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5화
일주일 뒤.
나는 헤이즐이 보낸 추신의 유혹을 이기지 못하고 니세포르엘 신전으로 가는 마차에 몸을 실었다.
“저, 니세포르엘 신전은 처음입니다. 레이디 프라단께서는 가본 적이 있으십니까?”
“아니요. 저도 처음이네요.”
내 맞은편에는 들뜬 표정의 허퍼슨과 시종일관 우아한 미소를 짓고 있는 시아나가 앉아 있었다.
폐하는…….
“니세포르엘 신전에 강사로? ……괜찮겠지. 그런데 내가 동행하는 건 어려울 것 같군.”
아쉽게도 일정이 맞지 않았다.
대신 황실 호위대를 이번 여정에 내어주시고, 심심할 테니 다른 일행도 데리고 가라 해주셨다.
후후…….
‘폐하 친절해……. 근데 눈물이 나네.’
또르르. 나는 속으로 흐르는 눈물을 삼켰다.
이거 그거 아니겠지? 나한테 선 긋고 그러시는 거 아니겠지……!
불안함에 다리가 잘게 떨리긴 했지만, 어쩌면 잘된 일일지도 몰랐다.
지금의 나는 폐하와 같은 공간에 있기엔 너무 위험하니까……. 흑흑.
지난 며칠.
예정에 없었던 폐하의 외면은 내게 상당히 충격적이었다.
그래서 호기롭게 진행했던 <폐하의 입에서~ 어쩌고> 작전은 전면 수정에 들어갔다.
이런저런 자잘한 수정들이 있었지만, 핵심은 ‘주접 금지’.
내가 사랑에 눈이 멀어 덕질에 가장 중요한 부분을 잊었지 뭐야.
바로, 최애가 싫어하는 짓은 하지 않는다.
사람은 초심이 중요하지. 암.
하지만 그렇게 계획을 수정하면 뭐 해.
‘몸이 안 따라주는데!’
한 번 뚫린 주접 주둥아리는 무서울 만큼 자제가 되지 않았다.
이대로라면 내가 폐하랑 잘 돼서 단명 루트를 타는 것보다
나한테 질린 폐하가 자신도 모르게 휘두른 검에 맞아 죽는 엔딩 루트를 타는 편이 빠를지도 몰랐다.
그러니까.
내 주접……. 이제 그만해…….
“도착했습니다.”
생각에 잠겨있는 사이, 마차는 어느덧 니세포르엘 신전 안에 들어와 있었다.
헨켈 대장의 에스코트를 받아 마차에서 내리자, 반가운 얼굴들이 달려와 날 에워쌌다.
“성녀님, 안녕하세요!”
“보고 싶었어요!”
“왜 지난번엔 황제 폐하랑 같이 안 오셨어요?”
“카일, 그런 말 하지 않기로 했잖아……! 성녀님은 바쁘시다고……!”
“헙. 맞다……. 저 아무 말도 안 했어요! 성녀님!”
크흡. 이 삐약거리는 모습들. 이런 게 바로 힐링인가.
얼굴 근육이 풀려 헤실헤실하는데, 뒤따라 마차에서 내린 허퍼슨이 말을 걸었다.
“성녀님, 이건 어떻게 할까요?”
허퍼슨은 빵빵하게 채운 커다란 종이봉투를 한 아름 안고 있었다.
저게 무엇이냐 하면.
오늘 아침에 앙뜨완 제과점에서 배달받은 것으로, 줄 서서 구하기도 힘든 내 디저트들이 잔뜩 담겨있단 말씀.
아이들에게 주려고 앙뜨완 제과점 사장인 올리비아에게 특별히 부탁했다.
“아, 그건-.”
“앙뜨완 제과점 디저트예요?!”
내가 채 입을 떼기도 전에 아이들이 겉봉투의 상점 로고를 보고 허퍼슨을 둘러쌌다.
그 옆에 서 있던 시아나는 덤으로 아이들한테 둘러싸였고.
“와! 푸딩도 있어!”
“리리 디저트 한정판이야!”
“이거 저희 먹어도 되는 거예요?”
“아, 저, 그게…….”
“그럼요. 성녀님께서 준비하셨답니다.”
자연스럽게 답하는 시아나와는 달리, 허퍼슨은 당황하면서도 상기된 기색이 훤히 보였다.
허퍼슨은 내가 본 사람 중에 가장 젠달인답달까.
그러니까 누군가, ‘젠달 사람들의 특징은 어떱니까?’라고 물었을 때, ‘그게 궁금하면 허퍼슨 드만을 보세요.’라고 답해도 좋다는 거지.
기본적으로 친절하고 성실하고, 신성력 강한 사람들에게 약하고.
‘내가 미모에 약한 것처럼 말이지.’
