 해버린 건 아닐까-!
내 말을 ‘거, 다들 생각이 있으면 상사(내) 지난 생일 좀 챙겨주고 그러라고.’라는 의미로 받아들였다던가!
“그래서 다들 불편해서……!”
“퓨우…….”
나는 바닥에 무릎을 꿇고 좌절했다.
퓨가 고개 숙인 내 머리 위로 올라가 방방 뛰었다.
놀리는 건지 위로하는 건지, 그래도 퓨라도 있어서 다행이야.
“이러고 있으면 뭐해.”
나는 몸을 일으켰다.
낮에 내 방에 혼자 있는 일이 흔한 게 아니었다.
그러니 이러고 있으면 뭐 하나.
신성력 훈련이라도 하자.
책상 서랍의 잠금장치를 풀고 돌이랑 과도를 꺼냈다.
열심히 돌을 깎고 있는데, 누군가 문을 두드렸다.
시아나였다.
“성녀님.”
“어, 시아나…….”
가쁜 숨을 내쉬는 시아나의 양 뺨이 발갛게 달아올랐다.
평소엔 꾸미지 않은 단정한 모습에 차분한 모습만 보여줘서 깜박하고 있었는데.
“레이디 프라단은 굉장했죠. 사교계에서 그녀를 모르는 사람은 없었으니깐요.”
허퍼슨의 말대로라면 시아나는 사교계의 퀸이었다.
화려하게 꾸미고 연회장을 누비고 다니는 시아나.
왠지 상상이 될 듯 안 됐었는데, 지금 충분히 느꼈다.
시아나, 장난 아니었겠어.
평소의 단정함이 살짝 풀린 시아나한테서 고혹적인 어른 여성의 분위기가 훅 풍겨왔거든…….
혼자 막 설레는 중에, 시아나는 가져온 머리 장식을 내 머리에 꽂았다.
한눈에도 귀해 보이는, 알이 고른 오렌지색 진주와 하얀색 진주로 만든 머리핀이었다.
“제가 처음으로 드리는 건가요?”
“어? 뭘?”
내가 어리둥절해하자 시아나는 “처음이군요.”라고 혼잣말하며 무척이나 환하게 웃었다.
지금 내가 또래 남자였으면 시아나한테 반했다.
“탄신 선물요.”
싸아아아아.
나는 이어진 시아나의 말에 사색이 되었다.
“아, 아니. 시아나…….”
“탄신을 축하드려요. 성녀님.”
받을 수 없다며 황급히 시아나를 붙잡으려고 했는데,
시아나는 그런 내 반응을 예상이라도 한 사람처럼 곧장 자리를 떴다.
그게 시작이었다.
똑. 똑.
“성녀님, 이건 제 마음…….”
“저희 집에서 농사지은 건데요……!”
“이거 성녀님께 어울릴 거 같아서 꼭 드리고 싶었…….”
아까 급한 일이 있다며 하나둘씩 자리를 떴던 궁 사람들이.
한 명씩 내 방을 노크하더니 선물을 놓고 쏜살같이 사라졌다.
순식간에 소매 넣기를 당한 선물들이 내 방 테이블 위를 가득 채웠다.
“……사고 쳤다.”
지난 생일이라고 아무 생각 없이 내뱉은 게 문제였다.
한 달이나 지났고, 해로 따지면 무려 작년.
그러면 ‘작년엔 몰랐으니까 올해부터 챙겨줄게.’라는 흐름을 타야 하는 거 아니냐고……!
정말로 그 말이 지난 생일선물을 뜯어내려는 말로 들렸을 줄이야……!
“너도 갖다 드렸어?”
“잡히지 말자. 돌려주시려 할 테니까.”
“당연하지.”
방 밖에서 들리는 저런 대화에 돌려주러 갈 수도 없고.
심지어 사람들이 찾아올 때마다 복도에서 불안한 표정으로 있던 카디얀은,
근무 교대 직전에 허리춤의 검을 풀었다.
그리곤 한쪽 무릎을 꿇고 고이 펼친 두 손바닥 위에 검을 올려 내게 내밀었다.
“성녀님, 우선 이거 받아주시면 안 되겠습니까. 제 자식과도 같은 검입니다.”
……카디얀한테 자식 같은 검을 왜 나한테 줘요!?
“안 받아요….”
“……네.”
흑흑.
