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9화
“…….”
초비와 론데이만은 지하로 내려왔다.
창문 너머로 보이는 실험실 내부.
보호 결계가 걸려있는 공간을 굵은 나무 덩굴들이 한데 얽혀 빽빽하게 채우고 있었다.
론데이만이 처음 발견했을 때보다 더 커진 상태였다.
좀 전의 짧은 지진은 이 나무들이 자라며 천장을 밀어서 생긴 것 같았다.
‘장난 아니네.’
초비는 경악했다.
실험실을 성녀에게 내어줬을 때부터 뭔 일이 날 거라 예상은 했지만.
이런 밀림을 방불케 하는 생태계 하나가 만들어질 줄은 몰랐다.
론데이만이 초비의 눈치를 보며 더듬더듬 말을 이었다.
“소, 소장님. 이게 대체 무슨 일이죠?”
“뭐긴, 오전에 성…….”
초비는 대수롭지 않게 대답하다 입을 다물었다.
그리고는 론데이만을 힐끔 바라봤다.
‘이 자식도 분명 그거였지.’
성녀교인가 뭔가.
허퍼슨도 거기 가입한 뒤로, 성녀와 연관된 일이 생기면 저를 귀찮게 굴었다.
성녀님이 뭘 하셨냐, 뭐라고 말씀하셨냐 등등.
끝없는 질문 세례를 늘어놓다 정강이를 걷어차이고 나서야 입을 다물었다.
이게 성녀가 한 일이라는 걸 알면, 론데이만도 허퍼슨처럼 굴지 몰랐다.
호들갑을 떠는 론데이만을 상상한 초비가 ‘으.’ 하고 미간을 구겼다.
벌써 귀찮다.
“오전에 성……?”
“……성공적으로 끝난 내 연구지.”
“그, 그렇군요.”
론데이만은 침을 삼켰다.
무슨 연구를 하셨길래 세계 종말을 몰고 올 것만 같은 생명체가 탄생한 거지.
그래도 황궁 내에 있는 연구소인데 저런 게 있어도 되나.
하지만 론데이만은 그 생각을 밖으로 말하지는 못했다.
이번 분기에도 황궁 연구소 실적 대부분을 채운 건 연구소장이었다.
제 월급을 챙겨주는 상사의 연구에 제가 왈가왈부할 수가.
그 전에 참견한다고 죽지만 않으면 다행이지.
“자세한 건 말하기 좀 그렇고.”
초비는 실험실 입구 옆에 있는 버튼을 눌렀다.
벽에서 나온 각종 무시무시한 장비들이 나무 덩굴을 자르고 태우고 빨아들였다.
하도 거대하고 울창한 탓에, 실험실이 이전의 모습을 되찾기까지는 시간이 좀 걸렸다.
초비는 론데이만에게 경고했다.
“이건 기밀이니까 유출금지야. 다른 놈들한테도 그렇게 말해.”
“헙, 알겠습니다.”
허퍼슨 귀에 들어가면 또 찾아와서 귀찮게 할 게 뻔하니까.
그런 초비의 속 사정을 모르는 론데이만은 그저 고개를 끄덕였다.
***
“퓨, 나 어쩌지.”
“퓨?”
나는 침대 위에 배를 깔고 누워 입문서를 읽다가 퓨에게 말을 걸었다.
“지금이라면 짐짝이 아니라 폐하도 지킬 수 있을 거 같아.”
갑자기 근거 있는 자신감이 차올랐다.
지난주.
초비의 지하 실험실에서 진행했던 내 초심자 세트의 결과는-.
“……다섯 개 전부 폈다고?”
다섯 개의 화분에서 작은 싹들이 움텄다.
후후. 떡잎 두 장 합쳐서 내 새끼손톱 크기도 안 될 정도로 작았지만,
중요한 건 다섯 개가 전부 폈다는 거 아니겠어.
기념으로 키워볼까 하고 가져가려 했었는데, 예배당 출근이 있었다.
그래서 잠깐 실험실에 두고 오후에 찾으러 가니 싹 사라진 거 있지.
“화분이 있었다고요? ……하하. 제가 모르고 청소해버렸나 본데요.”
초비가 지하 실험실 청소를 어떻게 하는지는 나도 본 적이 있었다.
모기 한 마리 잡겠다고 가스 토치를 사용하는 것처럼 파격적이었지.
그러니 내 화분들은 눈에 보이지도 않았을 게 분명했다. 흑흑.
“그래도 없어진 게 다행인 거 같기는 해.”
폐하만 해도 3개라고 학계가 난리가 났었다는데.
작고 소중한 내 신성력은 무려 다섯 계열이었다.
나 이거 알려지면 어디 실험용으로 잡혀가는 건 아니겠지……?
그전에 세이칸 신은 피조물들에 항의 받을 지도 모른다.
이게 게임이었으면 밸런스 붕괴라며 운영자 찾고 난리 났지, 암.
“그게 무서워서 신이 내 신성력 측정값을 조절했다거나……?”
이드만타 측정기의 측정값을 세이칸이 조작했나 하는 의심이 들었지만.