어쨌든. 허퍼슨 부럽다.
나는 썰물처럼 빠져나간 아이들의 뒷모습을 허망하게 바라보았다.
“오호. 앙뜨완 제과점이군요. 지난번 폐하께서 사 오신 뒤로 아이들이 먹고 싶다며 매일 노래를 부르고 다녔죠. 그래서 저리 좋아하는가 봅니다.”
옆으로 다가온 헤이즐이 위로하듯 말을 건넸다.
역시 사람 반가운 건 잠깐이라니까. 내가 선물에 밀리는 건 당연한 일이지.
짧지만 행복했다. 아이들의 관심…….
“저도 기분이 좋네요. 이렇게 좋아해 줄 줄은 몰랐는데.”
사실은 확신하고 노린 거였지만.
아이들의 편지에 앙뜨완 제과점 얘기가 빠지지 않길래 이거구나 싶었지. 후후.
나는 시치미를 떼고 그간 연습한 일명 ‘귀족 미소’를 지어 보였다.
“제 선물이 아이들의 취향에 맞아서 다행이에요.”
‘으. 완전 오그라들어.’
가식적인 내 모습에 온몸이 배배 꼬이는 기분이었지만, 폐하가 없는 지금.
공식적으론 내가 이 일행의 대표였다.
성녀 노릇 잘하고 가야지.
그래도 아이들이 좋아하는 모습에 뿌듯함을 느낀 것도 사실이었다.
그걸 위안 삼으며 공허함을 달래고 있었는데.
도도도 달려와 내 품에 폭 안기는 아이가 있었다.
이 몽실몽실 솜사탕 같은 연갈색 머리는…….
“노엘?”
“…….”
내 배에 얼굴을 묻은 노엘은 말이 없었다.
나는 그런 노엘의 정수리를 바라보다가, 나도 모르게 노엘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앗. 부들부들해 보여서 그만.’
싫어하려나 하고 눈치를 살폈는데, 노엘은 처음에만 움찔했을 뿐 미동도 없었다.
안 싫어하는 것 같으니 조금만 더 쓰다듬자.
촉감 뭔데. 완전 부드러워.
“노엘, 잘 지냈어?”
“네……. 보고 싶었어요. 성녀님.”
조심스레 말하는 노엘의 목소리에 물기가 어려 있었다.
‘너무 오랜만에 와서 서운했나?’
하긴, 또 온다고 한 것치고 늦게 온 감이 없잖아 있었다.
벌써 몇 달이 흘렀으니.
미안하다고 말하려 하는데, 싱그러운 녹음을 닮은 노엘의 녹안이 어느 한 곳을 응시하고 있었다.
시선의 끝에 있는 건…….
‘헉. 퓨……!’
내 허리춤에 대롱대롱 달린 퓨였다.
어둠이란 소리를 듣고 나선 퓨를 혼자 둘 수 없었다.
아무 짓도 못한다는 폐하의 말은 믿지만, 사람 일은 한 치 앞도 모른다.
무슨 사고라도 나면 어떻게 해.
그래서 인형 본체에 끈을 달고 내 옷 고리에 연결해 다녔는데…….
‘설마 노엘이 알아보는 건 아니겠지……!’
나는 속으로 진땀을 뻘뻘 흘렸다.
영특한 노엘이니, 뭔가를 알아봤을 수도-!
“노엘? 내 허리춤에 뭐가 있니?”
태연한 척 물었더니 노엘은 고개를 들어 나와 눈을 맞췄다.
오랜만에 봐도 미모가 여전……아니, 지금은 그럴 때가 아니지.
“성녀님, 이건…….”
나는 노엘의 다음 말을 천천히 기다렸다.
***(톡희_작_지_나가던_행_인)
악취로 가득한 검은 땅.
사방에 널린 사람 혹은 동물의 사체들.
이미 썩을 대로 썩어 형태를 잃고 바닥에서 질척이는 식물들.
죽음의 냄새가 만연한 이곳은, 불과 한 달 전만 해도 푸른 초원과 평화로운 마을이 있는 곳이었다.
“카펜터 단장님. 저기, 나타났습니다.”
젠달 제국 제2 기사단의 단장, 카펜터가 부하의 보고에 시선을 돌렸다.
“끔찍한 놈들.”
카펜터는 눈살을 찌푸렸다.
검은 땅에서, 그보다 더 짙은 검은색이 사람의 형상을 하고 움직이고 있었다.
세이칸 신에 대적하고, 결국 신의 분노를 산 어리석은 인간들의 최후, 변절자.
그들의 검은색은 ‘성스러운 검은색’이 아닌 죽음을 몰고 오는 ‘저주받은 검은색’이었다.
“여덟인가. 많이도 나왔군.”
