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7화
헤이즐은 랑데트 후작과 데르아치 대공의 만남을 가볍게 보고 있지 않았다.
귀족파의 실세 중 하나와 젠달에서 거대한 영향력을 가지고 있는 하나.
사업을 후원한다는 그럴듯한 명분을 만들어 놓고,
‘뒤로는 무슨 작당을 하고 있으려나.’
어찌 되었든, 이쪽은 그들이 신호탄을 쏘기 전에 먼저 움직일 계획이었다.
황제의 사냥이 멀지 않았다.
‘사냥이 시작되면, 성녀의 존재가 가장 큰 변수가 될 것이다.’
황제 쪽과 제가 모으고 있는 데르아치 대공의 역모 증거.
하지만 빠져나갈 수 없는 증거를 모았다고 해도, 그 모든 걸 뒤집을 수 있는 게 성녀의 존재였다.
데르아치 세력이 성녀를 회유라도 해서 제 편으로 만든다면, 이쪽에선 아무런 수도 쓸 수 없을 터.
‘적군에게 넘어가 같은 편을 배신한 사례는 널리고 널렸지.’
황제의 의견은 성녀 없이도 충분히 승리할 수 있으니 성녀에게 데르아치에 관한 건 알리지 말자는 것이었지만.
헤이즐은 달리 생각했다.
정보가 없으면 상대가 좋을 대로 휘둘리기 마련이었다.
만에 하나를 위해 성녀에게 상황을 알리고 데르아치 세력에 휘둘리지 않도록 하는 조치가 필요했다.
그리고 그 상황이 성녀의 마음을 이쪽으로 굳힐 수 있는 거라면.
더더욱 알리는 걸 마다할 필요가 없었다.
가령, 지금 나무함 속 황제의 안타까운 과거 일부를 보여줘서 성녀의 동정심을 유발하도록 하려는 것처럼.
“열어보시겠습니까?”
선택권을 성녀에게 주는 듯했으나, 헤이즐에게는 성녀가 나무함을 열어볼 거란 확신이 있었다.
그 차분한 성녀가, 황제와 있을 때면 묘하게 상기된 얼굴을 하고 있었으니.
이렇게 제 소장품을 보겠다고 이 자리에 앉아 있는 것도 황제에게 호감이 있어서가 아니겠는가.
사실, 헤이즐이 움직인 데에는 전자의 이유보다 이쪽의 이유가 더 컸다.
‘감상 욕구가 끓어올라서 어쩔 수 없다니까.’
성녀의 눈은 헤이즐이 보던 전쟁터의 밤하늘을 닮았다.
땅의 참상 따윈 아무것도 모른다는 듯 고고하게 흘러가는 하늘.
그러다 동이 틀 때면, 태양과 만나 정열적인 연인처럼 서로의 색으로 물들어갔다.
헤이즐은 그 시간을 좋아했다.
하늘을 바라보다 묘한 고양감을 안고 전투가 재개된 전쟁터로 제 몸을 날리던.
한 쌍이 된 황제와 성녀의 모습을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그날의 향수가 떠올랐다.
그렇기에 헤이즐은 기대했다. 성녀가 황제의 안타까운 과거에 어떻게 반응할지.
“…….”
헤이즐은 달싹이는 성녀의 입술을 주시했다.
하지만 그녀의 입술에서 나온 건, 그가 예상하던 말과는 전혀 달랐다.
“아니요.”
바늘 하나 찔러 넣을 틈도 보이지 않는 단호한 말투였다.
헤이즐은 급히 말을 덧붙였다.
“하지만 궁금하시지 않습니까? 여기엔 폐하께서 어린 시절 지으신 시와, 커가는 모습을 기록한 초상화와 또…….”
이 안에 있는 건 분명, 성녀가 원하는 것일 텐데.
어찌 제가 말을 하면 할수록 성녀는 불만스러운 얼굴이 되고 있었다.
‘무엇이 문제인가.’
헤이즐의 당황스러움을 모르는 채, 아리는 속으로 통곡했다.
‘으. 완전 보물 상자잖아……! 보고 싶다……! 하지만 폐하가 숨기고 싶어 하는 거라며! 흉터라며! 야, 신아리. 정신 차려라. 나 좋자고 폐하 힘든 시기를 파볼 수는 없지, 없어. 그런데……!’
상황이 야속하기 짝이 없었다.
그나마 능력이라고 내세울 수 있는 제 시력은 왜 투시 같은 것도 못 하는가.
