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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략 황제의 외모가 내 취향이라 곤란하다-54화 (54/150)

54화

한밤중, 황제의 침실.

알렌드는 침대에 누웠지만 잠을 통 이룰 수 없었다.

결국 이불 밖으로 나와 침대에 걸터앉았다.

한참을 생각에 잠겨있던 그는 제 사역마를 소환했다.

“루.”

“갸옹?”

알렌드의 목소리가 진지했다.

루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보기 드문 제 계약자의 심각한 얼굴을 올려다보았다.

근심에 찬 조각 같은 얼굴이 입을 열었다.

“성녀가 이상하다.”

사실 루에게 털어놓는다고 해결되는 건 없었다.

하지만 알렌드는 작금의 상황에 대해 사역마의 울음소리라도 듣고 싶은 심정이었다.

저만 그렇게 생각하는지, 아니면 다른 이들도 그렇게 생각하는지.

의견을 듣고 싶었지만.

성녀가 이상하다는 이야기를 누군가에게 할 수는 없지 않은가.

성녀가 이상한 건 하루 이틀 일이 아니었으나, 이번에는…….

“이번에는……. 유독 이상하군.”

알렌드의 미간에 주름이 잡혔다.

이제 그의 새벽잠을 깨우는 건 한 맺힌 영혼들의 아니라 성녀의…….

알렌드는 며칠 전의 일을 회상했다.

“폐하, 저 길 잃은 것 같아요.”

“……여기, 성녀의 방 아닌가.”

차를 마시다 뜬금없는 소리를 하길래 뭔가 했더니.

성녀는 찻잔을 제 쪽으로 들어 올리며 이상한 소리를 했다.

“당신에게 가는 길.”

오스스.

알렌드는 살기가 담기지 않는 말에도 소름이 돋을 수 있다는 걸 처음으로 알았다.

그날이 시작이었다.

“오늘은 하늘에 별이 하나도 없네요.”

“…….”

“폐하가 너무 반짝여서 별이 보이지 않나 봐요.”

“취한 거 같다고요? 맞아요. 폐하한테 도취했는데요.”

“폐하는 무슨 잘못을 했길래 인간계에 떨어진 거예요? 내 마음을 훔친 죄?”

“그만…….”

이제는 성녀가 입만 열어도 다음에 나올 말이 두려울 지경이었다.

봉인한 어둠을 돌려준 이후.

성녀의 입에서 그물이란 소리가 다시 나오는 일은 없었다.

그건 다행이었지만, 새로 꽂힌 게 이런…… 거리의 호색꾼들이 할 법한 말들을…….

‘무슨 일이 있던 거지.’

분명, 성녀는 얼마 전까지만 해도 멀쩡했다.

사람이 이렇게 급작스럽게 바뀌는 경우는, 제가 알기론 정신 조작계열의 신성력을 사용한 경우가 일반적이었다.

‘데르아치…….’

몇 달 전, 데르아치가 보낸 암살자에게 걸려있던 정신 조작.

그쪽 계열의 신성력 사용은 데르아치 대공의 특기였다.

하지만 알렌드는 누군가를 특정 지어 의심할 수 없었다.

성녀가 지금 아무런 조작도 받지 않은 제정신이라는 걸,

오늘 낮에 성녀의 머릿속을 신성력으로 확인한 제가 가장 잘 알았으니까.

“……이유를 모르겠군.”

“갸옹-.”

풀리지 않는 의문에 알렌드의 수심은 밤새도록 짙어져 갔다.

***

보니아 왕국의 제2 왕자, 루이드 애팅거는 홀로 복도를 거침없이 걸어갔다.

탄탄한 몸, 샤를과 닮은 애쉬 블론드색의 머리카락, 치켜 올라간 갈색 눈.

전체적으로 사나워 보이는 인상은 거친 야생의 향기를 풍겼다.

걸음을 멈춘 그는 눈앞의 문고리를 돌려 안으로 들어갔다.

“야.”

“오셨어요, 오라버니.”

샤를이 부드러운 미소를 머금고 루이드를 맞이했다.

좀 보자는 루이드의 말에 샤를은 자신의 궁 응접실을 장소로 택했다.

그가 올 시간에 맞춰 하녀들을 내보냈는지, 안에는 샤를뿐이었다.

“너 혼자냐?”

티 테이블 위에 홍차와 과자가 준비돼 있었지만, 루이드는 눈길도 주지 않고 소파로 가서 앉았다.

“오라버니, 차는 안 드시나요?”

“……소름 끼치니까 오라버니 소리 좀 안 하면 안 되냐? 너 인성 파탄 난 거 아무한테도 말 안 할 테니까. 제발 그거 하지 마.”

