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0화
“수업을 듣고 싶다고? 무슨 수업?”
“역사나 사회 같은? 이 세계에 관한 지식을 좀 더 쌓을 수 있는 수업들이요.”
“왜?”
“언제 또 신전에서 강사로 부를지 모르잖아요? 저도 아이들만큼 상식이 있어야 대화가 통할 거 같더라고요.”
라는 말은 핑계였다.
헤이즐이 그랬잖아. 무지도 독이라고.
폐하의 과거나 데르아치와는 상관없이 그 말이 계속 머릿속에 남았다.
맞는 말이었다.
죽을 때까지 평화롭다는 보장이 있으면 몰라.
그렇잖은 이상, 일정 수준의 지식은 갖는 편이 좋을 듯했다.
“……새로운 관심사가 생긴 건가.”
“네?”
“아니야. 당장 선생을 붙여주지.”
폐하는 순수하게 기뻐하는 얼굴을 했다.
순간 범접할 수 없는 소년미가 느껴져 눈앞이 아찔해졌달까.
이유는 모르겠지만, 귀한 거 봤다…….
하여튼.
당장이라는 말은 그냥 했던 말이 아니셨는지, 나는 하루도 안 돼 선생님을 배정받았다.
“……에본 하이벤입니다.”
“선생님, 멀어서 목소리 잘 안 들려요.”
“…….”
“앗, 장난이에요! 무척 잘 들립니다.”
장난치려다가 그날로 선생님 잃을 뻔.
재상님이 모든 과목을 담당하기엔 시간적 무리가 있었기에, 나중에 선생님 두 명을 더 소개받았다.
독학하는 신성력 훈련도 순탄하고, 새롭게 수업도 시작했고.
계획대로 일이 착착 진행돼 갔다.
그리고 다음 계획은…….
“앗, 성녀님! 나오셨습니까.”
이른 아침.
방문을 열고 나오자 지난밤 호위를 맡은 카디얀이 기다렸다는 듯이 나를 맞이했다.
“바로 황제 폐하의 서재에 가십니까?”
“네. 그러려고요.”
카디얀은 더 묻지 않고 날 쫓아왔다.
닷새째 목적지가 같으니, 이제는 그냥 내 일과처럼 생각하는 모양이었다.
이전 같았으면 호위 기사를 대동하고 새벽에 폐하의 서재로 가는 일 따위 꿈도 못 꿨겠지만.
지금은 적당한 핑곗거리가 있단 말이지!
“매일 가셔서 공부하시는 게 쉬운 일이 아닐 텐데. 성녀님께선 대단하십니다.”
후후. 무엇을 숨기리.
두 명의 선생님 중 한 명이 폐하인 것을.
폐하가 먼저 말을 꺼내신 건 아니고, 내가 부탁한 일이었다.
대신 항상 바쁜 폐하가 내 수업을 위해 따로 시간을 빼기는 힘드니.
일과 시작 전, 새벽에 한 시간 정도 함께 있는 시간을 가지기로 했다.
‘그래, 포인트는 ‘함께 있는 시간’이지!’
이번 계획은 ‘폐하가 외로워할 틈을 주지 않기’!
이건 지난번 헤이즐과의 대화에서 영감을 얻었다.
“요즘 폐하께서 활기차지신 거 아십니까?”
“……활기요?”
전혀 모르겠는데.
헤이즐은 이 정도는 보여 드려도 괜찮을 거 같다며, 그림 한 점을 들고 왔다.
마치 극사실주의 작품처럼 머리카락 한 올까지 생생한 그림.
그림 속에는 니세포르엘 신전을 배경으로 열 명의 아이들이 서 있었다.
낯선 아이들의 모습 위로 지금 신전 아이들이 겹쳐 보며 묘한 기분이 들던 와중.
행복하단 얼굴로 웃고 있는 다른 아이들과 달리, 표정없이 서 있는 아이가 있었다.
거참, 뉘 집 애인지…….
“이 아이는 천사죠? 지상에 방문한 걸 기념하려 남기신 건가요?”
“처음 듣는 단어군요. 천사?”
“아, 이쪽 말로는…… 신의 사자?”
“황제 폐하이십니다.”
“아하.”
몰랐네.
이렇게 완벽하게 생긴 아이가 있을 거라곤 상상도 못 했지 뭐야.
크흡. 어렸을 때 폐하 너무 사랑스러워…….
나 헤이즐 없었으면 벌써 심장 부여잡고 울었다…….
