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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략 황제의 외모가 내 취향이라 곤란하다-50화 (50/150)

50화

신아리가 방문을 나간 직후.

알렌드는 책상 위의 인형을 집어 들었다.

그가 손에 신성력을 발산하자, 움찔하고 떨린 인형의 몸체에서 검은 오라가 스멀스멀 흘러나왔다.

예상했다는 듯, 알렌드의 입에서 덤덤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어둠이군.”

지난번, 성녀가 해적이 훔친 상자를 봐달라고 한 적이 있었다.

단단한 봉인이 걸려있는 나무상자.

속을 알려면 뜯어봐야 했지만, 이음새와 자물쇠가 없는 것을 보니 열어 보지 않는 편이 좋아 보였다.

“상자의 정체? 열지 못하게 만든 이유가 있겠지. 내버려 둬.”

그렇게 말한 상자를, 알렌드가 신경 쓰기 시작한 것은 니세포르엘 신전에 다녀온 뒤부터였다.

헤이즐이 말한 랑데트 후작과 데르아치의 관계.

그리고 해적이 도둑질한 배가 랑데트 후작이 운영하는 무역회사의 배라는 점.

그렇지 않아도 오늘 상자를 확인해 보려고 했는데, 이런 상태가 돼 있을 줄이야.

거기다.

봉인된 상자를 스스로 깨고 나올 정도면 힘이 있는 녀석이란 소리였다.

“성녀에게 신성력을……. 받아먹었나?”

알렌드의 눈빛이 싸늘하게 변했다.

그의 강한 기세를 느낀 어둠이 오들오들 떨었다.

어둠.

세이칸 신의 저주를 받은 변절자들과는 다른 독자적인 존재.

자연재해처럼 발생하는 그것들은 탄생부터 죽음에 이르기까지 모든 것이 수수께끼였다.

딱 하나 알려진 것은 있었다.

[어둠은 신성력을 먹고 자란다.]

처음엔 어린아이의 발에 밟혀 터질만한 작고 보잘것없는 존재.

그러다 신성력을 맛보기 시작하면, 어둠은 순식간에 힘을 키우고 인간마저 공격해 신성력을 약탈했다.

말이 약탈이지, 신성력 보유자가 체내에 있는 신성력을 모조리 빼앗기면, 몸은 급격한 변화를 받아들이지 못하고 심장을 멈췄다.

죽음이었다.

그만큼 어둠은 당장 아무렇지 않게 보여도 무척이나 위험했다.

그런 어둠이, 모두가 정체를 모르는 틈을 타 성녀의 신성력을 받아먹고 자랐나.

“우습지도 않군.”

알렌드의 눈썹이 들썩였다.

어둠을 봉인해 배에 실은 것은 분명 데르아치일 것이다.

랑데트 후작은 그쪽에 전혀 지식이 없을 테니.

아니, 젠달의 귀족들 어느 누구도 어둠과 연관되고 싶어 하는 자는 없었다.

신성 제국인 젠달에서 어둠과 연관돼 있다는 건, 가문의 멸문을 뜻했다.

제 가문을 목숨보다 아끼는 랑데트 후작이 그랬을 리가.

‘배를 후원한 건 만에 하나 발각됐을 경우 후작에게 뒤집어씌우기 위함인가. 여태껏 상자를 도둑맞았단 말이 나오지 않는 것도, 대놓고 상자를 찾을 수 없기 때문이겠지.’

알렌드는 검지로 허공에 보이지 않는 선을 그었다.

선을 따라 공간이 갈라지더니, 그 속에서 루가 모습을 드러냈다.

“루, 어둠이다. 먹을래?”

“피, 피유!”

“갸아옹!”

여유롭게 밖으로 나오던 루는 갑작스러운 알렌드의 제안에 털을 곤두세우며 펄쩍 뛰어올랐다.

그런 뒤, 책상의 끄트머리에 자리를 잡고 제 다리를 핥기 시작했다.

처음은 자신을 뭐로 보느냔 불쾌감이었고, 그 뒤의 딴청은 명백한 거절 의사였다.

어둠은 놀랐는지 부들 몸을 떨었다.

‘루에겐 부족한가 보군.’

저리 귀엽게만 보여도 알렌드의 사역마는 격이 높았다.

그만큼 입맛이 까다롭다는 소리였다.

신성력도 질 좋은 신성력을 즐겼고, 어둠은 신성력이 웬만히 차 통통히 오른 어둠이 아니면 거들떠보지도 않았다.

‘곤란한데.’

루가 잡아먹지 않는다면 영구적으로 어둠을 없앨 방법이 없었다.

고민하던 알렌드는 시선을 제 손에 있는 어둠에게로 돌렸다.

궁지에 몰린 쥐가 고양이를 물듯 어둠은 알렌드를 집어삼킬 듯 검은 오라를 펼쳤다.

