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3화.
“요즘 황궁에 유령 소문 돌고 있는 거 알아?”
“또 지어낸 얘기야? 그래도 지금 같은 밤에는 그런 얘기하지 말자. 너무 무서워.”
“이번엔 지어낸 이야기 아니야. 경비병한테 직접 들었다니까.”
늦은 밤.
본궁에서 숙소로 퇴근하는 듯한 하녀들의 대화 소리가 들렸다.
“한밤중에 발소리가 들려서 뒤를 돌아보면 아무도 없대. 그런데 거기서 끝이 아니라더라. 발소리랑 같이 괴상한 소리도 들린대.”
“동물 울음소리 아니야?”
“그것보단 어린애가 장난치면서 내는 소리 같다던데. 흉내 내는 걸 들었는데-.”
“퓨!”
“어? 맞아. 어떻게 알았어?”
“……나 아무 말도 안 했어.”
“어……?”
하녀 둘은 사색이 된 얼굴로 비명을 지르더니 쏜살같이 도망쳤다.
나는 그 뒷모습이 사라질 때까지 기다렸다가 수풀 밖으로 나왔다.
“우리 얘기였나 봐.”
“퓨?”
내 손 위에서 퓨가 꼼지락거렸다.
하지만 나는 그런 퓨의 모습을 볼 수 없었다.
초비한테 빌린, 모습을 숨겨주는 망토 때문이었다.
“발만 안 보이면 완벽할 거 같은데.”
고개를 숙이니 내 신발과 외투 밑단이 보였다.
그리고 그 위로는 아무것도 없었지.
덕분에 마치 잘린 발이 걸어 다니는 것 같은 괴이한 상황이 연출됐다.
이건 아무한테도 들키지 말자. 보는 사람 심장 떨어질라…….
“발이 보이는 이유요? 원단을 재단할 때 실수로 짧게 잘랐거든요.”
“그러면 원단을 다시 만들면 되지 않아요?”
“다시 못 만들, 지는 않는데 원단 재료가 없어서요. 하하하.”
투명 망토라니.
초비는 천재일지도 몰라.
나중에 카메라도 하나 발명해줬으면.
그러면……! 거울 때문에 쫓겨나는 일도 없을 거 아니야……!!
4일 전,
갑작스러운 폐하의 포옹에 나는 그대로 정신을 놓았다.
그 널따랗고 탄탄한 가슴팍에 갇힌 느낌은 맨정신으로 버티기 힘들었지…….
제정신이 든 건 그날 저녁.
나는 침대에 누워있었고, 치료 신관이 다녀갔었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당연한 소리지만 미열 외에는 이상 증상이 없어 열을 좀 떨어트리는 조치만 취했다고.
문제는 그 이후에 듄이 해준 말이었다.
“황제 폐하께서 성녀님의 건강이 염려되니 수업을 며칠 쉬시는 게 좋으실 것 같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콰과광.
거대한 천둥소리가 내 뇌리를 뚫듯이 쳤다.
이건…….
폐하가 더는 새벽 수업을 할 수 없다고 말한 거랑 뭐가 다르겠어……!
나 찬 거 미안해서 봐주시는 줄 알았는데, 거울로 선을 넘어버린 모양이었다.
크흡. 슬프지만 조금은 예상한 거니……. 마음을 비우고 받아들여야지 어쩌겠어.
‘그래, 영업도 무작정 들이대면 안 되지.’
이렇게 씨를 뿌려놓으면서 조금씩 스며들게 하는 것도 나쁘지 않았다.
나중에 폐하가 폐하한테 덕통사고 당하는 날이 올지도 모르니까……!
그땐 폐하랑 같이 주접떨 수 있을지도!
[폐하, 제가 ‘누나’로 이행시 해볼 테니까 운 좀 띄어주세요.]
[그러지. 누.]
[누가 세상에서 제일 잘생기셨는지 아세요?]
[나.]
후후.
후후후.
“후후후후.”
“퓨?”
“아.”
상상만 해도 좋아서 나도 모르게 실실 웃고 있었다.
아직 밖이지.
나는 퓨를 한 번 쓰다듬고, 바닥에 있는 돌을 집어들었다.
“이런 괴담이 돌고 있는 줄 몰랐네. 이것만 챙기고 가야겠다.”
그리곤 돌을 가방에 넣었다.
신성력 훈련용 돌이었다.
이걸 누구한테 구해 달라 할 수도 없고.
밤에 몰래 나와 돌을 줍고 다녔더니 괴담의 주인공이 된 모양이었다.
