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1화
카디얀은 거리마저 딱 맞춘 자신의 찍기 실력에 전율할 정도로 놀란 모양이었다.
그 심정 나도 알지.
내가 찍기로 수행평가 만점 받았을 때 그런 심정이었다.
그때부터 찍신이 내 수호신인 줄.
성인이 되면 복권으로 집도 살 줄 알았다니까.
현실은 숫자 적힌 종이 쪼가리 열 장으로 변한 내 오만 원.
스테이크 썰 생각에 부풀었다가 일주일 식비를 잃고 쫄쫄 굶었다.
하지만 지금의 난 그런 요행을 바라지 않아도 될 정도의 부자지……!
설마 이 세계로 오고 내 인생 폈나……?!
아냐, 나 지금 망했잖아.
이것아, 가만히 덕질이나 하지. 왜……. 왜……!!
“성녀님.”
허퍼슨의 목소리가 내 상념을 깨웠다.
“지금 성녀님께선,”
“저요……?”
“……의 친구분께선. 밀려지고 계십니다.”
허퍼슨은 모든 상황을 꿰뚫어 보고 있는 것처럼 확언했다.
나 아직 별말 안 했는데.
역시 연애 고수의 눈에는 뭐가 보이는 건가……!
“밀려진다니요?”
“남녀 사이의 관계란, 좋다고 무작정 당기기만 해서는 안 되는 법이거든요.”
오오. 밀당.
그래, 나도 폐하를 무작정 당기기만 해서는……. 라니, 나 왜 폐하 꼬실 궁리 하고 있냐.
어이가 없네.
“그리고 제 짐작이지만. 그 빌어먹을 기사, 아니, 그 상대방은 친구분을 그물에 넣으려고 하는지도 모릅니다.”
“그물요?”
“저는 아니지만, 가끔 그런 질이 나쁜 인간들이 있죠. 한 사람만을 연인으로서 만나는 것이 아니라, 여럿을 그물에 넣고 즐기는 인간들이요.”
“……그렇게 나쁜 사람은 아닌데요.”
듣다 보니 조금 그렇다.
우리 폐하가 무슨 어장관리 하는 사람이라도 되는 거 같잖아.
물론 허퍼슨이 내 친구가 나고 상대방이 폐하란 사실을 알면서 말하는 건 아니지만…….
나는 나도 모르게 허퍼슨을 평소보다 작게 뜬 눈으로 쳐다봤다.
허퍼슨은 상황이 심각하다는 듯 깊게 심호흡하고 내게 질문했다.
“혹시 그 남자가 친구분께 뭐든 해주겠다고 그러지 않았습니까?”
“…….”
‘성녀가 원한다면 뭐든.’이 폐하 입버릇이긴 한데…….
“항상 곁에 있고 싶지만, 사정이 있으니 자주 곁에 있어 주지 못한다고 말했거나요.”
“…….”
‘24시간 호위 기사 붙이기’ 설명하면서 그러셨긴 했는데…….
“그것도 아니면, 곁에 없으면 불안하니 다른 데로 가지 말라고 했다거나.”
“다시는 말없이 사라지지 마.”
“……헉.”
나는 숨을 들이 삼켰다.
아니야. 설마. 우리 폐하가……!
놀란 내 눈과 한껏 심각해진 허퍼슨 교수님의 눈이 마주쳤다.
허퍼슨은 천천히 고개를 끄덕인 후, 결론을 내놓았다.
“나쁜 놈입니다. 성녀님. 그물이에요.”
***
허퍼슨은 그렇게 말했지만, 나는 인정할 수 없었다.
아무리 상상 속 인물이라도 그렇지.
그렇게까지 단정 지을 건 또 뭐람.
우리 폐하가 성격은 좀 그래도, 어장 관리하는 쓰레기는 아니라고……!
“으. 분해…….”
나는 끌어안은 쿠션을 팡팡 때렸다.
허퍼슨은 아무것도 모르고 상담해줬으니 아무 잘못 없지만, 그래도 분한 건 어쩔 수가 없다.
“폐하는, 폐하는……!”
“내가 뭐.”
“으, 으앗!”
나는 갑자기 들린 폐하의 목소리에 놀라 반사적으로 소리를 지르며 뒤를 돌아봤다.
흡. 심멎.
폐하는 어이없다는 표정으로 나를 보다가, 이내 그럴 줄 알았다는 듯이 내 쪽으로 걸어왔다.
“어, 어떻게 들어오셨어요?!”
“문으로.”
뒤쪽을 가리키는 폐하의 엄지를 따라 가보니, 굳게 닫힌 내 방문이 보였다.