세이칸이 그렇게 직접적으로 내 일에 관여할 리가 없지.
날 여기에 던져 넣고 대화 한번 없었는데……!
이건, 정말이지.
“큰 그림 미쳤다…….”
순간 번뜩인 생각에 나는 입을 틀어막았다.
방치해놨다가 이런 식으로 감동을 주려던 계획이 있었다거나……?
세이칸 신님, 제가 금손이신 건 알고 있었는데요.
설계 장인이신 줄은 또 몰랐네요.
어디까지 내다보신 건지.
덕분에 제가 폐하 얼굴도 보고 부자도 되고 신성력도 얻고 잘살고 있습니다.
데르아치인가 뭔가 전쟁만 잘 넘겨서 우리 폐하 행복하게 해 볼게요……!
“아, 해 뜨려나 보다.”
나는 조금씩 밝아지는 창밖을 보며 몸을 일으켰다.
외출복으로 갈아입고 복도로 나가니, 밤샘 호위를 하던 듄이 놀란 얼굴을 했다.
“성녀님?”
“듄 경, 좋은 아침! 새벽까지 고생이 많으셨네요. 저는 덕분에 잘 잤어요.”
“과찬이십니다. 그런데…… 어디 외출하십니까?”
“네. 갈 곳이 있어서.”
이른 새벽의 외출이었지만, 나는 당당하게 복도를 걸었다.
그리곤 자연스레 내 뒤로 붙은 듄에게 작은 물약 하나를 건넸다.
“이건……?”
“건강에 좋은 약이래요. 뭐라더라, 피곤한 것도 없어지고 체력도 좋아지고 심장도 튼튼해진다고 하던데요? 이번에 몇 개 샀는데, 괜찮으면 듄 경도 드셔보세요.”
“……성녀님.”
듄의 목소리가 살짝 감격에 젖은 듯했다.
후후……. 박스 째 사서 개당 가격은 정확히 모르지만, 금화 한 개 정도 하려나.
건강 플렉스 제대로 했지 뭐야.
하지만 후회하지 않는다!
나는 듄에게 준 것과 같은 물약을 따서 단숨에 마셨다.
‘내 심장, 우리 목표는 장수하기다!’
***
“그래서요?”
샤를은 제 앞에 앉은 60대의 남자가 불청객처럼 느껴졌다.
귀티가 흐르는 차림새, 고급 의복이 잘 어울리는 마른 체형.
세월 앞에 주름지긴 했으나 젊었을 때 잘생겼다는 말은 인사말처럼 듣고 다녔을 듯한 외모.
보니아 왕국에서도 꽤 활발하게 활동하고 있는 무역회사의 수장인 그는, 그 대단하신 젠달의 지체 높은 인물이었다.
랑데트 후작.
그가 샤를을 찾은 이유는 약 한 달 반 전에 일어난 사건 때문이었다.
“피해 본 것도 없다면서. 해적선이 같은 해역을 지나갔다는 것만으로 보니아 왕국의 해상 치안을 문제 삼고 항의하러 온 건가요? 고작?”
샤를의 말투에는 불쾌한 감정이 그대로 실려 있었다.
보니아의 자국민이 아닌 그에게까지 친절한 왕녀를 가장할 필요는 없던 탓이었다.
“젠달의 후작씩이나 되시는 분께서 이런 이유로 왕족과의 면담을 요청하다니. 보니아가 우습게 보인 것 같아 기분이 썩 좋진 않군요.”
샤를의 말처럼 지금 랑데트 후작의 면담 사유는 무척 무례한 일이었다.
통상 해군의 민원 처리 담당자가 맡아서 진행하는 일을, 왕족인 그녀에게 말하고 있으니.
랑데트 후작 또한 그것을 매우 잘 알고 있었다.
그 무례한 행동이 국가 자긍심이 높은 보니아 왕국에선 자살 행위나 다름없다는 것도.
“이유가 그것뿐만은 아닙니다.”
여유로운 태도로 말하고 있었으나, 랑데트 후작은 속이 바짝 타고 있었다.
접견실 곳곳을 지키며 서 있는 보니아의 왕국군들.
소파에 앉아 냉소적인 미소를 짓고 있는 샤를 왕녀.
왕녀의 뒤에 선, 눈구멍만 뚫린 나무 가면을 쓴 몸집 좋은 호위 기사.
후작이 데려온 네 명의 호위가 초라해질 정도였다.
강한 적진 속에 홀로 던져진 기분. 독한 와인과 시가가 절실했다.
하지만 이곳까지 왔다.
데르아치 대공과 자신의 이해관계가 맞아떨어졌고, 되돌아갈 수 없는 강을 건넜다.
이건 그가 해야만 하는 일이었다.
“사람을 물려주실 수 있으십니까?”
“제가 그쪽을 뭘 믿고요?”
샤를의 말에 랑데트 후작은 자신이 데려온 호위를 모두 물렸다.
소지하고 있던 무기와 신성석도 앞에 있는 테이블 위에 모두 올려놓았다.
“왕녀님의 안위에 위협을 가할만한 일은 없을 겁니다.”