하지만 알렌드의 거대한 신성력 앞에서 오라는 금세 사그라들었다.

“퓨, 퓨우…….”

기가 죽은 어둠이 애처로운 소리를 냈다.

위로 올라간 인형의 갈색 눈동자가 알렌드의 눈치를 보며 울먹이는 듯도 했다.

하지만 그 모습이 알렌드에게 동정심을 불러일으킬 수는 없었다. 신아리면 몰라도.

알렌드는 무심한 눈으로 어둠을 바라봤다.

“그 방법이 제일 낫겠군.”

***

‘큰일 났다.’

나는 예배당의 장의자에 앉아 심각한 고민에 빠져있었다.

덕질에서 가장 위험한 것이 뭔가.

‘멋있다’에서 ‘귀엽다’로 가는 그 순간.

멋있는 건 깨질 이미지라도 있지, 귀여워 보이는 건 그냥 끝났다.

그날부터 개미지옥, 현생 불가.

돌아올 수 없는 강이란 소리였다.

이제 나는 폐하가 앞니에 김을 붙이고 바보 웃음을 지어도 귀여워 보일 게 분명했다.

거기에, 더 미칠 것 같은 건 말이지.

‘이놈의 심장……!’

어디서 고장이라도 난 건지, 시도 때도 없이 쿵쾅거리고 난리다.

왜. 몇 달 전에 초비의 약 때문에 고생했던 적이 있지 않은가.

헨켈 대장한테 설레던 내 흑역사.

그때가 베타 테스트였다면 지금은 정식 런칭 버전일 거란 느낌이 조금씩 오는 게.

‘불안하기 짝이 없어.’

차라리 이 느낌이 뭔지 몰랐더라면! 그냥 ‘폐하의 잘생김이 내가 허용할 수 있는 한계치를 초과했구나’라고 생각할 텐데…!

부정하기엔 낯설지 않은 감각이라는 게 너무나 괴로웠다.

상대는, 상대는 폐하라고……!

“나는 이제 끝났어…….”

“뭐가 끝나셨어요?”

내 혼잣말에 목소리 하나가 끼어들었다.

책대에 박고 있던 이마를 옆으로 돌리자, 분홍색 단발에 앙칼진 느낌의 미인이 바퀴가 달린 나무상자에 앉아 날 보고 있었다.

“초비, 왔어요? 그냥 고민 좀 하느라……. 그런데 타고 있는 건 뭐예요?”

“이야, 성녀님 눈썰미가 좋으시네요! 이걸 바로 알아봐 주시다니. 이게 요번에 새로 발명한 청소도구거든요!”

어쩌면 저 질문을 기대하고 나한테 말을 건 게 아닐까 싶을 정도로, 초비의 입에서 곧장 반응이 튀어나왔다.

“아래에 걸레가 달려서 타고만 다니면 손으로 대걸레를 미는 수고 없이 바닥 청소를 할 수 있다고요. 이렇게요.”

눈이 초롱초롱해진 초비가 발을 굴러 상자를 앞뒤로 움직였다.

지금까지 초비가 청소를 한다고 만들었던 발명품 중에서 제일 실용성이 좋아 보인다.

하지만 지금은 거기에 오래 감탄할 정신이 없단 말이지. 흑흑.

“오오. 좋네요.”

내 영혼 없는 감탄사와 손뼉치기에도 초비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자아도취 하듯 자신의 발명품을 자랑했다가 할 말이 떨어지자 아까 내가 했던 말을 대화 소재로 삼았다.

“그런데 고민 중이시라던 말씀은 뭐였어요?”

“음…….”

나는 초비를 바라봤다.

가만 보면 초비 인기 많게 생겼는데.

세련된 미인상이니, 아카데미 시절에 따라다니는 사람 한둘은 있었을 것 같았다.

“……초비. 연애해 봤어요?”

“해봤죠.”

초비는 와락 인상을 구기며 벌레 씹은 얼굴을 했다.

“왜, 왜요?”

“거머리 같은 놈이 하나 있었거든요. 헤어지자니까 죽겠다고 검 들고 설치고 다니던. 그때 검으로 찔러버렸어야 했는데.”

으득 소리가 날 정도로 이를 가는 걸 보니까 진심이었나보다.

훅 들어온 살벌한 초비의 연애사에 나는 어색한 웃음을 흘렸다.

분을 삭인 초비가 내게 물었다.

“그럼 성녀님께서 하시는 고민이 연애 고민이에요?”

“연애까지는 아니고…….”

나는 말을 흐렸다.

답답한 마음에 나도 모르게 말이 나오긴 했는데, 생각해 보니 초비한테 이야기를 해도 해결될 일이 아니었다.

“뭐, 제 고민보다 초비 발명품 얘기가 더-.”