아까까지 방에 있던 하녀들과 오늘의 호위 기사 듄은 어디로 갔는지 보이지 않고, 방엔 폐하와 나 둘뿐이었다.
“다들 물러가라 했어. 하녀들이 몇 번 말을 걸었는데 성녀가 듣지를 않더군.”
“성녀님, 황제 폐하께서 방문하셨는데요……. 성녀님, 성녀님……?”
“아……하.”
생각에 빠져있느라 내가 못 들었던 모양이었다.
폐하는 성큼성큼 다가와 내 맞은편 소파에 털썩 주저앉았다.
내 고개랑 눈동자가 그런 폐하의 움직임을 좇았다.
고급스러운 황금색 장식이 달린 카멜색의 벨벳 소파에 앉은 폐하.
다리를 꼬고 편하게 앉은 자세인데도 흘러나오는 기품을 막을 수 없었다.
하얀색 황제의 제복은 또 어떻고.
저렇게 소화하기 힘든 옷을 모델보다도 더 완벽하게 소화하는 사람은 폐하밖에 없을 걸…….
눈앞의 광경이 현실감 없어 보이는 게, 마치 가상으로 만든 3d 캐릭터를 마주하는 기분이랄까.
저런 미모가 나랑 같은 현실에 존재할 리 없지……!
팔짱을 낀 폐하의 푸른 눈이 날 바라보며 일정한 간격으로 깜빡였다.
‘뭐지, 지금 꼬시시는 건가.’
……는 무슨!
나는 당장에라도 일어나 벽에 내 머리를 박고 싶었다.
정신 차려라, 이것아. 눈꺼풀은 원래 감겼다 떠진다고!
‘덥다, 더워.’
얼굴까지 열이 올랐다.
내가 지금 더운 건, 그래. 순전히 방이 덥기 때문이다.
폐하한테 그렇게 그런 감정을 느껴서가 아니거든.
그래도 혹시 폐하가 오해하실 수 있으니,
나는 연신 얼굴에 손부채질하며 변명했다.
“하하. 덥네요. 요새 날씨가 많이 더워져서 그런가.”
“……성녀, 겨울이야.”
“그렇죠. 겨울이죠.”
윽. 얼굴이 익다 못해 뇌까지 익어버린 게 분명했다.
하필이면 변명을 해도 그런 계절감 없는 변명을 하냐.
나는 민망함에 말을 돌렸다.
“식사하러 오신 거예요?”
“아니.”
폐하는 품속에서 낯익은 털 방울을 꺼냈다.
“알!”
은색 털, 우스꽝스러운 인형 눈.
반가운 마음에 탄성이 절로 나왔다.
당연히 넘겨받겠거니 하고 손을 뻗었는데, 폐하는 알을 쥐고 쉬이 주지 않았다.
“인형 안으로 들어간 게 뭔지 궁금하다고 했지.”
“설마 알아내셨어요?”
“당연하지.”
저 자신만만한 표정 뭔데.
귀여워. 라고 말한 신아리1은 당장 내 머릿속에서 발언권 압수합니다.
신아리1 아웃, 신아리1 아웃.
“안으로 들어간 게…… 뭔데요……?”
어쨌든 폐하의 말에 나는 조금 겁을 먹었다.
내가 상자나 알이라 부르고 다닌 것의 정체.
이름을 따로 지어줄 수도 있었지만, 그러지 않았다.
정들어 버릴까 무섭기도 했고.
정체를 모르는 것에 이름을 지어준다는 찝찝함 때문이기도 했다.
제발 심령 쪽은 아니길……!
“어둠이야.”
“어둠……?”
내가 아는 어둠은 그 거멓고 그런…….
잠시 폐하가 말한 단어의 의미를 생각하다가, 어디서 들은 기억이 있는 단어라는 걸 떠올렸다.
이 세계의 세계관에 대해 이것저것 배우던 시절.
분명 에본 재상님이…….
“헉. 그 괴물.”
“피유…….”
“……은 아니지만, 위험한…….”
나는 시무룩한 소리를 내는 알의 눈치를 보며 말을 아꼈다.
신성력을 가진 사람들을 잡아먹는 괴물.
그게 ‘(구)상자, (현)알’이었다니……!
‘상상했던 것치고 하나도 안 무서운데……?’
에본 재상님한테 들었을 때는 악마 같은 건가 생각했는데.
그냥 퓨, 퓨 거리는 털 방울로밖엔 안 보인다.
하지만…….
‘내가 계속 데리고 있지는 못하겠지.’
어둠을 가까이하는 건 세이칸 신에게 대항하는 행위라던데.