검은 땅의 경계 밖에서, 변절자의 수를 센 카펜터가 중얼거렸다.
과거, 두 번째 성녀를 소환했던 바버논 왕국이 신의 저주를 받아 변절자의 땅이 돼버린 후.
오디트리아 맹약을 맺은 국가들은 많은 양의 신성석을 이용해 결계를 세웠다.
대륙 내 존재하는 모든 변절자의 땅을 둘러싼 거대한 결계였다.
하지만 세월이 흐르면서 약해진 결계 부위를 뚫고 변절자들이 나오는 경우가 종종 생기기 시작했다.
그렇게 나온 변절자들은 지금처럼 땅을 죽음으로 물들였기에, 최대한 빨리 처리해 피해영토를 줄이는 것이 중요했다.
“끄어…….”
“으어어…….”
성대를 잃은 변절자들의 목에서 괴이한 소리가 났다.
그중 하나가 새의 사체를 밟자, 사체는 순식간에 검게 녹아 땅에 스며들었다.
카펜터는 검을 뽑아 들고 뒤쪽에 선 부하들에게 일렀다.
“다들 준비해. 들어간다.”
“네.”
각자의 신성력과 신성석을 이용한 기사들의 갑옷엔 하얀빛이, 무기엔 노란빛이 피어올랐다.
하얀빛의 신성력은 죽음을 막고 노란빛의 신성력은 변절자를 벨 수 있었다.
제2 기사단의 신성 기사는 열일곱 명.
변절자 여덟 정도는 충분히 토벌하고도 남을 인원이었다.
“가자! 세이칸 신을 위해, 젠달을 위해!”
“세이칸 신을 위해! 젠달을 위해!”
구호를 외친 기사들은 일제히 검은 땅으로 발을 디딘 후 변절자들에게 달려갔다.
“어, 으어…….”
“사라져라!”
“아……아…….”
“제길. 영혼석이 보이지 않아.”
기사들의 검이 사정없이 변절자들의 몸을 베었다.
개중에는 바로 먼지처럼 소멸하는 것도 있었지만, 아닌 것들도 있었다.
사지가 잘려도 다시 붙거나 자랐다.
체내에 무작위로 위치한 조약돌만 한 영혼석을 베어야 변절자들을 소멸시킬 수 있기 때문이었다.
갑옷과 무기에 두른 신성력이 유지되는 동안 영혼석을 찾아 베는 것이 관건이었다.
기사들은 숨 돌릴 틈 없이 변절자들을 베고 또 베였다.
마침내, 마지막 변절자가 두 다리와 팔 하나를 잃은 채 땅 위를 기었다.
“끄어……, 어…….”
이제 곧 끝이다.
그 자리에 있는 기사들은 그렇게 생각했다.
변절자가 남은 팔 하나를 들어 허공에 검지로 선을 긋기 전까지.
벌어지는 허공의 틈 사이로 절망을 엿본 카펜터가 소리쳤다.
“사역마를 부리는 놈이다! 후퇴해! 당장!”
변절자들의 힘은 두 가지였다.
닿기만 해도 죽음을 부르는 힘, 그리고 사역마를 부리는 힘.
전자는 신성력으로 대응할 수 있지만, 사역마는 경우가 달랐다.
변절자들만 부릴 수 있다고 알려진 사역마는 근원조차 알 수 없는 존재였다.
그것도 무척이나 강한.
“나오고 있습니다!”
경계 밖을 향해 달려가는 중, 기사 하나가 뒤를 확인하곤 외쳤다.
허공에서 울룩불룩한 검은 물체가 틈을 비집고 나오기 시작했다.
지성이 낮은 개체로 보이지만 신성력이 떨어져 가는 지금, 검은 땅 위에서 저걸 상대하기엔 전멸의 가능성이 컸다.
“달려라!”
하지만 기사들이 검은 땅을 벗어나는 것보다 사역마가 나와 뒤쫓는 속도가 빨랐다.
죽음이 그들의 발목을 향해 손을 뻗었다.
“단장님……!”
“달려! 앞만 보고 달려라!”
최후방에서 달리던 카펜터는 몸을 반대 방향으로 틀었다.
그의 뒤로 명령을 착실히 따른 부하들이 검은 땅의 경계를 향해 달려갔다.
‘세이칸 신이시여…….’
카펜터는 자신을 덮치려는 사역마의 거대하게 부푼 몸을 보며 신을 찾았다.
검을 쥐긴 했으나 날 끝에 이기리란 확신은 없었다.
수많은 전장을 헤쳐온 그의 경험이 승리를 말하고 있진 않았으니.
‘부하들이 도망칠 시간만이라도…….’
사역마의 그림자로 캄캄해진 카펜터의 시야에 찬란한 금빛이 들어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