루이드는 질색하며 제 팔을 벅벅 문질렀다.

“왜 왔어?”

샤를은 곧바로 태도를 바꾸며, 제가 마실 찻잔만 들고 루이드의 맞은편에 앉았다.

오라버니라고 말하기 싫은 건 샤를도 마찬가지였다.

“요새 조용하길래. 무슨 짓을 꾸미나 해서.”

루이드는 차를 한 모금 들이키는 샤를을 바라봤다.

우아하고 기품이 넘쳐 보였지만, 제 여동생은 어릴 적부터 절 골탕 먹이는데 선수였다.

침실에 뱀을 풀어놓는다거나, 있는 수업을 없다고 해 다음 시간에 선생에게 혼나게 한다거나.

다 자란 지금에도 그런 장난이 일주일에 두어 번쯤 소소하게 들어왔다.

가령, 설사약을 탄 차를 대접한다든가 하는.

자신이 젠달에 사절단을 데리고 다녀온 뒤로 샤를은 조용했다.

그 골칫덩어리 해적, 벤 볼프만을 소탕했다더니.

“철들었냐?”

“암살이라도 당하고 싶지. 루이드.”

어이쿠.

루이드는 매서운 샤를의 눈빛에 놀란 척을 하며 양 손바닥을 펼쳐 보였다.

싸우지 말자는 소리였다.

그러려고 보자 한 건 아니니까.

“그놈도 이상하던데.”

“누구.”

“델칸.”

샤를이 눈살을 찌푸렸다.

저를 제외한 보니아 왕실 가문의 사람은 델칸을 걱정할 자격이 없었다.

루이드도 마찬가지.

그는 제1 왕자인 힐리스와 합세해 델칸의 어린 시절을 엉망으로 만든 장본인이었다.

“네가 왜 델칸을 신경 써?”

“그럼 네가 신경 쓰든가. 네 개집에서 시도 때도 없이 괴물 울음소리가 들린다고 기사들이 난리다.”

“내버려 둬.”

“놔두면? 개가 아픈데 주인은 와보지도 않지, 건의는 내 쪽으로 들어오지. 골치 아파지는 건 나라고.”

샤를의 개.

기사들 사이에서 델칸을 지칭하는 용어였다.

그만큼 어렸을 때부터 샤를의 곁에는 항상 델칸이 있었다.

지금처럼 서로를 찾지 않고 남처럼 지내는 것은 드문 일이었다.

루이드가 깍지 낀 제 손을 문지르며 물었다.

“너 정말 델칸 버렸냐?”

“뭐?”

자신을 매섭게 째려보는 샤를에 루이드는 어깨를 으쓱했다.

“왕궁에서 그런 말이 돌더라고. 주인 잃은 개면 내가 주워가려고.”

“네가 왜 델칸을 주워가?”

“실력 좋은 사냥개잖아. 못 쓸 때까지 굴려줘야 걔도 태어난 의미가 있지. 그 잡종 새끼도.”

마지막 말에 샤를은 내용물이 반쯤 남은 찻잔을 루이드에게 던질 기세로 들어 올렸다.

“워-. 진정해라. 그거 던졌다가 뒤처리하는 하녀들한테 인성 들키면 어쩌려고?”

샤를은 으득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꺼져.”

“말버릇하곤. 어쨌든 화내는 거 보니 아니네. 오냐, 네 소원대로 간다.”

“그거 확인하려고 여기까지 온 거야?”

샤를이 날이 선 말투로 물었다.

루이드는 소파에서 몸을 일으키며 답했다.

“겸사겸사. 너도 요즘 넋 놓고 있는 거 같길래.”

델칸이 숙소의 문을 걸어 잠근 시기와 맞물려, 샤를도 묘하게 조용해졌다.

업무 외 자신의 궁 밖으로 나오는 빈도도 현저히 줄어, 최근에는 왕녀에게 무슨 일이 있느냐는 우려의 소리가 슬금슬금 나오고 있었다.

얼마 지나지 않으면 후계 싸움에 참여한 귀족들의 귀에도 그 소리가 들어갈 터였다.

“하여튼 계속 그렇게 있어 주면 고맙지. 왕위는 내가 가져가게 될 테니까.”

“…….”

샤를은 문으로 걸어가는 루이드의 뒷모습을 가만히 보다 물었다.

“너 젠달에서 성녀 본 적 있어?”

걸음을 멈춰선 루이드가 고개를 돌렸다.

“있지. 그렇게 가까이선 못 봤지만.”

“어땠어? 성녀.”

“신기하다고 생각했는데. 그렇게 선명한 검은색은 처음 보니까.”

