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2화
“뭐?”
“제가 폐하를 좋아한다고요.”
미친 거다. 미친 게 분명했다.
덤덤히 내뱉은 내 말 뒤로, 싸한 정적이 흘렀다.
‘으아아악……! 이, 이……! 망할 주둥아리!’
아무리 내가 내 마음을 숨기려고 노력하면 뭣하나.
결국엔 내 의지와 상관없이 움직이는 내 몸이 날 배신해버리고 마는데-!
당장에라도 자리를 박차고 이 자리를 벗어나고 싶었지만.
나는 내 주둥이가 벌인 일을 수습해야 했다.
‘뭐, 뭐라고 해명하지? 장난친 거라고 할까?’
그러기엔 방금 나는 너무 진지했다.
폐하 얼굴을 똑바로 바라보는 시선 처리, 웃음기 하나 없는 목소리.
여기는 내 방이지만.
만약 주변을 지나가던 사람 1, 2가 날 목격했으면 분명 자기네들끼리 속삭였을걸!
[저 여자애 지금 고백하나 봐.]
[ㅇㅇ. 곧 차일 듯.]
라고!
으으. 진심 백 프로처럼 고백해놓고 퍽이나 잘도 먹히겠다.
‘그럼 어떻게 수습할 건데! ……차라리 폐하 얼굴을 좋아한다고 말하려고 했는데 말이 헛나왔다고 할까? 그래, 쪽팔려도 그게 낫지 않을까!’
나는 핑핑 도는 머릿속에서 해야 할 말을 결정했다.
“하하. 그러니까, 제가 하려던 말은요-!”
생각보다 괜찮은 변명거리였다.
폐하가 이걸 믿도록 한 뒤, 여기를 튀자고 생각했다.
계속 같은 공간에 있다간 내 몸이 무슨 짓을 할지 모르니까……!
하지만 돌발 행동을 한 것은 내가 아닌 폐하의 입이었다.
“나도 성녀가 좋은데.”
“…….”
후후. 사람이 기대치가 있어야 실망을 하든, 기뻐하든 할 텐데.
현실 가능성이 전혀 없는 일이라고 생각하니까 오히려 머릿속이 차분해졌다.
그러니까 내 심장, 나대지 마라.
저 말이 의미하는 건 나랑 같은 감정이 아닐 게 분명하거든.
내가 지금 확인시켜 줄 테니까, 내 신체 부위들. 멋대로 움직이지 말고 딱 기다려.
“폐하, 절 조, 좋, 좋아하신다는 게 무슨 의미예요?”
미안하다. 평정심 잃어서 목소리 떨렸다.
입가에 미소를 머금은 폐하의 눈가에 눈웃음으로 만들어진 잔주름이 생겼다.
지금 내가 뭘 보는 거지.
사랑이고 나발이고, 맞은편에서 폐하 얼굴 볼 수 있는 나, 장수해라.
그래야, 어!? 저 얼굴 오래 보고 살 거 아니야……!
“성녀는 보고 있으면 재밌지.”
봐 봐. 보고 있으면 재밌으시다잖아.
이건 역시 갖고 놀기 좋은 부하 취급이 분명했다.
그러니까 폐하는 날-!
“그래서 좋아.”
시간차 공격 무엇.
순간 정신이 아찔해졌다.
그래서 좋아……. 좋아……. 좋아…….
“저도 좋…….”
퍽.
나는 테이블 위에 내 이마를 갖다 박았다.
단단한 나무 상판과 부딪힌 머리에 얼얼한 통증이 느껴졌지만, 지금 그런 아픔을 신경 쓸 겨를은 없었다.
“…….”
‘입을……. 입을 꿰매 버려야 하나.’
이러다 습관성 고백 병이라도 걸리는 거 아니냐고…….
실현 가능성 무척 있는 예측이었다.
내가 날 잘 알아서 너무 싫다. 흑흑.
“성녀……! 괜찮나? 갑자기 이게 무슨 짓이야.”
폐하는 뜬금없는 내 자해에 놀랐는지 테이블에 박은 내 얼굴을 들어 올렸다.
덕분에 내 양 볼이 폐하의 커다란 두 손에 잡혔다.
폐하는 눈살을 찌푸린 채 내 얼굴을 살폈다.
“쯧. 얼굴이 엉망이군. 이마만 다친 게 아닌 거 같은데.”
“…….”
“콧대도 부딪혔나? 원래 이 정도로…….”
“…….”
걱정을 가장한 고도의 디스인가 싶겠지만, 폐하는 진심으로 걱정하는 눈빛이었다.
그러니까 진심으로 내 얼굴이 엉망이고 내 콧대가 낮다는…….