황궁에 괜히 공포 분위기 조장할 필요는 없으니 앞으로 조심해야겠어.
“이제 가자.”
“퓨, 퓨.”
발코니를 통해 방으로 돌아온 뒤.
나는 침대가 아닌 책상에 앉아 입문서를 펼쳤다.
입문서에 있는 훈련법 중, 지하 실험실을 빌려야 하는 훈련법은 모두 끝났다.
남은 것들은 조용하게 할 수 있는 것들이라 며칠 전부턴 방에서 혼자 훈련하고 있었단 말씀.
“오늘도 볼 거야?”
“퓨.”
책상에 둔 쿠션 위에서 퓨가 방방 뛰었다.
내가 훈련하는 게 재밌는지 계속 옆에서 구경하길래 아예 자리를 만들어줬다.
주인님도 가끔 와서 저기서 퓨랑 앉아 구경하다가 가는데.
그때마다 너무 귀여워서 심장 멎는다니까.
어쨌거나.
나는 반지의 신성석을 이용해 양손에 보호 결계를 둘렀다.
그리곤 왼손엔 주먹만 한 크기의 돌을, 오른손엔 과도를 들었다.
과도는 주방에서 날이 무뎌져 버린다는 걸 받아온 거였다.
과도에 공격계열의 신성력을 두르고 돌에 갖다 대자 두부 자르듯 숭덩숭덩 잘려나갔다.
크흐. 이 절삭력. 장미 그림 새겨진 칼 부럽지 않다.
“반지로 신성력을 사용해야 하는 게 영 불편하단……라니. 나 방금 건방졌지?”
나는 내가 뱉은 말에 놀라 고개를 흔들었다.
신성력 없는 개살구 성녀에서 이 정도로 발전한 게 어디인가.
올챙이였을 적을 생각해. 이 개굴아.
퓨도 동의하는지 쿠션 위에서 호들갑을 떨며 폴짝폴짝 뛰어올랐다.
“퓨우! 퓨!”
“혹시 개구리 흉내 내는 거야? 내가 그 정도로 건방졌……응?”
코에서 뭔가가 주륵 흘러내리는 느낌이 났다.
콧물이면 쪽팔릴 거 같은데.
머뭇거리며 인중을 닦아내니 약한 피비린내가 나며 피가 묻어나왔다.
“아, 다행이다. 코피네.”
콧물이 아니라는 사실에 마냥 안심할 순 없었다.
책상에 툭. 툭. 하고 흘러내리기 시작해서, 급한 대로 손수건을 찾아 코를 틀어막았다.
“고3 때도 안 흘려본 코피를…….”
히죽 웃음이 새어 나왔다.
후후. 내가 요즘 이렇게 열심이라니까!
이걸 누구한테 자랑할 수도 없고.
“폐하한테 어필을 좀 해볼까? 나 이렇게 열심히 한다고?”
“퓨?”
“농담이야.”
아직은 폐하한테 내가 신성력이 있다는 걸 말할 순 없었다.
작고 소중한 내 신성력이 어느 정도로 도움이 될 수 있을지 가늠이 안 됐기 때문이었다.
폐하한테도 전쟁까지 세워놓은 계획이 있을 텐데.
불확실한 내 신성력이 알려지면 그 계획에 변수가 생길지도.
그러니 내가 확실하게 도움이 될 것 같은 상황이 올 때 말하기로 했다.
일단, 전쟁을 대비하기 위한 목표로는 크게 두 가지였다.
내 목숨은 내가 지키기.
가능하면 폐하의 목숨도 내가 지키기.
***
하지만 한 치 앞도 모르는 게 사람 인생이라 했던가.
나는 전쟁보다 지금의 상황을 먼저 대비했어야 했다.
‘사고 쳤다.’
으아아아.
나는 머리를 쥐어뜯었다.
일이 이렇게 돼버릴 줄 정말 몰랐는데.
‘몰랐다고 하면 다냐, 이것아……!’
이번에도 내 주둥아리가 한 건 했다.
아니, 이번엔 내 뇌도 공동책임이 있었다.
***
발단은 오늘 오전.
주말의 다과회에서 일어났다.
“만약 전쟁이 일어난다면, 초여름쯤이 되겠군요.”
헤이즐은 그렇게 말했다.
지금은 1월.
전쟁이 일어나게 된다면 앞으로 반년 정도가 남은 셈이었다.
