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6화
“…….”
카펜터는 자신이 본 광경을 믿을 수 없었다.
한 줄기 구원처럼 나타난 황제가 사역마를 두 동강 내고 변절자에게 달려간 건 순식간의 일이었다.
몸을 수복하던 변절자는 황제의 공격 한 번에 영혼석을 잃고 소멸했다.
‘내가 지금 신의 사자를 보는가.’
카펜터는 제 쪽으로 돌아오는 황제를 보며 그렇게 생각했다.
죽음의 냄새가 가득한 이 땅과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아름답고 고귀한 외모.
눈부신 광채를 입은 흰 제복은, 그 어떤 갑옷보다 견고해 보였다.
카펜터에게 다가온 황제의 검이 울음소리를 내듯 진동했다.
검을 감싼 노란빛의 신성력이 얇고 예리한 형상을 띄었다.
카펜터는 그 빛에 얼마나 방대한 신성력이 압축되어 있는지조차 짐작할 수 없었다.
압도적으로 강한 힘.
그 경이로움에 카펜터는 한쪽 무릎을 꿇고 황제를 맞이했다.
“황제 폐하, 면목없습니다.”
“아닐세.”
황제는 다정하게 미소 짓고는 검을 검집에 집어넣었다.
“그보다 기사단장. 결계가 풀리기 전에 빨리 나가게.”
카펜터는 그제야 제 발을 내려다보았다.
갑옷의 보호 결계가 약해져 땅에 닿은 부분의 부식이 진행되고 있었다.
“아, 알겠습니다!”
단장이라는 자가 제 보호 결계의 상태도 모르고 있었다니.
황제 앞에서 다시금 면목이 없어졌으나 탈출하는 게 우선이었다.
카펜터는 제 발바닥마저 썩기 전에 검은 땅에서 빠져나왔다.
경계 밖에서 그를 기다리고 있던 기사들이 들뜬 기색으로 그를 맞이했다.
“녀석들……. 내가 살아 돌아온 게 그리 반갑-.”
“보셨습니까? 단장님!”
“황제 폐하께서 놈들을 물리치시는 모습……! 와. 저는 그런 전투를 제 눈으로 봤다는 사실이 믿기질 않습니다.”
황제의 활약상을 지켜본 기사들은 흥분을 감출 수 없었다.
“아, 단장님도 무사하셔서 다행입니다.”
뒤늦게 부하 하나가 형식적인 안부를 건넸다.
카펜터는 코를 쓱 매만졌다.
“이놈들…….”
“화, 화나셨습니까?”
“암만 그래도 바로 앞에서 본 나만 하겠냐?”
황제의 대단함을 찬양하는 자리에 카펜터까지 동참하자, 기사들이 신이나 떠들어댔다.
금세 대화에 열이 올랐다.
“하필이면 그중에 사역마를 부리는 놈이 있을 줄이야.”
“괜히 죽음의 사신이라는 말이 있는 게 아니라니까. 그런 꺼림칙한 힘…….”
“폐하, 오셨습니까.”
다급히 뛰어왔던 카펜터와는 달리, 황제는 차분한 걸음으로 경계 밖에 나왔다.
기사들은 언제 떠들썩했느냐는 듯 예를 갖춰 황제를 맞이했다.
“한데…….”
카펜터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그의 시선은 말고삐를 잡은 황제와, 황제가 타고 온 말에 있었다.
“여기까지 홀로 오셨습니까?”
이번 피해 지역은 황도와 인접한 곳이긴 했지만, 이렇게 황제가 혼자 산책 나오듯 올 만한 곳은 아니었다.
카펜터가 던진 질문의 답은, 흙먼지를 일으키며 급히 도착한 황실 근위부대의 기사들이 대신했다.
“폐, 폐하!”
부대장 카디얀이 하얗게 질린 얼굴로 허겁지겁 말에서 내렸다.
그런 그는 황제와 같은 옷을 입고 있었다.
하얀색 옷에 푸른 깃과 은장 단추를 단, 제국 기사단의 제복이었다.
불과 삼십여 분 전.
황제의 무리는 제국 기사단으로 위장해 검은 땅을 시찰하러 가던 중이었다.
그러다 피해 지역에 들어서자, 황제의 말이 속도를 올려 앞서 달리기 시작했다.
호위 기사들은 곧바로 황제를 뒤쫓았으나, 속도를 따라잡을 수 없었다.
점점 격차가 벌어지더니, 이제야 이곳에 도착한 것이었다.
“별일 없으셨습니까……!”
카디얀의 다급한 물음에 알렌드는 고개를 끄덕였다.
“별일 없었네.”
처음부터 이렇게 혼자 올 생각은 아니었지만.
먼저 검은 땅으로 보낸 루가 알렌드에게 신호를 보냈다.
