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1화
‘으아아아아.’
폐, 폐하 손가락이 내 이마에……!
손가락은 툭 닿았다가 금세 떨어졌지만, 나는 온몸의 신경이 그쪽으로 쏠린 듯 이마가 찌릿찌릿했다.
제가 겉으로는 괜찮아 보일지 몰라도 이런 예고 없는 터치에는 아직 익숙하지 않거든요…!
‘세수하고 오길 잘했다.’
어쩐지 오늘은 열심히 씻고 싶더라.
과거의 나 자신을 칭찬하고 있자니, 폐하가 입을 열었다.
“성녀, 이번엔 또 무슨 생각을 하는 건지는 모르겠지만. 나는 연애엔 관심 없어.”
“헉. 왜요?”
“……이유를 성녀한테 설명해야 하나?”
아니, 그런 건 아닌데요.
딱 잘라 말하는 단호한 말투에 나도 모르게 왜냐고 물어버렸지 뭐야.
게다가 연애에 관심 없다는 말에 내 심장은 왜 '쿵' 하고 내려앉는지.
‘기대하고 있지 말라고. 제발…….’
내 심장, 잘 들어. 그렇게 설레발쳐도 나는 해줄 수 있는 게 없거든!
저 얼굴! 미모를 보라고!
저 곁에 내가 비집고 들어갈 틈이 있을 것 같은지!
내가 요즘 심장 튼튼해지라고 물약을 먹고 있긴 하지만.
그건 장수하면서 폐하 행복을 방해하는 장애물들을 치워버리기 위함이지, 그 이상을 생각하고 있던 게 아니었다.
몇 번 진지하게 고민해봤지만, 폐하와 내가 그렇고 그런 사이가 될 가능성은…….
‘에본 재상님이 나한테 좋아한다고 고백할 가능성과 똑같지.’
절대 일어날 수 없는 일이란 소리였다.
그러니까 시간이 얼마나 걸리든 폐하를 향한 이 핑크빛 감정은 서서히 줄이고 덕심만 남기…….
“성녀는.”
“네?”
폐하는 운을 떼고 잠시 말을 멈췄다.
생각을 정리하려는 듯 책상을 손끝으로 가볍게 두드렸다.
“성녀가 원하는 삶은 뭐지.”
“제가 원하는 삶이요?”
이건 툭 치면 답이 탁 나올 정도로 쉬운 문제였다.
제가 뭐 바라는 게 달리 있겠나요……!
폐하 덕질 하면서 폐하가 행복하길 바라는 게 제가 원하는 삶이죠!
나는 망설임 없이 입을 움직였다.
“저는-.”
“성녀야말로, 연애하는 걸 원하는 거 아닌가?”
내가 지금 뭘 듣고 뭘 본 거지.
“……여, 여, 연애요?”
폐하의 시선이 날 똑바로 향해 있었다.
저 마음속에 없는 소리라곤 하나 못할 듯한 맑은 호수 같은 눈으로, 연애라니.
저 미모로, 진지하게 그런 소리를 하시면……!
‘누가! 누구랑요! 육하원칙으로 말씀해주시면 안 될까요!’
순간 머릿속에서 오만가지 생각이 다 들었는데, 날 말리는 게 우선이었다.
이거 놔봐, 지금 폐하가 먼저 꼬셨다고.
‘참아, 나는 참을 수 있다……!’
꽈악. 나는 책상에 가려진 발끝에 힘을 줬다.
속으로 훅훅 심호흡한 뒤에 폐하에게 물었다.
“제가 누, 누구랑 연애를 해요……?”
그래도 목소리가 떨리는 건 어쩔 수 없다.
“성녀가 요즘 관심 있어 하는 그 사람이랑.”
“……!”
이번에는 심장이 입 밖으로 튀어나올 뻔했다.
내가 요즘 관심 있는 사람은 폐하밖에 없는데.
폐하한테 들키는 날이 언젠간 올 줄은 알았지만, 그게 오늘일 줄이야.
“어, 어떻게 아셨어요?”
“티가 너무 나서 모른척할 수가 없더군.”
“티가 났어요?!”
“요새 성녀가 제일 많이 하고 다니는 혼잣말이 뭔지 알아?”
“모르겠는데요…….”
“‘너무 좋아서 미치겠어.’”
나는 훅 들어온 치명타에 잠시 숨을 멈췄다.
아찔하다. 정말 미칠 뻔.
저렇게 대범한 짓을 저질러 놓고 폐하는 아무것도 모르는 게 분명했다.