그러면 초상화 정도만 보고 재빨리 빠질 텐데.
“이것을 보고 싶으셔서 여기까지 오신 게 아닙니까?”
“그랬죠…….”
‘총장님이 폐하의 흉터 어쩌고 하시기 전까지는요.’
아리는 미련이 뚝뚝 떨어지는 눈으로 나무함을 바라봤다.
“그냥……. 보류해주세요…….”
“보류라 하심은?”
“폐하께 여쭤보고요……. 봐도 된다고 하시면 그때…….”
그 말에 헤이즐은 제 소장품들의 슬픈 운명을 예감했다.
황제한테는 비밀로 하고 몰래 모으던 것들이었다.
황제가 이것들의 존재를 알면…….
‘세상에서 사라져 다시는 볼 수 없게 되겠지. 그전에 복제품을 만들어놔야겠군.’
황제에게는 복제품을 내어줄 심산이었다.
어찌 되었든.
성녀가 거절 의사를 밝혔으니 상황을 더 끌어봤자 의미가 없었다.
저도 세이칸 신이 무서운 건 마찬가지라, 성녀에게 이래라저래라 강요할 수 없는 노릇이었다.
“그러면 지금 이건 쓸모가 없겠군요.”
헤이즐은 나무함을 들고 몸을 일으켰다.
총장실의 안쪽 공간으로 들어간 그가 헨켈의 시야에서 벗어났을 때였다.
“총장님, 여쭤볼 게 있어요.”
헤이즐은 고개를 돌렸다.
성녀는 꼿꼿한 자세로 앉아 정면을 바라보고 있었다.
아까 제가 입술을 가린 것처럼, 뒤쪽의 헨켈을 의식한 듯한 모습이었다.
성녀가 만들어내는 예사롭지 않은 분위기에 헤이즐의 호기심이 동했다.
“뭐든 답해 드리겠습니다. 말씀하시지요.”
성녀의 단정한 입매 사이로 예리한 어조의 질문이 흘러나왔다.
“제가 폐하께서 숨기시는 일을 알아야 하는 때가 온다고 하셨죠?”
“그렇습니다.”
“그러면 앞으로 커다란 사건이 일어난다는 건가요? 폐하께서 숨기시는 게 드러날 만한?”
“……그렇습니다.”
헤이즐은 고개를 천천히 끄덕였다.
그는 머릿속으로 이 질문에서 뻗어 나갈 대화 몇 개를 빠르게 예상했다.
손바닥에 찌릿한 느낌이 통할 정도의 기분 좋은 긴장감이 느껴졌다.
헤이즐은 성녀의 옆모습을 주시했다.
“예를 들면 전쟁 같은 거요?”
“……그렇게 되지 않도록 노력은 하고 있습니다만, 장담은 할 수 없습니다.”
“그렇군요.”
성녀는 덤덤히 대답했다.
하지만 그녀의 무릎 위에서 굳게 쥐어진 양 주먹이 잘게 떨렸다.
전쟁이라는 말에 겁을 먹은 건가.
그럴 수도 있지.
신이 보냈다고는 하나, 성녀는 고작 스무 살의 앳된 소녀였다.
헤이즐은 식어가는 제 기대감에 아쉬운 작별을 고하며 다시 나무함을 들어 올렸다.
“그러면 폐하의 적이…….”
‘성녀님의 특별함은 외모와 신성력에 국한된 모양…….’
“데르아치라는 사람인가요?”
헤이즐이 소중히 여기는 나무함이 바닥에 떨어져 굴렀다.
***
알렌드는 자주 꿈을 꿨다.
대부분 다른 꿈이었으나, 언제나 같은 것이 있었다.
[아서 형.]
여섯 살 알렌드는 제가 잡은 손의 주인을 불렀다.
보육원의 맏이인 열세 살 아서였다.
[왜?]
[……형 손이 이상해.]
알렌드의 맑고 푸른 눈에 아서의 모습이 비쳤다.
쾌활하고 어른스러운 아서는 주위 풍경에 녹아 일그러졌다.
아서 뿐만이 아니었다.
알렌드를 제외한 모든 것이 형태를 잃고 소용돌이처럼 돌아갔다.
[형? 아서 형!]
알렌드는 뒤틀린 풍경 속을 뛰어다니며 아서를 찾았다.
그러는 사이 키가 조금 자랐다.
풍경은 새로운 모습을 찾고 제 속에 8살이 된 알렌드를 가뒀다.