“성녀님께서 신의 사자라 보시는 것도 이해가 갑니다. 이런 표정을 짓는 아이가 어디 흔하겠습니까.”
아니, 표정이 있어도 저 외모는 천상계 급인데요.
반박하고 싶었는데 그런 분위기가 아니라 참았다.
“그렇게 10년을 사셨습니다. 폐하께선.”
헤이즐은 내 동정심을 자극하려고 작정한 사람처럼 말투와 표정으로 서글픈 분위기를 자아냈다.
그리곤 폐하의 학창 시절에 관한 이야기를 조금 해줬다.
입학 초반에 낯선 분위기를 적응 못 하시더니 친구도 없이 자랐다.
천성은 사람을 좋아하시는 분이신데 점점 고립돼 지내시더라.
어느 날은 외롭다고 헤이즐의 방에 베개를 들고 찾아와 총장님 곁에서 자면 안 되냐고 물어보더라……!!
나는 그 대목에 두 주먹을 불끈 쥐었다.
내가 총장님 각막으로 태어났어야 하는 건데……!!
나도 그거 보여줘요. 뭔데. 나도 보고 싶은데!!
“그 시절에는 저도 무척이나 걱정이 많았었답니다.”
헤이즐은 손수건으로 눈가를 누르며 말했다.
손주를 걱정하는 할아버지 같은 모습에 나도 덩달아 가슴이 찡했달까.
우리 폐하, 외로웠구나…….
그냥 들어도 슬픈데 내가 요즘 사랑 때문에 감정이 요동치는 상태라 더 슬픈 거 있지.
나도 모르게 훌쩍거렸더니 헤이즐이 이때다 싶은 사람처럼 새로운 손수건을 꺼내 건넸다.
“그래도 지금은 성녀님께서 곁에 계셔서 다행입니다.”
“제가 있어서요?”
“아무렴요. 폐하께선 성녀님을 무척이나 좋아하시니깐요. 그런 황제 폐하의 모습은 이 헤이즐도 처음 보지 않겠습니까. 부디 계속 함께 해주시길.”
헤이즐과 나는 손수건을 든 서로의 손을 맞잡으며 고개를 연신 끄덕였다.
그래. 내가 비록 사랑 고백은 아니었지만, 폐하한테 좋아한다는 말도 들었던 사람이라고!
한동안 다정해서 잊고 있었지만, 우리 폐하는 원래 성격이 나빴다.
그런 폐하한테 ‘좋아한다’(강조)라는 말까지 들은 나라면!
‘하루의 시작을 외로울 틈 없이 같이 보낼 수 있지 않을까!’
사실 100%는 사심 채우기고 20%가 계획의 일환이었다.
왜 120%냐면…….
폐하를 향한 내 마음은 80% 따위로 채우지 못하니까…….
후후. 주접을 하도 떨고 다녔더니 이제 이런 말쯤은 낯간지럽지도 않지.
폐하한테 해보고 싶은데, 아쉽게도 새벽 수업에 붙은 조건 때문에 힘들어졌다.
“앞으로 그것만 하지 마.”
“뭘요?”
“요새 성녀가 하는 이상한 소리들.”
“이상한 소리요? 아, 맞다. 폐하 얼굴에 기승전결 다 들어가 있는 거 아세요?”
“…….”
“왜냐면……. 폐하 얼굴 곧 작품이니까.”
“선생은 다른 사람으로 알아보지.”
“안 하겠습니다.”
내 인생에 조심해야 할 건 데르아치인가 뭔가 하는 그 인간보다도 뚫린 내 주둥아리였다.
나는 시아나가 만들어준 크로스백 모양의 가방에서 물약 두 개를 꺼냈다.
하나는 내가 마시고 하나는 카디얀에게 줬다.
“그럼 카디얀 경, 오늘도 힘내보자고요!”
***
그리고 새벽 수업 8일 차.
“폐하.”
나는 평소처럼 폐하의 서재에 와있었다.
수업이라곤 하지만 거창한 건 아니고. 내가 관심 있는 책을 읽다가 궁금한 게 있으면 폐하가 답해주는 정도였다.
그래서 수업의 편의성을 위해 폐하의 거대한 책상 대신 한쪽에 작은 책상 두 개를 마주 붙여놨는데-!
“물어봐.”
내 맞은편에 앉은 폐하는 읽는 책에서 눈을 떼지 않고 말했다.
“사랑이 대체 뭘까요?”
“……뭐?”
그제야 고개를 드는 폐하의 얼굴엔 어이가 없다는 감정이 여실히 드러났다.