허허. 당연한 소리에 타격 입는 사람도 있나? 일단 전 아닙니다.
폐하 얼굴에 비하면 다들 엉망이고 그렇겠죠……!
그리고 내 신경이 쏠린 곳은 그곳이 아니었다.
몸을 일으켜 상체를 내 쪽으로 뻗은 폐하.
바로 앞에서 느껴지는 숨결, 내 뺨에 닿은 폐하 손의 감촉, 코앞에서 보는 저 미모……!!
나는 지금 불을 앞에 둔 나방이었다.
본능 때문에 불 주위를 빙빙 돌다가 결국엔 그 불 속으로 뛰어들 수밖에 없는!
나방과 내가 다른 점이 있다면, 나는 저 불이 위험하다는 걸 알고 있다는 거지.
후후. 알면 뭐 해…….
“열도 올라 후끈거리는군. 치유 신관을 불러서 제대로 된 처치를 받는 게 좋겠어.”
심장이 쿵쾅거렸다.
폐하가 말하는 소리와 내 심장 뛰는 소리가 겹쳐 들린다.
그래, 나는 확인하고 싶었다.
“폐하, 저 질문 있는데요.”
“지금? 그럼 신관부터 부르고-.”
“아뇨, 저 괜찮아요. 지금 물어보고 싶어요.”
문밖에 있는 사람을 부르려던 폐하는, 다시 내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우리 둘은 서로 시선을 마주했다.
내 시력이 좋기 때문만은 아니라, 폐하의 눈동자 속에 담긴 내가 들여다보일 정도로 우리는 가까웠다.
폐하의 손이 내 관자놀이 위에 있는데, 혹시 내 심장 빨리 뛰는 걸 들고 계시려나.
의식하고 있으니 더 부끄럽다.
“뭐길래 그래.”
“폐하, 왜 이렇게 저한테 잘해주세요?”
내 말에 폐하는 잠시 입술을 달싹였다.
해야 할 말을 고르시는 중인가.
나는 폐하의 대답을 기다리지 않고 질문했다.
“제가 성녀라서요?”
“그런 건 아닌데.”
“그럼 제가 폐하의 말 잘 듣는 부하라서요?”
“난 성녀를 부하라고 생각해 본 적이 없어.”
성녀이기 때문도 아니고, 똘마니이기 때문도 아니다.
그러면…….
나는 어제부터 머릿속에서 맴돌던,
아니라고 생각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제일 묻고 싶었던 말을 꺼냈다.
“……폐하. 저 지금 그물 관리당하는 거예요?”
***
알렌드는 어려서부터 천재 소리를 듣고 다녔다.
또래들보다도 뛰어났고, 어른들도 이따금 그를 찾아와 문제 해결을 위한 상담을 부탁하기도 했다.
신전에 들어간 후에도 그의 지식에는 막힘이 없었고, 모르는 게 생겨도 책만 보면 무엇이든 이해할 수 있었다.
하지만.
‘대체 그물이 뭐지.’
황제의 집무실.
서류가 쌓인 책상에 앉은 그는 검지로 책상을 두드렸다.
그의 경험과 서적을 뒤져봐도 그물에 관한 내용은 사전적 의미에서 크게 벗어나는 것이 없었다.
‘그 얼굴을 봐서는, 그 의미가 아닐 듯한데.’
제게 그물 관리를 하느냐고 물어보는 성녀는 알 수 없는 표정을 짓고 있었다.
평상시에도 그렇지만, 그런 얼굴을 하는 성녀의 머릿속은 늘 제 상식 밖을 뛰어넘었으니.
알렌드는 테이블에 앉아 서류를 정리하는 에본에게 물었다.
“재상, 그물이 뭔지 아나?”
에본은 황제의 질문에 다른 의도가 있는 것인가 고민하다, 제가 아는 지식을 답했다.
“짐승이나 물고기를 잡을 때 사용하는 물건이지 않습니까?”
“그것 말고 다른 의미의 그물은 모르는가?”
“제가 아는 건 이것뿐입니다만…….”
에본의 투명한 보라색 눈에 난감한 기색이 어렸다.
알렌드는 시선을 옆으로 돌렸다.
우직하게 호위를 보던 헨켈이 제게 닿은 황제의 눈동자를 마주했다.
그리고 침묵했다.
“…….”
“경도 모르는군.”
세 사람이 모를 만도 했다.
알렌드는 자의적, 타의적으로 연애와 동떨어진 삶을 살았고.
에본은 뿌리 깊이 박힌 인간 불신 때문에 호감을 느끼고 제게 다가온 사람을 특유의 냉랭함으로 모조리 쳐냈다.