멈춰선 알렌드의 눈앞에 잔혹한 학살의 현장이 펼쳐졌다.
평화롭던 보육원이 불타고, 영주의 용병들이 도망치는 아이들을 잡아 베었다.
해나, 디아리드, 녹스, 아서, 데일라…….
모두 알렌드의 가족들이었다.
[아, 아…….]
어린아이인 알렌드는 감당할 수 없는 공포에 몸을 굳혔다.
거대한 공황이 알렌드를 덮쳤다.
시야가 검게 물들어가기 시작했을 때, 처절한 외침이 아득해지는 그의 정신을 깨웠다.
[알렌드!!]
보육원의 원장인 애밀리아였다.
흙바닥에 쓰러져 엉망이 된 모습이었으나, 그녀의 눈만은 흔들림 없이 알렌드를 향하고 있었다.
[‘안 돼. 약속했잖아.’]
[워, 원장님…….]
알렌드의 발치에 얕게 깔렸던 검은 기운이 흩어졌다.
정신을 차린 알렌드가 애밀리아에게 달려가려 했다.
애밀리아는 신성력을 펼치며 그에게 소리쳤다.
[알렌드, 도망가!]
푸욱.
영주인 데르아치의 검이 애밀리아의 심장을 꿰뚫었다.
그녀의 마지막 신성력이 알렌드의 등을 떠밀었다.
본인의 의지와 상관없이 알렌드는 보육원을 뒤로하고 달렸다.
엉엉 목 놓아 우는 알렌드의 주위로 풍경이 다시 뒤틀렸다.
보육원 아이들의 목소리가 메아리처럼 울리며 달리는 알렌드를 비난했다.
[영주가 널 노리고 우릴 죽였어.]
[네가 신성력이 강한 아이가 아니었어도.]
[네가 강해서 우린 죽은 거야.]
[너 때문에 우린 죽었어.]
이때다 싶어 다른 목소리들도 끼어들었다.
[알렌드가 우릴 죽였어.]
[우리도 살고 싶었는데.]
[너 때문에 우린 죽었어.]
한데 모인 목소리들이 합창했다.
[너 때문에.]
[너 때문에.]
귀를 막아도 소용없었다.
목소리들은 이윽고 한 남자의 목소리만을 남겼다.
[알렌드, 날 죽일 거야?]
“……!”
알렌드는 거친 호흡을 뱉으며 잠에서 깨어났다.
창문을 확인하니 아직 어두컴컴한 밤이었다.
하지만 다시 잠을 자기는 글렀다.
그는 미련 없이 몸을 일으켜 침대를 빠져나왔다.
[오랜만에 악몽을 꿨나 보네?]
알렌드는 뒤를 돌아봤다.
어느새 침대 위로 올라온 그의 사역마가 제 앞발을 핥고 있었다.
“루. 아직 말할 수 있는 건가.”
[어제 먹은 어둠. 몸집이 컸었거든.]
루는 기지개를 켰다.
검은 땅에서 한 식사가 오랜만에 만족스러웠다.
[주로 인간들을 잡아먹던 놈이었나 봐. 흡수한 신성력이 마음에 들어.]
루는 계약자인 알렌드를 위해 밖으로 나올 땐 대부분의 힘을 안쪽에 봉인해 놓았다.
그래서 평상시에는 제 말을 인간들의 언어로 번역하는 것조차 할 수 없었다.
이번처럼 외부에서 신성력을 흡수하는 일이 생겨야 제 능력을 조금이나마 발휘했다.
교양을 모르는 놈들이야, 계약자의 몸이 망가지든 말든 힘을 마구 끌어다 쓰지만.
고위 존재인 저는 그런 저급한 놈들과 격이 달랐다.
[성녀가 요즘 새벽에 안 와.]
턱을 쓰다듬는 알렌드의 손길에 루는 그릉그릉 소리를 냈다.
“호위 기사를 붙여서 그래.”
[왜 붙이지?]
이해할 수 없다는 듯 루가 고개를 갸우뚱했다.
호위는 약한 놈들한테 필요한 게 아닌가.
[너보다 맛있는 냄새가 나는데.]
루는 혀를 할짝거렸다.
“성녀는 건들지 마.”
그 말에 루는 가볍게 침대에서 뛰어 바닥에 착지했다.
“갸옹.”
그리곤 알렌드를 향해 한 번 울고는 창문 밖으로 나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