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3화
“그물요?”
저 에본 재상이 말하는 그물이 제가 아는 그 그물일 리는 없고.
그리고 설사 그 단어라고 해도 황궁에 널린 지식인을 두고 자신을 찾아와 물어본단 말인가.
허퍼슨은 이내 의문의 답을 찾았다.
“연구소장이 자네한테 물어보면 알 거라더군.”
범인은 제 사촌, 초비 빈후드였다.
초비가 단어의 뜻을 몰라 재상에게 저를 소개한 것은 아닐 터였다.
지난번 성녀님의 연애 상담.
초비도 마지막까지 한 공간에 있었다.
심지어 나중에는 “그런 놈은 씨를 말려 버려야 하는데!”라고 열을 올리지 않았던가.
……설마 재상님의 질문에 대답하기 귀찮아서란 이유는 아니겠지.
‘초비…….’
허퍼슨은 일이 떠넘겨졌다는 생각에 속으로 주먹을 불끈 쥐며 눈물을 삼켰다.
“초비 빈후드 연구소장이 왜 재상님께 절…….”
“난들 알겠나.”
에본이 눈살을 찌푸렸다.
두 시간 전, 에본은 그물의 뜻을 알아보겠다며 황제의 집무실을 나왔다.
그가 찾아간 곳은 초비의 연구소였다.
“깔깔. 야, 에본. 너 그런 것도 모르냐? 맨날 다 아는 척하더니 인생 헛살았네!”
초비는 에본을 세차게 비웃은 후, 연구하느라 바쁘다며 그를 쫓아냈다.
“허퍼슨한테 가 봐. 걔가 더 잘 알걸?”
그렇게 에본은 별 소득 없이 마음이 상한 채로 허퍼슨을 찾아온 것이었다.
재상의 기분이 좋지 못하다는 것을 눈치챈 허퍼슨은 더 묻지 않고 제가 아는 것을 말해주었다.
“……저급한 말이었군.”
“하하. 재상님께 설명해 드리기 민망한 단어긴 하죠.”
“어쨌든 고맙네. 그리고 내가 이걸 물어봤다는 이야기는 비밀로-.”
“어? 에본 재상님!”
익숙한 밝은 목소리.
얼굴을 확인하지 않아도 누군지 알았다.
예배당 건물 입구의 계단에 서서 이야기를 나누던 두 사람은 화들짝 놀라며 거리를 벌렸다.
둘이 대화하는 게 이상한 일은 아니지만, 성녀에게 들키기엔 껄끄러운 주제였다.
특히나 허퍼슨은 보니아의 기사를 떠올리며 성녀에게 ‘상대방이 그물을 친다.’라는 상담을 해준 전적까지 있었다.
“성녀님, 다녀오셨습니까.”
허퍼슨이 입가에 어색한 미소를 머금고 몸을 돌려 성녀를 맞이했다.
성녀는 양손에 바구니를 들고 예배당 건물로 걸어오는 중이었다.
그녀의 허리춤에서 은색 인형이 달랑달랑 흔들렸다.
그 뒤에선 황실 근위대의 듄이 호위 기사로 따라오고 있었다.
“다녀왔어요. 허퍼슨! 에본 재상님은 어쩐 일로 오셨대요?”
“아, 재상님께선 예배당 관리에 문제는 없는지 확인 차…….”
허퍼슨은 제가 내뱉는 변명에 대해 에본에게 동의를 구하려 고개를 슬쩍 돌렸다.
옆이 휑했다.
그새 돌아가셨나?
두리번거리던 허퍼슨은 계단 끝, 외부 기둥 옆에 서 있는 에본 하이벤을 발견했다.
‘언제 저기까지? 그보다 왜 저기에…….’
거리를 벌려도 너무 많이 벌렸다.
어리둥절한 허퍼슨과는 달리, 아리는 아무렇지 않게 에본에게 말을 걸었다.
“오, 그럼 허퍼슨이랑 얘기하러 오신 거예요?”
“그렇습니다. 어디 다녀오신 모양이군요.”
에본도 멀찍이 떨어진 거리에 비해 태연한 얼굴을 하며 대답했다.
“아, 헬리한테 다녀왔어요.”
그 말에 에본과 허퍼슨의 시선이 바구니에 닿았다.
아리가 염색약을 쓰지 않고 다니면서, 요즘 주방에 성녀가 출입한다는 소문이 퍼졌다.
그리고 성녀의 축복이 주방에 깃들었다는 소문도 함께 퍼졌다.
원래도 뛰어난 실력을 갖춘 헬리였지만, 요즘 그가 내는 요리는 가히 기함할 만한 경지에 올라 있었다.
기존의 틀을 깨는 요리 기법, 혀를 사로잡고 놓아주지 않는 맛의 향연.