의외로 헨켈이 연애 경험이 몇 있었으나, 모두 그의 무뚝뚝함을 이기지 못하고 그를 떠났다.
‘넌 날 사랑하지 않는 것 같아.’가 헨켈이 이별을 통보받을 때 듣던 말이었다.
세 사람의 연애 세포는 ‘삼가 죽은 세포의 애도를 빕니다.’라는 말을 들어도 할 말이 없을 정도였다.
그러니 아무리 젠달 최고의 엘리트들이라고 해도.
인생의 대부분과 연이 없던 분야의 은어를 알고 있을 리가 없었다.
하지만 셋 중 누구도 모르는 지식이 있다는 건, 엘리트로 살아온 그들에게 꽤 자존심이 상하는 일이었다.
결국, 세 사람은 업무도 미뤄둔 채 테이블에 둘러앉아 머리를 맞댔다.
“그물이…….”
“뭘까요…….”
“…….”
***
성녀교.
황궁 내에서 성녀를 따르는 사람들이 만든 모임의 명칭.
실제로 본 성녀의 신성함을 매일같이 찬양하던 기사들 몇이, ‘제대로 성녀님을 찬양하는 자리를 만들어보자!’가 ‘성녀교’의 탄생 배경이었다.
초창기 설립 구성원은 네 명.
거기에 함께하고 싶다는 사람이 점차 늘어, 이제는 구성원의 수가 세 자릿수에 달하는 대형 모임이 됐다.
그리고 하늘의 태양이 잠시 구름에 숨겨진 지금.
성녀교의 두 사람은 작당 모의를 하는 사람들처럼 예배당 건물 주위에서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위험했어. 다소 과장된 감은 없잖아 있었지만…….”
“그래도 그렇게 하지 않았으면 성녀님께서 보니아 기사를…….”
카디얀과 허퍼슨.
그들은 지난번, 성녀와의 연애 상담에 관해 이야기 중이었다.
카디얀이 성녀의 호위 기사로 나갔다가 목격한 보니아 기사의 고백 사건.
성녀교 내에서도 아주 극비로 다뤄져, 카디얀을 포함한 간부 넷과 허퍼슨만이 알고 있는 일이었다.
“……그러니 허퍼슨. 성녀님께서 그 기사를 따라 보니아 왕국으로 가시는 일은 없어야 하네.”
카디얀이 중대한 사안을 다루듯 심각한 어조로 말했다.
성녀교의 궁극적인 목적은 ‘성녀의 행복’이었다.
그렇기에 성녀의 사랑을 응원할 마음은 당연히 있었지만.
대상이 보니아의 기사면 위험했다.
“맞습니다. 보니아에 가면 갇히실 겁니다. 저희 성녀님께선 자유로운 분이시니, 초대 성녀님처럼 일평생을 신전 안에서만 지내게 할 순 없어요.”
“그렇지. 타국으로 가시게 해서도 안 돼.”
“그렇죠. 타국으로 가셨다가 전쟁에 참여하게 되실 수도 있습니다. 바버논 왕국의 두 번째 성녀님의 절차를 밟으시게 둘 수도 없어요.”
허공에서 시선이 마주친 두 사람은 결연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성녀님은,’
‘저희가 지킵니다.’
다짐으로 대화가 마무리됐다.
“그러면 나는 일정이 있어서 이만 가보겠네.”
“다음에 뵙겠습니다.”
카디얀이 떠난 뒤, 허퍼슨은 예배당으로 돌아가기 위해 건물의 입구가 있는 모퉁이를 돌았다.
하지만 허퍼슨은 곧장 안으로 돌아갈 수 없었다.
“허퍼슨.”
방금 건물 앞에 도착한 누군가가 그를 불러 세웠다.
하나로 묶은 날갯죽지까지 오는 은발.
한 번도 그을린 적 없는 듯한 새하얀 피부.
고운 미인형의 얼굴과 달리 냉랭하기 그지없는 투명한 보라색 눈.
재상, 에본 하이벤이었다.
허퍼슨은 곧장 인사를 한 뒤 그에게 물었다.
“재상님, 성녀님을 뵈러 오셨습니까? 성녀님께선 잠시 자리를 비우셔서…….”
“자네를 찾아왔네.”
“저를요?”
뜻밖의 말에 허퍼슨이 놀라 눈을 커다랗게 떴다.
에본은 지금 이러는 것도 시간 낭비라고 생각하는 듯, 바로 본론을 꺼냈다.
“자네, 그물이 무슨 뜻인지 아나?”
그렇게 질문하는 에본의 얼굴이 묘하게 뾰로통해 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