나도 시아나가 했다는 충성계약을 맺어놓아야 하나.
그래야 폐하한테 해코지를 못 하지. 내가……!
“그러니 모를 수가 있나.”
그렇게 말하는 폐하의 오른쪽 눈썹이 미세하게 움직였다.
내가 폐하 기분 안 좋으실 것도 예상하고, 잘되지 않을 것도 예상하긴 했는데.
설마 이렇게 제대로 된 고백도 못 해보고 차이는 건가.
이유를 알 수는 없었지만, 심장이 쿵쿵 뛰며 고막을 울렸다.
애초에 고백할 생각 따윈 없었는데.
덜컥 찾아온 두려움과 조급함에 생각과 몸이 방어기제를 펼치듯 움직였다.
기왕 차일 거라면 고백은 하고 차이는 게……!
“제가 사실은-!”
“성녀가 슬린 경을 좋아하는걸.”
“네!? 제가 좋아하는 사람은 폐하인데요?!”
…….
“아.”
나는 서둘러 손으로 입을 막고 눈을 굴리며 딴청을 부렸다.
조용히 하고 있으면 지난번처럼 폐하가 ‘좋아한다’를 다른 의미로 받아들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
폐하는 내가 속을 예상할 수 없을 정도로 처음 보는 표정을 짓고 있었다.
보아하니 제대로 알아차리신 모양이다.
“하하…….”
“…….”
어색한 공기가 우리 사이에 감돌았다.
‘차이겠지……. 나 차인다아아…….’
그래도 고백은 하고 차여서 조금은 덜 억울…… 그전에 그걸 고백이라고 볼 수 있을까……!
‘왜 슬린 경이냐고요-!’
에본 재상님보다도 더 황당한 상대의 등장에 반사적으로 말이 튀어나온 게 문제였다.
도대체 어느 포인트에서?!
폐하한테 내 마음이 어쩌다 그런 오해를 받게 됐는지 캐묻고 싶었지만, 그럴 상황이 아니었다.
‘그래도 서재에 둘뿐이라 다행인가.’
헨켈 대장과 카디얀은 복도에 있었으니, 내가 차이는 모습을 실시간으로 보여주지 않아도 된단 말이지. 흑흑.
“성녀.”
긴 침묵 끝에 폐하가 입을 열었다.
나는 모든 걸 포기한 사형수의 심정으로 이어질 말을 기다렸다.
그리고 잠시 뒤.
폐하와 나는 말싸움을 벌였다.
***
“하, 어이가 없어서! 정말!”
일과 후, 나는 방문을 걸어 잠그고 쿠션을 마구 쥐어뜯었다.
화풀이할 상대가 없으니 때리기 만만한 쿠션을 대상으로 삼았다.
“퓨, 퓨!”
내가 화낸다고 생각했는지, 퓨도 털실 매듭을 쿠션에 날렸다.
“아니야. 퓨.”
“퓨우?”
“우리의 상대는, 쿠션이 아니라.”
나는 창밖을 노려봤다.
본궁이 있는 방향이었다.
“알렌드 칸 레오디우스. ……폐하거든.”
뒤에 폐하를 붙인 건 결코 쫄아서가 아니다.
“생각할수록 분하단 말이야.”
싸움에 방아쇠를 당긴 건 새벽에 폐하가 날 차면서 한 말이었다.
“성녀는 더 괜찮은 사람을 만나야 해. 나는 좋은 사람이 아니야.”
“……그냥 제가 이성으로 안 보인다고 하세요. 폐하는 좋은 사람이거든요?”
“아니야.”
“맞는데요.”
“아니라고.”
“맞거든요.”
그렇게 시작된 실랑이는 결국엔 언성을 높이는 수준까지 가버렸지.
“와! 폐하만큼 잘난 사람이 어딨는데요! 폐하보다 괜찮은 사람 찾다가 평생 연애도 못 해보겠네!”
“찾아보면 있어.”
“어디에요? 그러다 못 찾으면! 폐하가 저 책임지실 거예요?”
“책임질 거야.”
“거짓말하지 마세요. 책임질 생각 없으면서. 그리고 지금 제가 말하는 책임이랑 폐하가 말하는 책임이랑 다르거든요?!”
“신아리, 난 너를……!”
“아, 아. 다 모르겠고. 하여튼 취소하세요. 폐하 좋은 사람 아니라 하신 거요.”
“그건 못 하겠는데.”
“고집불통.”
“누가 할 소릴.”