‘알……. 아니, 어둠…….’
나는 울컥한 마음으로 어둠을 바라보았다.
“퓨, 퓨우…….”
내가 너 잠꼬대도 듣고, 신성력도 주고…….
우리 알한테 들어가서 움직이는 것도 보고…….
크흡. 머릿속을 스쳐 지나가는 지난 추억들에 마음이 아팠지만 어쩔 수 없었다.
‘널 곁에 두면 폐하가 곤란해지시는 걸……!’
나는 눈을 질끈 감았다.
내가 최애가 우선인 이기적인 인간이라, 매정하게 마음을 먹었지만.
그래도, 적어도.
“얘 목숨만은-!”
“데려가.”
“네?”
무릎이라도 꿇을 기세로 외쳤는데, 폐하가 어둠을 테이블 위에 올려놓았다.
“퓨, 퓨!”
어둠은 퐁퐁 뛰어 내 품에 와 안겼다.
막 정들기 시작했다가 헤어졌던 애를 다시 만난 것같이 마음이 뭉클했지만, 걱정이 먼저 일었다.
“제가 데리고 있어도 돼요? 얘, 어둠이라면서요. 다른 사람들한테 들키기라도 하면…….”
“들킬 일은 없어.”
“왜요?”
“내가 직접 봉인해 놨으니까.”
당연한 소리를 한다는 듯, 폐하는 가볍게 코웃음 치며 단언했다.
“다른 사람도 아니고 내가 봉인했는데. 그런 일이 일어나겠어?” 하는 의미였다.
혹시 오늘 컨셉이 ‘잘난 거 숨기지 않기’라면, 저는 완전 찬성입니다.
잘난 사람이 잘난척하는 거 완전 짜릿해. 멋있어.
그 후, 폐하는 어둠의 상태를 내가 알아듣기 쉽게 설명해줬다.
어둠의 힘을 사용 못 하도록 막았고, 인형에서 나올 수도 없다.
기운을 차단해 다른 사람이 알아볼 수도 없을뿐더러.
신성력을 흡수하는 것조차 불가능해 힘을 키울 수도 없을 거라고.
요컨대.
“얘는 이제 그냥 말하고 움직이는 인형이라는 거죠?”
“그래.”
나는 어둠을 바라봤다.
그간의 경험으로 짐작할 때, 얘는 말만 못 하지 사람이 하는 말을 대부분 알아듣는 듯했다.
지금 우리의 대화도 알아들었을 거란 이 말이지.
“너는 그래도 괜찮아?”
“퓨!”
어둠은 내 손 위에서 몸을 살랑살랑 움직였다.
좋다는 뜻인가? 싫었으면 튀어 오르기라도 했겠지.
“그럼 너는……. 이제부터 ‘퓨’야.”
“퓨우, 퓨!”
폐하는 너무 이름을 대충 짓는 거 아니냐고 했지만, 퓨는 만족하는 듯했다.
정체도 알았겠다, 대처도 했겠다.
마음 편히 퓨랑 이야기하던 중.
맞은편에서 차를 드시던 폐하가 픽하고 웃었다.
반사적으로 폐하한테 고개를 돌렸는데, 윽. 심쿵.
뭐가 재밌으셨는지, 피식 피식 웃고 계시는 게 아닌가……!
그래, 이번에야말로 꼬시시는 게……!
“왜, 왜 그렇게 웃으세요?”
보지 않아도 안다.
얼굴 지금 새빨개져서 난리가 났겠지.
내 떨리는 목소리를 들으며 망했다 싶었는데, 폐하가 말했다.
“성녀가 오늘 좀 이상한 거 같아서.”
“제, 제가요?”
나는 화들짝 놀라며 반문했다.
“입꼬리가.”
폐하는 엄지와 검지를 펼쳐 입술 앞에 두고 두 손가락의 끝을 삐뚜름하게 움직였다.
“자꾸 풀어졌다가 굳어졌다 하는데. 마치 풀리려는 걸 억지로 막는 사람처럼.”
으, 으으.
……으흐흑흑.
‘……울고 싶다.’
저런 잔망스러운 손짓이라니.
폐하는 지금 내 심장에 불을 한가득 지핀 지도 모르는 게 분명했다.
가슴이 꽉 막힌 듯 답답한데, 좋은 건 분명하고.
폐하랑 잘 될 일은 없으니까 괜히 미래가 암울하고.
평생을 이런 감정 속에서 살아야 하는 고민에 머리가 터지려는데-.
“무슨 일 있었나?”
“좋아해요.”
…….
내 주둥아리가 나와 아무런 상의도 없이 사고를 치고야 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