“연애 관련된 이야기는 적임자가 따로 있죠.”

내 말을 듣지도 않고 도중에 잘라먹은 초비는, 상자를 타고 중앙 통로를 가로질러 갔다.

어디를 가는가 했더니, 통로의 끝, 출입문 근처에서 심각한 얼굴로 대화를 나누고 있는 카디얀과 허퍼슨이 있는 곳이었다.

둘의 앞까지 간 초비는 내 쪽을 가리키며, 두 사람을 끌고 왔다.

“성녀님, 하실 말씀이 있다고요?”

“제가요?”

허퍼슨의 말에 나는 영문을 몰라 초비를 바라봤다.

씨익 웃은 초비는 허퍼슨의 등허리를 ‘탁’하고 때렸다.

“얘가 연애 경험이 엄청나거든요!”

“초, 초비! 무, 무슨 소리를……!”

“아니야? 내가 아는 사람들만 세어도 손가락이 부족한데.”

초비는 열 손가락을 펼쳐 능청스럽게 하나씩 접기 시작했다.

허퍼슨은 쩔쩔매며 그런 초비를 말렸다.

결국, 제 부정이 먹히지 않을 것을 알았는지, 허퍼슨은 자포자기하듯 고개를 끄덕였다.

“연애……. 제가 좀 하죠.”

“오오.”

이게 바로 힘을 숨긴 연애 고수의 아우라인가.

감탄하는 나와 눈이 마주친 허퍼슨이 급히 뒤를 돌았다.

‘성녀님 앞에서 이런 소리를 하게 되다니…….’라고 작게 중얼거리며 훌쩍거리는 소리가 났다.

옆에 있던 카디얀은 허퍼슨의 어깨를 토닥이며 위로했고.

진정된 허퍼슨이 다시 몸을 돌려 물었다.

“그래서 하실 말씀이라는 게…….”

“아…. 음…. 이건 제 친구 이야기인데요….”

크흡. 내가 이렇게 뻔한 서두로 연애 상담을 하게 될 줄이야.

그렇지만 나한테 갑작스러운 상황에서 빛날 창의적인 순발력은 없지.

“친구……말씀이십니까?”

나는 어색하게 되묻는 허퍼슨의 표정을 보고 깨달았다.

아, 맞다. 나 여기에 친구 없지.

델칸은 떠났고, 쇼웬은 내 부캐의 친구고…….

나도 모르는 내 친구의 존재를 뭐라고 해명해야 하나 고민하고 있었는데, 허퍼슨이 먼저 입을 열었다.

“그럼 성녀님ㄲ……의 친구분께서 가지신 고민이 뭘까요?”

허퍼슨……. 혹시 나한테 친구가 있다는 걸 믿어주는 건가?

상냥해…….

“아, 걔가 좋아해서는 안 되는 사람을 좋……. 좋, 좋……으. 아니, 확실히는 모르겠는데! 하여튼 그런 거 같대요…….”

내 말에 허퍼슨은 카디얀과 시선을 교환했다.

카디얀도 숨은 연애 고수인가 생각하던 중, 허퍼슨이 신중한 얼굴로 날 바라봤다.

전문 분야라 그런지, 평소의 허퍼슨과 눈빛부터 달랐다.

“친구분께서 그렇게 느끼시게 된 계기는요?”

“계기요?”

못생긴 인형이랑 은발 폐하가 겹쳐 보여서요…….

그 은발 폐하가 또 화관을 쓴 금발 폐하랑 겹쳐 보여서요…….

그게 귀여워 보여서 계기가 되었습니다.

라고 말할 수 있을 리 없었다.

내가 망설이자, 허퍼슨이 예시를 들어줬다.

“항상 보던 사람과 갑자기 멀리 떨어졌다거나, 혹은 빈자리가 느껴져 그 사람이 그리워졌다거나요.”

묘하게 구체적인 예시다.

“어, 떨어진 적은 있긴 한데…….”

그러고 보니 보니아에 있었을 때 폐하가 무척 그립긴 했지.

설마 오늘 새벽이 아니고 그때가 계기였나?

아냐, 그때는 그래도 나름 이성을…….

“당신.”

으악. 으악.

왜 갑자기 폐하가 부부 설정 만들면서 놀리던 때가 떠오르는 건데-!

잊어라, 잊어! 아니. 나 못 잊어…….

지난 추억을 가지고 나 자신과 싸우고 있는데, 카디얀이 다급히 끼어들어 물었다.

“어, 얼마나 많이 떨어지셨습니까? 저번에 사절단으로 왔던 보니아 왕국과 젠달 사이의 거리만큼은 아니겠죠……?”

“엇, 맞아요. 그 정도예요.”

“그, 그렇습니까.”

검집을 잡은 카디얀의 손이 부들거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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