황궁은 평화롭고, 데르아치는 아직 몸이 좋지 않아 칩거 중이라 하고.-그 정도로 아픈 사람이 왜 역모 같은 걸 꾸미는지 모르겠다.-
내가 할 수 있는 건 신성력 훈련과 기본 지식을 익히는 공부 정도였으니.
예배당 출근과 수업이 없는 주말엔 대체로 여유가 있는 편이었다.
i/“앙뜨완 제과점의 새로운 디저트요?”
“응. 헬리가 거기 사장님이랑 친한데 사람들 의견을 듣고 싶은가 봐. 시간 괜찮은 사람은 이번 주말에 같이 시식해줄 수 있나 하고.”
“저, 저 하고 싶어요!”
“저도요!”
“저도……!”
신메뉴의 반응도 살필 겸, 프로딘타 궁에서 시식단을 모집했는데 다들 눈을 빛내며 참석 의사를 밝혔다.
생각지도 못한 전원참석이었다.
스물 남짓한 인원이 주방으로 우르르 몰려가는 건 헬리가 정신없을 거 같고.
그래서 프로딘타 궁에서 다과회를 열기로 했다.
다들 들떴는지 이른 아침부터 다과회 준비가 시작됐다.
뜰에 기다란 테이블 네 개를 쭉 이어붙이고 그 위에 깨끗한 천을 덮었다.
디저트와 차를 준비했는데, 그것만으로는 좀 아쉬워서 음식과 와인도 가져다 놓았다.
귀족들의 다과회보다는 홈파티 느낌이었지만 뭐 어때!
프로딘타 궁에서 일하는 사람이 전부 모인 자리라 거나하게 차려놓고 싶었다.
자고로 음식 대접할 때는 모자란 것보다 남는 게 훨씬 낫다니까.
“오늘은 다 같이 놀아요!”
상석에 앉은 나를 제외하고, 모두 지위 상관없이 테이블에 둘러앉았다.
처음에는 어색하게 찻잔을 들던 사람들은, 이내 편안한 모습으로 먹고 마시며 놀기 시작했다.
그러는 걸 보는데 괜스레 마음이 뭉클해지는 거 있지.
우리 궁이 이렇게 분위기가 좋다니까!
“성녀님, 즐거워 보이세요.”
“응. 다들 좋아해 주니까 즐겁다. 대화 듣는 것도 재밌고.”
나는 옆에 앉은 시아나와 웃으며 수다를 떨었다.
폐하가 왜 전쟁 얘기를 하기 싫어하는지 알겠다.
이런 평화로운 행복을 깨트리기 싫어서가 아닐까.
‘평화 최고…….’
들뜬 마음으로 그런 생각을 하고 있는데, 근처 하녀들의 대화가 내 귀에 들려왔다.
“뭐? 지난달에 생일이 있었어? 몰랐네……. 언제였는데?”
“음……. 셋째 주 두 번째 날.”
“어? 나랑 하루 차이다.”
무심코 내뱉은 내 말에 순식간에 분위기가 싸해졌다.
나 뭐 잘못 말했나 하고 눈치를 살피고 있는데, 시아나가 무서운 미소를 지으며 날 불렀다.
“성녀님……. 탄신이…… 지난 달이셨다고요……?”
“어, 어……. 내 생일이 그때…….”
그렇게 화를 참는 것처럼 보이는 시아나는 처음이었다.
이상한 건 시아나 뿐만이 아니었다.
다들 급격히 말수가 줄어들더니, 서로 눈치 게임이라도 하는 것처럼 자리를 뜨기 시작했다.
“아, 저 오늘 한스 일을 도와주기로 했던 걸 깜빡했네요!”
“저, 저도 일이 있었는데 이만…….”
“저도…….”
아까 내 뭉클함을 자아내던 풍경은 꿈인가 싶었다.
다들 사라져 휑한 테이블은 적막하기 짝이 없었다니까.
믿었던 시아나는 제일 먼저 사라졌다.
“잠시 다녀올게요.”
어디를, 왜……?
쓸쓸해진 기분에 장식용 꽃을 매만졌다.
우리 궁 사람들, 좀 전까지 분위기 좋고, 막 행복하지 않았나……!
그래도…….
“카디얀 경이 있어서 다행이에요.”
“아, 네.”
헐.
나는 무성의하기 짝이 없는 카디얀의 대답에 놀라 뒤를 돌아봤다.
카디얀은 안절부절못하며 주위를 두리번거리고 있었다.
그러다 나와 눈이 마주친 그는, 억울하단 듯 울상이 되었다.
왜, 뭔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