성녀 뭔데. 말 한마디 했다고 선물 받는 이 파급력 뭔데.
어쨌든 이렇게 본의 아니게 받아버렸으니….
나는 내 덕질 통장을 열기로 했다.
그리곤 이번 일로 교훈을 얻었지.
앞으론 폐하 말고 다른 사람한테 말할 때는 세 번 생각하고 말하기.
폐하는 괜찮다.
내가 하는 헛소리는 기가 막히게 귓등으로 들어주시거든.
내 말의 대부분은 흘려 들어주신다 이 말이야. 후후. 나 왜 좀 슬픈 거 같지.
어쨌든.
‘크흡. 하루가 길다…. 폐하 보고 싶어.’
***
그렇게 생일선물 소동은 어제로 끝인 줄 알았는데.
“…….”
다음날.
아침을 먹은 후 예배당으로 출근하기 위해 1층으로 내려가려던 중이었다.
나는 로비에서 풍겨오는 불길한 기운을 감지하고 2층으로 후다닥 올라갔다.
그리곤 난간을 붙들고 로비를 내려다보았다.
활짝 열린 정문, 분주하게 무언가를 운반하는 사람들.
“……브렌?”
그 속에서 사람들을 지휘하고 있는 낯익은 얼굴이 있었는데,
에본 재상님의 부하인 브렌이었다.
“황실 물품의 출납 관리를 맡고 있습니다.”
프로딘타 궁으로 거처가 정해졌을 때, 필요한 물품을 조사하러 왔었지.
그 후론 만날 일이 없어 브렌을 본 건 그날이 전부였다.
“그런 브렌이 왜 여길……?”
브렌의 지휘에 따라 사람들이 운반한 물건들이 로비 한쪽에 쌓여갔다.
저게 다 뭐지. 오늘 누가 여기로 이사하나.
무슨 일인지 감도 못 잡고 있는데, 출근하는 날 배웅하려 옆에 계속 있던 시아나가 입을 열었다.
“다들 행동이 빠르네요. 황궁 밖은 어제저녁부터 소식이 돌기 시작했을 텐데.”
“……응?”
좀 더 설명이 필요하다는 눈으로 바라보자, 시아나가 이 사태의 자초지종을 말해줬다.
요약하자면, 어제 내 생일 발언이 황궁 밖으로까지 퍼졌고.
발 빠르게 움직인 귀족들의 선물들이 황궁의 문이 열리는 새벽부터 들이닥쳤다는 소리였다.
그러니까 이제 끝이라고 생각했던, 어제 소동의 연장선이란 말이지……?
저게 다 내 생일 선물이라는 거고……?
“너무 많은 거 아니야……?”
“이제 시작인걸요. 오늘은 검문소가 바쁘겠네요. 황제 폐하께서 성녀님께 오는 모든 물품은 안전한지를 확인하도록 하시거든요.”
시아나는 이 상황이 마음에 드는지 웃음을 띠며 말했다.
“여기서 더 들어온다고……?”
나는 떨리는 눈으로 로비에 쌓인 물건들을 자세히 살펴봤다.
거참……. 번쩍번쩍하기도 하네……. 안목 없이 봐도 그냥 값비싸 보이고…….
진짜…….
‘아찔하다.’
손이 벌벌 떨리고 등줄기로 식은땀이 흘렀다.
어떻게 하지.
‘왜……. 올해도 아니고……. 작년 생일에 이렇게까지 하는 건데……!’
***
“성녀님의 탄신이었다니요!”
“황제 폐하, 크게 연회를 열어야 합니다.”
“그냥 넘어가면 다른 나라들이 젠달을 어떻게 보겠습니까?”
젠달의 황궁, 회의실.
어제저녁, 제국을 강타한 충격적인 소식에 젠달의 대신들은 부랴부랴 오전에 모여 긴급회의에 들어갔다.
“아닙니다. 조용히 넘어가야 합니다.”
“이제 와 연회를 연다고 소란을 피우면, 젠달이 성녀님의 탄신을 몰랐다는 걸 인정하는 꼴이 되지 않습니까?”
“그렇습니다. 폐하, 비밀리에 축하연회를 열었다고 말하는 편이…….”
한쪽은 연회를 열어야 한다, 다른 한쪽은 그냥 넘어가야 한다.
대신들은 나뉜 의견에 편을 갈라 싸웠다.