루이드의 모친은 왕의 먼 친척인 정부였다.

다른 나라면 몰라도, 보니아 왕국에서 후계를 정할 때 가장 중요한 건 피였다.

그놈의 고귀한 보니아의 피.

그리고 루이드는 아무것도 모른다.

샤를은 코웃음을 쳤다.

“루이드. 넌 평생을 노력해도 안 돼.”

***

일과가 모두 끝난 후, 나는 책상에 앉았다.

“폐하의 눈동자에 건배……. 아니, 이건 좀 약한데.”

종이에 쓴 문장 위에 깃펜으로 취소 선을 그었다.

요새 뚫린 입이라고 주접을 마구 떨고 다녔더니, 폐하한테 슬슬 주접 면역력이 생기는 것 같단 말이지.

“어디 참신한 멘트 없나. 폐하가 들으면 움찔할만한.”

처음에는 실수였다.

맞은편에서 차를 드시는 폐하가 너무 멋있어서 넋을 놓고 있었다.

그때를 틈타 입과 손이 날강도처럼 내 몸의 주도권을 빼앗아 갔다.

“……당신에게 가는 길.”

그랬더니 폐하가 너무 싫어하시는 거 있지.

평소에 본인 외모 잘난 걸 아시는 분이라, 이런 것도 비웃으며 넘어갈 줄 알았는데.

그렇게 질색하는 반응이 나올 줄이야.

후후후후.

그때부터 나는 긴급 작전을 세웠다.

이름 하여, 폐하 평생 친구 작전 1.

<폐하의 입에서 ‘우린 친구로 남는 게 좋겠어…….’란 말 듣기.>

폐하와 평생 친구 하는 방법?

간단했다.

나한테 질려버린 폐하가 내가 아무리 고백해도 받아주지 않으면.

그게 친구지 뭐야.

실행은 쉬웠다.

속으로 생각만 하던 주접을 입으로 내뱉기만 했으면 됐으니까.

잠긴 수도꼭지가 풀린 것처럼 내 주접은 물 나오듯이 줄줄 나왔다.

그랬더니 최근엔, 폐하가 날 먼저 피하시더라니까.

“어? 폐하! 어디 가시는 길이에요? 오늘도 폐하 미모에-.”

“성녀, 내가 바빠서. 다음에 보지.”

후후. 분명 계획대로 되고 있는데 이 씁쓸한 기분은 뭘까.

‘폐하가……. 폐하가 날 피해…….’

[폐하 이목구비가 내 미래보다 뚜렷]

…….

나는 글자를 끄적이던 깃펜을 멈추고 책상에 뺨을 갖다 댔다.

“흐헝. 이런 게 다 무슨 소용이야. 폐하가 날 피하는데……!”

“퓨, 퓨!”

갑자기 터진 내 설움에 퓨가 당황해 하며 위로를 한답시고 방방 뛰었다.

“위로 감사. 근데 나 괜찮아.”

하루에도 수십 번씩 감정이 널을 뛰었다.

이런 게 바로 사랑……은 무슨.

크흡. 사랑 따윈 집어치우고 덕질이나 하면서 살아가고 싶다.

나는 흑흑 거리며 책상 서랍을 열었다.

이렇게 우울할 때는 순수한 동심으로 마음을 달래주는 게 최고지.

오늘 낮에 니세포르엘 신전에서 보낸 우편이 도착했다.

한 달에 두 번 정도 오는 아이들의 편지 뭉치.

겉봉투까지 이쁘게 꾸며 바로 뜯지 못하고 하나씩 구경하고 있었는데, 그중 튀는 편지 하나가 있었다.

반질반질한 고급스러운 재질의 겉봉투, 입구를 봉한 붉은색 촛농에 찍힌 장미 인장.

“이건 누가 보낸 거지?”

향수까지 뿌렸는지 편지에선 진한 향기가 났다.

뒷면을 확인하니 정갈한 필기체로 적힌 발신자의 이름이 보였다.

헤이즐 로이컨.

“총장님?”

나는 편지를 뜯어 읽었다.

[……해서 다음에 있을 수업의 특별 강사로 성녀님을 초청하고 싶습니다.]

세이칸 신이 직접 보낸 성녀인 나를 일일 강사로 세우고 싶단 얘기였다.

강사라니.

“말도 안 되지.”

나는 세이칸 얼굴도, 목소리도 모르는데 무슨.

아이들이 나보다 훨씬 더 잘 알걸.

‘거절하는 답장을 보내야겠다.’라고 생각했다.

편지의 마지막 줄, 추신의 내용을 읽기 전까진.

[추신. 제 소장품에는 황제 폐하께서 사용하셨던 어린 시절의 물품들도 있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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