그래서 요즘 황궁에서 입‧퇴궁을 하는 자들 사이에선 ‘일이 아무리 힘들어도 저녁은 먹고 퇴궁 해야지.’란 소리가 유행처럼 돌았다.
“가져오신 건 새로운 디저트인가요?”
“새로운 건 아니고, 쿠키 구웠어요. 같이 먹으면 좋을 거 같아서요!”
허퍼슨의 물음에 아리가 대답했다.
이미 그녀의 디저트 맛을 본 두 사람이었다.
허퍼슨은 저도 모르게 침을 삼켰고, 에본은 슬며시 한 발자국 앞으로 걸어갔다.
“이거는 예배당에 사람들이랑 같이 먹을 거고요, 이거는 프로딘타 궁에 가져갈 거고…….”
아리는 왼손에 든 바구니에서 쿠키를 담은 종이봉투를 뒤적이며 말했다.
그리곤 허퍼슨에게 그 바구니를 맡기고, 오른손에 있는 바구니를 들고 에본에게로 걸어갔다.
쿠키란 미끼가 매혹적이었는지, 에본은 평소처럼 뒷걸음질할 생각도 못 하고 바로 앞에서 성녀와 마주했다.
“이거…….”
바구니를 통째로 에본에게 내미는 아리의 뺨이 수줍게 물들었다.
“이건 재상님한테 드릴게요.”
“저……한테 말씀이십니까?”
흰 천 아래로 풍겨오는 쿠키 냄새가 고소했다.
에본은 순간 설렘을 느꼈는데, 쿠키 냄새 때문이겠거니 생각했다.
“그리고…….”
아리가 다시금 입을 열었다.
에본과 눈도 마주치지 못한 채, 고개를 숙인 그녀의 얼굴은 종전보다 더 붉어져 있었다.
“폐하랑 꼭 같이 드세요…….”
***
“후후. 그물에 잡힌 물고기가 꼭 나쁜 것만은 아니란 말이야?”
나는 침대에 벌렁 누워 천장을 바라봤다.
“폐하, 저 그물 관리당하는 거예요?”
“……그물?”
“저 폐하한테 잡힌 거예요? 폐하가 저 잡아놓고, 먹여주고, 놀아주고?”
“……진지하게 물어보는 건가?”
“네.”
“……잡혀주면 고맙겠다고는 생각했지.”
우리 폐하가 어부였다는 사실을 내가 지금까지 몰랐었다니.
역시 연기 천재.
최애의 사생활을 알게 된 기분에 조금은 충격적이었지만.
생각해보니 그렇게 나쁜 것만은 아니었다.
폐하한테 어장이 있으면 잡힌 물고기가 한둘이겠는가.
폐하는 바짓단 하나만으로도 사람을 꼬실 수 있는 능력자라 이거야.
지금 폐하의 그물에 걸린 물고기가 몇 마리일 지도 모른다는 거지……!
그리고 나는 널리고 널린 물고기 중의 하나고-!
“흔해 빠진 거 최고…….”
어차피 나는 내 감정 숨기기엔 글렀다.
요 며칠 내가 얼마나 고민했던가.
내가 폐하를 좋아한단 마음을 쉽사리 인정하기 힘들었던 건,
예상되는 미래들이 하나같이 어두컴컴했기 때문이었다.
예를 들자면 이런 식이었다.
1. 고백한다. → 차인다. → 폐하랑 어색해진다. → 평생이고 나발이고 황궁 밖으로 쫓겨난다.
2. 고백 안 한다. → 들킨다. → 차인다. → 쫓겨난다.
3. 고백한다. → 안 차인다. → 폐하랑 잘 된다. → 단명(?)한다.
4. …….
‘하나같이! 죄다!’
어떤 경우를 생각해봐도 이 감정의 엔딩은 방출이나 사망이었다.
지금이야, 내 사랑이 따끈따끈한 신상이라 머릿속이 꽃밭이지만.
영원한 사랑은 없다는 말이 괜히 있겠는가.
내 감정은 갑자기 찾아온 것처럼 갑자기 떠날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그래, 이건 신기루 같은 감정이야. 내가 앞으로 노려야 할 포지션은 폐하 절친3이라고……!”
최애의 절친!
가까운 곳에서 조건 없이 함께할 수 있는 그 자리!
저는 그걸 원합니다!
하지만 세상사, 마음먹은 대로 되지 않는다고 했던가.
나는 짝사랑하는 마음을 숨기면서 언젠가 생길 최애의 사랑을 응원해주는 친구3이 될 깜냥이 없었다.
친구로 남는 짝사랑의 조건이 뭔가, 바로 상대방에게 제 마음을 들키지 않는 거지!
“후후. 어림도 없지.”