변절자 중에서 계약자의 존재가 있다는 걸 알리는 신호였다.
다행히 늦지 않아 신성 기사들을 잃지 않았으니 별일은 없었다.
알렌드는 옆으로 고개를 돌렸다.
니세포르엘 신전이 있는 방향이었다.
‘성녀는…….’
“폐하, 오늘 나가실 때 꼭 얼굴 가리고 나가세요. 왜냐면…….”
“……하지 마.”
“보석인 줄 알고 사람들이 가져가려 할지도 모르니까.”
오늘도 이상한 소리를 하고 신전으로 향했다.
일일 강사를 한다던데 괜찮을까 싶었지만, 그보다는 헤이즐 로이컨이 걱정이었다.
수집광인 그가 성녀를 탐내던 때도 있었으나, 알렌드의 머릿속을 어지럽히는 것은 그게 아니었다.
헤이즐이 요즘 성녀와 저 사이를 두고 오지랖을 부리고 있었다.
서신으로 쓸데없는 소리는 하지 말라 경고했지만, 과연 그자가 어떻게 나올지.
가뜩이나 요즘 성녀가 이상한데, 더 이상해져 오는 건 아닐까.
“…….”
한편, 황제를 보는 기사들은 마음이 찢길 듯했다.
검은 땅을 등진 채 남은 초원을 우수에 찬 눈으로 바라보는 자신들의 황제.
‘황제 폐하…….’
‘젠달의 미래를 걱정하고 계십니까…….’
***
“이건 파는 인형이에요?”
“으, 응?”
“이렇게 달고 다니실 정도면 성녀님께서 좋아하시는 인형인가 해서요.”
다행히 노엘의 입에서 나온 건 퓨의 정체가 아니었다.
“으, 응. 황도에서 구했는데 마음에 들어서 갖고 다니고 있어. 노엘도 갖고 싶니?”
노엘의 얼굴에 화색이 돌았다.
그리곤 시선을 아래로 떨군 채 어려운 부탁을 한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네. 저도 같은 인형 갖고 싶어요.”
그렇게 말하는 노엘은 귀엽기 짝이 없었다.
역시 우스꽝스러운 인형이 애들한테 잘 먹힌다니까.
그래서 노엘한테 아이들이랑 나눠 가질 수 있게 열 개를 보내준다 했더니, 생각만큼 좋아하진 않았다.
……통 크게 백 개 정도 불렀어야 했나.
어쨌든.
짧은 환영회 뒤 곧바로 수업이 시작됐고, 수업은 며칠 전에 걱정했던 것과 달리 잘 끝났다.
수업 주제는 뭐든 상관없다는 헤이즐의 답신이 있어서 다행이었지.
그렇지 않았으면 나도 잘 모르는 세이칸에 대해 강의하다, 애들이 날 가르치는 상황이 왔을지도. 으으.
그런 불상사를 막기 위해 수업은 ‘앙뜨완 제과점 디저트 맛 평가해보기’를 주제로 진행했다.
애들도 즐거워했고, 나도 고객 후기를 직접 들을 수 있었으니 아주 유익한 시간이었지.
그리고 대망의, 내가 여기에 온 이유!
수업이 끝난 후, 나는 헤이즐의 안내를 받아 총장실로 들어왔다.
헨켈 대장도 같이 들어오려고 했지만, 헤이즐이 막았다.
“성녀님과 긴히 둘이서만 할 말이 있네.”
“성녀님을 호위하라는 폐하의 명이 있었습니다.”
“그럼 문을 열어놓으면 되지 않는가? 활짝 열어놓을 테니 경은 복도에 계시게.”
“…….”
그래서 총장실의 문을 활짝 연 채로, 헨켈 대장은 복도에 서 있게 되었다.
대장, 못 도와줘서 죄송하지만…….
제가 지금 무척 중요한 일이 있거든요……!
“제 소장품 중에서 뭘 보여 드리면 좋을까요?”
헤이즐은 헨켈 대장에게 대화 내용이 들리지 않도록 방음 결계를 친 후, 내게 다가왔다.
나는 눈을 빛내며 말했다.
“전부 다요.”
폐하가 황궁에서 나고 자란 게 아니라, 황궁에는 폐하의 어린 시절에 관한 게 하나도 없었다.
‘이번 기회를 놓칠 순 없지!’
성녀 이미지 지킨다고 호들갑 못 떠는 게 한이다.
헤이즐한테 이미지 안 지켜도 됐으면 벌써 팔뚝 잡고 방방 뛰었을 거라 이 말이야…….
나는 속으로 훅훅 심호흡하며 흥분을 누르고 있었다.
솔직히 누르고 있어도 언젠간 터질 거 같긴 한데.