어이가 없으시죠? 저도 없다니깐요. 사랑이란 게 도통 뭔지.
‘도대체 뭐길래……! 이렇게 날 힘들게 하는 건지!’
올 때도 갑자기 왔으면 갈 때도 갑자기 가면 좀 좋냐고…….
사라지기는커녕, 날이 갈수록 점점 더 깊어져 가는 거 같아서 문제다.
내가 요즘 표정 갈무리하는 걸 연습해서 그렇지, 속으로는 난리가 났다 이 말이지……. 흑흑.
‘사심을 너무 채웠나……!’
주 7일이 아니라 5일 정도로 줄여야 하나.
얼굴 보는 빈도를 줄이면 좀 괜찮을까! 하지만 내가 이틀을 포기할 수 있을 리가 없지……!
“오베르 광산의 어디에서 사랑이 나온 건지 모르겠는데.”
폐하는 내가 펼쳐놓은 책의 페이지를 보며 말했다.
사랑은…….
폐하 얼굴에서 나왔죠!
그깟 책이 뭘 알아! 사랑을 하는 건 나인데!
크흡. 아침에 먹는 물약 때문에 체력이 넘쳐서 그런가.
넘쳐흐르는 이 감정을 주체할 수 없는 것이-!
‘사고만 치지 말자, 사고만.’
오늘 오후에도 초비의 지하 실험실을 빌려야 할 판이었다.
한창 끓는 이 피, 신성력 훈련으로 승화한다…….
‘실험실 없었으면 어쩔 뻔했어.’
황궁 내에서 그곳만큼 신성력을 훈련하기 딱 좋은 곳도 없었다.
넓은 데다가 보호 결계 때문에 건물 부술 염려도 없었고.
게다가.
“연구소 직원들이요? 출근은 하는데 아마 못 보실 거예요.”
“왜요?”
“방에서 나오지 말라, 아니, 방에서 나오지 않거든요. 각자 연구 때문에 바빠서 말이에요. 하하하.”
덕분에 몰래 다닐 수 있어서 나는 좋았지. 뭐.
“맞다. 폐하, 저 개인적인 거 여쭤 봐도 돼요?”
“……일단 들어보고.”
폐하는 미심쩍은 표정으로 고개를 까딱였다.
“이상한 건 아니고요.”
행복한 폐하 인생을 응원하겠단 계획은 세웠는데, 마무리가 문제였다.
폐하가 바라는 행복이 뭔지를 모르겠단 말이지.
이건 나 혼자 백날을 고민해 봐도 소용없었다.
당사자한테 직접 물어보는 수밖에 없지.
“행복하게 살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본인이 원하는 삶을 살면 행복해지겠지.”
“그럼, 폐하가 원하시는 삶은 뭔데요?”
“…….”
폐하는 잠시 말을 멈추고 생각에 잠긴 듯했다.
뜬금없는 질문에도 성실하게 대답해주려는 폐하 친절해…….
사실 폐하는 다정남이었는데 내가 외모에 눈이 멀어 모르고 있던 건 아닐까!
라니.
방심하지 말자.
그게 진짜면 내 인생은 되돌릴 수 없거든.
여기저기 갔다가 결국 폐하인 회전문 같은 삶은커녕.
나갈 시도도 못 하는 꽉 잠긴 고정문 같은 삶을 살아야 할 테니까……!
“벌써 두 개 중 하나는 고정문…….”
“뭐?”
“앗, 아무 말도 안 했어요. 그래서 폐하가 원하시는 삶은요?”
“글쎄.”
“원하는 삶 없으세요?”
“개인적으로 어떤 삶을 바라본 적은 없군. 젠달의 앞날이면 모를까.”
“그렇죠. 아무래도 저-.”
“저?”
“-도 젠달을 좋아하니깐요! 어휴, 앞날이 걱정돼서 가만히 있을 수가 있어야죠. 어디 보자, 오베르 광산이…….”
하마터면 ‘아무래도 전쟁이 일어날지도 모르니-.’ 같은 소릴 입에 담을 뻔했다.
이래서 내 주둥아리는……!
허둥지둥 딴청을 부리며 책에 고개를 박고 있는데, 폐하가 피식하고 웃는 소리가 들렸다.
다행히 이상한 걸 못 느끼신 모양이었다.
나는 민망한 웃음을 흘리며 슬며시 질문을 이었다.
“그럼 어떻게 하면 폐하가 행복해지실까요?”
“행복?”
“예를 들면, 연애라든가?”
“쓸데없는 소리.”
폐하는 검지로 내 이마를 살짝 밀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