사랑의 묘약 사건, 그리고 내 신체 부위들에 당한 수많은 배신 경험.
나는 안 된다. 나는 글러 먹은 인간이야. 흑흑.
그런 내게, 폐하의 그물 관리는 희소식이었다.
사람이 많으면 그만큼 관계의 무게도 줄어드는 거 아니겠는가.
그러니 만약 폐하가 나한테 연애 감정을 가진다고 해도 어장관리를 할 정도로 얕디얕은 감정일 테고!
그러면…….
“들켜도 친구로 남을 가능성이 있단 소리……!”
정말 그렇게 될 수 있을지. 미래 일은 아무도 모를 테지만.
안 되면 폐하 바짓가랑이라도 잡을 생각이었다.
친구로라도 남게 해주세요…….
허퍼슨은 밀당이 중요하다고 했지만, 나는 당당밖에 할 줄 모르는 인간이라고. 흑흑.
어쨌든, 나란 인간.
사랑이 식기 전까진 또 내 의지와 달리 폐하한테 들이댈 게 뻔하니.
이런 희망 회로라도 돌린다.
“괜찮겠지 내 미래……?”
“퓨우!”
옆에서 퓨가 응원하듯 털실 팔을 흔들었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힘내볼게.”
우선 지금 당장 목표는…….
“내 사랑이 식을 때까지 황궁에서 안 쫓겨나기……!”
***
황제의 집무실.
에본은 제가 알아 온 것을 황제에게 보고했다.
“수고했네. 재상.”
알렌드는 미소를 띠고 있었지만, 속으로는 황당하기 그지없었다.
에본은 자신의 집무실로 돌아가고 알렌드도 업무를 다시 시작했다.
하지만 서류의 내용이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그의 머릿속을 떡하니 차지한 다른 고민 때문이었다.
‘내가…….’
여태껏 성녀가 이해할 수 없는 행동을 한 적은 있어도, 이건 정말.
알렌드는 기가 차 말문이 턱 막혔다.
그래서 잡혔으니, 놀아주느니 같은 소리를 한 건가.
정말 진지하게 자신의 처지를 고민하는 눈치여서, 제 진심을 조금 털어놓은 게 문제였다.
성녀를 평생 지켜주겠단 제 다짐을 위해, 성녀를 제 곁에 잡아두고 싶었던 진심.
그 진심이 그렇게 곡해가 돼버리나.
당장 달려가 그게 아니라 말하고 싶었지만, 알렌드는 그렇게 해야 할 이유를 찾지 못했다.
‘성녀의 안전에는 문제가 없는 일이야.’
그렇지 않다면 생각이든 행동이든.
성녀가 하고 싶은 대로 하게 두자.
그게 알렌드가 성녀를 대하는 기준이었다.
그간 호위 기사를 붙이지 않은 것은, 성녀가 원하지 않았기 때문이기도 했지만.
그녀가 이 세계에서 지내는 삶이 감시당하는 삶이라 느끼지 않았으면 해서였다.
그러나 납치 사건.
알렌드는 자신의 판단을 후회했다.
성녀가 사라지고 다시 찾기까지.
그는 하루도 잠을 제대로 자본 적이 없었다.
불안함과 초조함, 어둡고 끔찍한 감정들이 그의 몸 안에서 소용돌이치듯 일어났다.
성녀를 찾고서도 불안함은 쉬이 가시지 않았다.
한 번 잃었던 성녀를 다시 잃을 순 없었다.
그래서 처음으로 성녀의 의사도 묻지 않고 기사를 붙였다.
솔직히 만족스러웠다.
이번에도 그러고 싶은 충동이 스멀스멀 고개를 내밀고 있었다.
그물이니 뭐니.
그런 쓸데없는 생각을 할 틈 없이 제 곁에만 두고 싶었다.
하지만, 그게 성녀에게 목줄을 채워 아무것도 하지 말고 저만 졸졸 쫓아다니라 하는 것과 뭐가 다른가.
그래선 안 된다.
“숨기시려면 잘 숨기셔야 할 겁니다. 원하시면 언제든 조언해 드리죠.”
헤이즐 로이컨의 목소리가 알렌드의 귓가에 맴돌았다.
“총장의 수집품들처럼 말인가요. 저는 그렇게 두고 싶진 않습니다.”
그 뒤에 제가 한 말까지.
“…….”
알렌드는 마음을 다잡았다.
이번 일도 언제나처럼 성녀가 멋대로 생각하게 내버려 두자.
평소처럼 두면, 다시 또 다른 것에 꽂혀서 그 이야기는 잊을지 모른다.
알렌드는 그렇게 생각했고, 성녀를 그냥 두기로 했다.
그리고 얼마 뒤. 알렌드는 자신의 판단이 안일했다는 걸 깨달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