‘그래도 봐야지! 어쩌겠어!’
왜인지는 모르겠지만, 헤이즐은 침착하게 앉아 있는 날 보고 재밌다는 듯 웃었다.
그리곤 총장실의 안쪽 공간에서 사과 상자만 한 나무함을 들고 왔다.
우리는 나무함을 올린 테이블을 사이에 두고 마주 보고 앉았다.
내 뒤쪽으로는 활짝 열린 총장실의 문과, 상황을 지켜보는 헨켈 대장이 있었다.
뒤통수가 조금 따가웠다.
“열까요?”
“네.”
흰색 장갑을 낀 헤이즐의 손이 살며시 상자의 뚜껑을 들어 올리기 시작했다.
‘폐하의 어린 시절……!’
슬쩍 보인 벨벳 안감에 내 심장이 요동쳤는데,
탁.
“그전에, 성녀님.”
헤이즐이 뚜껑을 닫아버렸다.
나는 반사적으로 고개를 들어 헤이즐을 바라봤다.
모르긴 몰라도, 헤이즐을 보는 내 눈에는 원망이 가득 담겨있을 터였다.
‘뭔데요……! 중간 광고? 보고 싶으면 돈 내라 이건가?’
그럼 텍마머니. 제가 요즘 돈밖에 없거든요. 내 돈 가져가시고 폐하 어린 시절 보여주세요. 현기증 나니까 빨리…….
마음 같아선 헤이즐의 양복 주머니에 수표 다발을 찔러 넣고 싶었지만.
아직까진 성녀 이미지를 지키겠다는 이성의 끈이 더 단단했다.
기특하다. 내 신체 부위들.
폐하한테 폐 끼치기 싫으면 조금만 더 참아줘…….
나는 아무것도 모르는 척, 표정을 갈무리하고 물었다.
“무슨 문제라도 있나요?”
“성녀님께선 황제 폐하에 대해서 어디까지 알고 싶으신가요?”
“당연히…….”
말해 뭣하나.
이번에도 “전부 다요.”라고 말하려 했는데, 헤이즐의 호박색 눈동자가 늑대처럼 빛났다.
헤이즐은 상자에서 손을 떼곤 테이블에 팔꿈치를 올렸다.
그리곤 헨켈 대장을 의식해서인지 깍지 낀 양손으로 자기 입술을 가렸다.
“성녀님께서 가지신 흥미가, 폐하의 흉터를 건드는 일이 될 겁니다.”
“ㄴ, 네……?”
나는 당황해 말을 더듬었다.
한껏 분위기를 잡으시길래 뭔가 했더니, 겁주는 소리였다.
흉터라는 말에 가슴이 철렁했지만.
‘그럼 처음부터 폐하 어린 시절 소장품 있다고 말하지 마시지……!’
지금 내 심정은 마치, 한정판 굿즈 실물 영접시켜준다는 친구 말만 믿고 한 시간 넘게 걸리는 친구 집까지 갔는데,
“닳을까 봐 못 보여주겠어. 그냥 가.”란 소리를 들은 심정이랄까……!
일주일 동안 한껏 부풀어 올랐던 내 기대는……!
‘너무한다……. 총장님…….’
실망으로 가득 찬 내 맘을 아는지, 모르는지.
헤이즐의 의미심장한 말은 거기서 끝나지 않았다.
“그래도 전 성녀님의 흥미가 나쁜 것은 아니라 생각합니다.”
폐하의 흉터를 건드는 일이라면서 나쁜 게 아니라니.
헤이즐의 말이 이어졌다.
“폐하께선 성녀님께 모든 걸 감추려고 하시지만, 성녀님께서도 언젠간 아시게 되겠죠. 그날이 조금 이르게 오는 것도 괜찮지 않겠습니까?”
“……감추신다고요? 어떤걸요?”
“과거죠. 세월이 지나도 아물어지지 않을 깊은 흉터를 새긴.”
헤이즐은 알 수 없는 표정으로 나를 시야에 담았다.
“전 성녀님께서 아무것도 모르는 채 계시는 걸 원치 않습니다. 무지는 독이죠. 아무것도 모른 채 상대방을 깊게 상처 입히곤 하니깐요.”
“…….”
“전 폐하의 아물지 않은 흉터 위에 새로운 상처가 새겨지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헤이즐의 말을 온전히 이해할 순 없었지만, 명확하게 이해되는 것도 있었다.
저 나무함에 들은 게, 폐하에겐 큰 상처로 남은 과거의 일이라는 걸.
폐하는 원치 않지만 언젠간 내가 마주하게 되고, 알아야 하는 일이라는 걸.
헤이즐은 다시 나무함의 뚜껑을 잡고 내게 물었다.
“열어보시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