알렌드는 평소처럼 개판이 되어가는 회의장을 바라보다, 한 사람을 주시했다.
랑데트 후작.
다른 때 같았으면 벌써 앞장서 흙탕물을 튕기고 있을 위인이, 지금은 한 발 뒤로 물러서 상황을 관망하고 있었다.
이제는 이런 주제가 그에게 흥미가 없다는 소리겠지.
“…….”
황제의 시선을 느낀 건지, 랑데트 후작이 슬쩍 고개를 돌려 시선을 피했다.
에본은 그런 후작을 보고 속으로 혀를 찼다.
‘역모 계획을 들킨 줄도 모르고. 본인이 뒤가 켕기는 일을 하는 건 아는가 보군.’
랑데트 후작은 신성력이 강한 황제를 무서워했다.
그런데도 그가 데르아치 대공과 손을 잡도록 움직인 것은 그의 욕심 때문일 가능성이 컸다.
랑데트 후작은 제 가문과 제 이익을 위해 움직이는 사람이었으니까.
무슨 욕심이 저런 큰 헛된 꿈을 꾸게 했는지는 몰라도.
‘멍청한 선택이야.’
능력이 안되는 욕심은 결국 자신을 갉아먹을 뿐이다.
이미 오디트리아 대륙의 몇몇 왕가가 황제에게 힘을 실어주기로 비밀리에 약조했다.
랑데트 후작은 자신이 덫을 놓는다 생각하겠지만, 실상은 황제의 거대한 우리 속에 후작이 잡혀있다고 봐도 무방한 것이었다.
‘니세포르엘 신전에 손자가 있었지. 노엘 랑데트. 안 됐어. 부모도 사고로 잃었는데. 조부마저 잃게 됐으니.’
그 아이가 슬퍼하면 성녀님께서도 안타까워하시겠지.
에본은 거기까지 생각하다 정신을 차리곤 의문을 가졌다.
왜 성녀님 생각이 났지?
고민해보니 금세 원인을 찾을 수 있었다.
지난주 수업에서 성녀에게 받은 디저트가 무척 입맛에 맞았었다.
지금도 그 맛을 못 잊을 만큼.
그래서 성녀님 생각이 난 모양이야.
에본은 대수롭지 않게 넘기며 다시금 회의에 집중했다.
초비가 알았더라면 한바탕 배를 잡고 깔깔거리며 에본을 비웃을만한 결론이었다.
한편, 알렌드는 후작에게서 시선을 거두고 다른 대신들을 살폈다.
이 중 몇몇은 랑데트 후작과 접선했다는 보고가 들어왔다.
황제의 눈이 자신들의 목에 닿는지도 모른 채 핏대를 세우며 제 의견을 내세우기 바쁜 이들.
알렌드는 그들을 보며 머릿속으로 찬찬히 계획을 정리하고 있었다.
위험이 될 만한 인물, 가장 먼저 처리해야 할 인물.
그러다 황제파 귀족들이 앉은 자리에서 흘러나오는 사담이 그의 귀에 들어왔다.
“프라단 후작님. 영애께서 성녀님께 가장 먼저 탄신 선물을 드렸다면서요?”
“암, 우리 프라단 가문에서 드린 거나 마찬가지지. 껄껄.”
“가문에서 내려오던 가보 아닙니까? 그걸 내어 드리다니, 배포도 크십니다.”
“그 정도는 해드려야 하지 않겠는가. 성녀님의 탄신을 축하하며 드리는 선물인데.”
시아나의 아버지, 프라단 후작은 기분 좋게 웃으며 옆의 귀족과 대화를 나눴다.
어제 황도의 저택으로 급히 돌아온 딸이 가보를 내어달라 했을 땐, 몹시 질겁했으나.
모두가 모르고 지나간 성녀님의 탄신을 챙겨야 한다는 말에, 그가 더 다급해져 가보를 딸의 손에 들려 보냈다.
‘성녀님께서도 우리 프라단 가문을 기억하시겠지.’
어쩌면 황제 폐하보다도 먼저 드리지 않았을까.
내심 뿌듯한 마음을 감출 수 없던 프라단 후작은 껄껄 웃다가 흠칫 몸을 떨었다.
순간 목덜미가 서늘했다.
‘살기?’
기운이 느껴지는 방향으로 고개를 돌렸더니 그곳엔 황제가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