그러다 헨켈 대장의 노크 소리에 말싸움을 멈췄다.
유치했단 것도, 분위기가 쓸데없이 과열됐었단 것도 알지만 분하단 말이지.
“내 최애를 까다니.”
그건 아무리 폐하여도 용납할 수 없는 일이었다.
내가 폐하를 성격파탄자로 여기던 시절도 있었지만, 겪어본 폐하는 좋은 사람이었다. (성격은 아직 나쁘신 거 같긴 하다.)
내가 무슨 폐하 얼굴 찬양하듯 인성 찬양한 적 있었나.
부담가지지 말고 그냥 좋은 사람이라 인정하면 될 것을.
그렇게 기를 쓰고 자기를 별로인 사람이라 말할 건 없잖아.
“두고 봐.”
나는 오래간만에 가슴속 깊숙이 간직한 덕심에서부터 끓어오르는 투쟁심을 느꼈다.
“인정하시게 만들 테니까.”
***
다음 날.
나는 거의 뜬눈으로 밤을 지새우다가 시간이 되자 폐하의 서재로 향했다.
박력 있게 문을 열어젖히자, 책상에 앉은 폐하가 읽던 책을 덮으며 조소했다.
“안 올 줄 알았는데, 왔군.”
“쯧.”
“……쯧?”
내가 혀를 찬 게 믿을 수 없다는 듯, 폐하의 표정에 당혹감이 어렸다.
나는 문을 닫은 후 서재 안으로 저벅저벅 걸어 들어갔다.
“저랑 연애할 것도 아니신데 제가 폐하한테 잘 보일 일이 있나요.”
“신아리.”
“왜요.”
“……아무것도 아니야.”
폐하는 할 말이 있는 사람처럼 내 이름을 불렀다가, 고개를 슬쩍 저었다.
이래서 사랑이 문제라니까.
밤새 불태웠던 투쟁심은 어디로 갔는지, 얼굴 보니까 또 좋아죽겠다.
‘안 되지.’
나는 눈에 힘을 잔뜩 주고 입매를 굳혔다.
그렇지 않으면 언제 또 헤실 거리고 있을지 모른다.
“이거나 좀 보세요.”
나는 품에 소중히 안고 온 종이 뭉치를 폐하의 책상 위에 올렸다.
생각보다 세게 내려놔서 흩어진 종이가 바닥에 떨어질까 봐 순간 쫄았다.
떨어지면 주섬주섬 주워야 하는데 모양새가 빠지잖아.
지금만큼은 폐하와의 기선제압에서 내가 이겨야 한다.
다행히 폐하가 수업용이 아닌 평소의 넓은 책상에 앉은 덕에, 종이 뭉치는 한 장의 낙오 없이 책상에 안착했다.
“이게 다 뭐지.”
나는 팔짱을 낀 채 턱짓으로 종이를 가리켰다.
“뭐긴요.”
투쟁심에 불탄 내가 밤새 적은…….
“입덕 자료지.”
“입……덕?”
수십 장의 종이엔 이쁘게 적으려고 노력한 내 글씨가 빼곡했다.
다 적고 나니 손가락 관절이 펜 잡은 모양새로 굳어 피느라 고생했지만.
원래 사람 한 명 입덕 시키려면 공을 많이 들여야 하는 법이다.
‘이전 세계였으면 입덕 영상 만들어서 링크를 보냈겠지만……. 아쉬운 사람이 우물 파야지 어쩌겠어.’
후후. 하지만 영상 없이도 내 자료는 쓸 만했다.
나는 자신만만하게 올라가려는 입꼬리를 애써 내리고, 냉철한 분석가처럼 말했다.
“폐하는 객관적으로 자신을 볼 필요가 있어요.”
“…….”
날 올려다보는 폐하의 눈빛이 ‘이건 또 무슨 짓이지.’라고 말하는 듯했다.
지금 이 구도……. 내 각막에 양각으로 새긴다…….
잠시 현기증이 일었지만, 정신을 똑바로 부여잡았다.
오늘은 내 덕질 인생의 자존심이 걸린 중요한 날이니까……!
“오늘 수업은 제가 진행합니다.”
“…….”
폐하는 대꾸 없이 날 바라봤다.
나는 아랑곳하지 않고 내가 준비한 종이 한 장을 집어 들었다.
자고로 누군가 내 최애를 욕한다면,
“첫 번째 주제는 ‘알렌드 칸 레오디우스의 입덕 포인트 알아보기.’”
영업이 최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