“…….”
샤를은 제게 두 손바닥을 펼쳐 들고 있는 랑데트 후작의 모습을 바라봤다.
‘무슨 속셈이길래 이렇게까지 하는 거지?’
랑데트라는 인물에는 관심이 없었지만, 그가 ‘젠달’의 후작이라는 것에는 관심이 있었다.
경계보다는 관심 쪽으로 저울이 기울자, 샤를은 제 사람들도 밖으로 내보냈다.
한 사람을 제외하고.
“대화의 내용을 아는 건 저와 왕녀님 둘뿐이었으면 합니다만.”
샤를의 뒤에 서 있는 델칸도 내보내 달라는 뜻이었다.
“그러면 더 할 얘기는 없겠네요.”
“……아닙니다. 이 인원으로 대화하는 걸로 하죠.”
샤를이 몸을 일으키려 하자, 랑데트 후작이 그녀를 잡았다.
협상이라면 후작도 이골이 나 있었지만, 귀를 하나 줄이자고 신경전을 벌이다 때를 놓치기엔 이쪽이 아쉬웠다.
샤를이 먼저 질문했다.
“그래서, 해적 핑계를 대면서 여기까지 찾아온 이유가 뭐죠?”
“보니아 왕국과 거래를 하고 싶습니다.”
“그쪽의 무역회사와 말인가요?”
영업이었나?
이런 식의 만남을 빌미로 사업 얘기를 꺼내는 것은 사업가들의 뻔한 레퍼토리였다.
랑데트 후작의 무역회사는 거래하기에 나쁘지 않은 규모의 회사였지만.
‘그런 뻔하고 재미없는 내용이 듣고 싶은 건 아닌데.’
요새 샤를의 심기는 그렇게 좋지 못했다.
정확히는 지하 미궁을 다녀온 이후부터였다.
뭘 해도 시간 낭비 같았고 성에 차지 않았다. 지금도 마찬가지였다.
조금만 더 들어보고 여전히 재미가 없으면 일어나야겠어.
샤를은 따분함에 제 손톱을 슬쩍 매만졌다.
“그것도 부탁드리면 좋겠지만, 전혀 다른 이야기입니다. 좀 더 보니아 왕국과 걸맞은-.”
“질질 끄는 거 싫어해요.”
통상적인 아부는 됐고, 본론이나 말하라는 소리였다.
새파랗게 젊은 왕녀에게 당하는 취급에 랑데트 후작이 속으로 혀를 찼다.
상황이 못마땅하지만 어쩔 수 없지.
이번 기회를 놓치면 다시 또 왕녀와 조용히 이야기할 수 있는 자리를 만들기 어려울 터였다.
그는 주머니에서 단안경을 꺼내 부드러운 천으로 닦으며 말했다.
“보니아 왕국의 병력을 빌리고 싶습니다.”
“……젠달에선 외교관을 이런 식으로 보내나요?”
“병력을 빌리는 건 데르아치 공국입니다.”
샤를은 눈매를 좁혔다.
데르아치 공국은 그녀도 익히 알고 있는 국가였다.
신생 공국임에도 오디트리아 대륙에서 꽤 위세를 떨치고 있는 젠달의 속국.
그러니 병력이 필요하면 젠달에 요청하면 될 텐데, 왜 보니아 왕국에……?
거기까지 생각하던 샤를은 하, 하고 헛웃음을 터트렸다.
“미쳤군요.”
“원하는 걸 얻으려면 제정신으로는 못할 때가 많지 않습니까.”
“그런 미친 짓에 보니아가 가담할 거 같나요?”
“원하는 게 맞으면 가능할지도 모르는 일이겠죠.”
후작의 뻔뻔한 말투에 샤를은 눈살을 찌푸렸다.
제가 하고 싶어서 벌이는 일이면 몰라도, 보니아와 상관도 없는 집안싸움에 끼어들고 싶진 않았다.
“못 들은 걸로 하죠. 당장 돌아가세-.”
“저희 쪽 제안을 말씀드리겠습니다. 병력을 빌려주시고, 계획대로 일이 마무리된다면.”
랑데트 후작은 샤를의 말을 자르고 제 말을 하다 잠시 호흡을 멈췄다.
그리곤 단안경이 잘 닦였는지 확인하려는 듯 이리저리 살폈다.
체인을 다는 고리의 안쪽 접합부에 자줏빛의 작은 보석이 박혀 있었다.
코앞에 대고 유심히 살펴야 보이는 보석.
타국에 역모 협조를 요청하는 랑데트 후작의 태도가 묘하게 당당한 건, 데르아치 대공에게 받은 이 신성석 때문이었다.
수가 틀리면 왕녀와 저 호위 기사의 기억을 조작하면 될 테니.
그 대리인이라는 작자가 약간의 부작용이 있다고 했지만, 신경 쓸 정도는 아니라고 했다.
단안경을 쥔 랑데트 후작은 불만스럽게 저를 보는 샤를과 눈을 맞췄다.
“성녀님을 보니아 왕국에서 모실 수 있게 해드리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