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8화
“상자가 사라졌네요?”
아무것도 없는 협탁을 본 시아나가 의아한 기색을 띠며 물어봤다.
나는 ‘앙뜨완 제과점’이라고 적힌 종이봉투를 뒤적거리다 몸을 굳혔다.
“응……?”
“성녀님께서 신경 쓰시던 상자요. 버려도 다시 돌아온다는 저주받은 상자.”
시아나는 상자가 저주받았단 얘기가 재밌었는지 후후 웃었다.
저런 거 보면 시아나도 보통 담력은 아니야.
공포영화 보다가 화면에서 귀신이 튀어나와도 웃을 거 같다니까.
그런 모습도 어울릴 거 같다고 생각되는 거 보니, 미인은 무섭다.
“아, 그거……. 버렸어.”
“버리는 거 포기하셨다 그러지 않으셨어요?”
“음, 그랬는데……. 역시 버리는 게 낫겠다 싶더라고.”
나는 괜히 종이봉투를 열었다가 닫으며 딴청을 부렸다.
시아나가 날 변덕쟁이라고 생각하려나.
하지만 그럴 수밖에 없는 이유가 있었다고. 흑흑.
“이번에도 다시 돌아올까요?”
“아마 안 돌아오지 않을까……?”
“왜요?”
“그거야 상자는…….”
나는 종이봉투 안을 들여다보며 한숨을 푹 쉬었다.
상자는 말이지…….
“두 동강 나서 땅에 묻어버렸거든.”
***
사건의 발단은 어젯밤.
덜컹. 덜컹.
막 잠에 빠져들었던 나는 시끄러운 소리에 눈을 떴다.
또 상자가 움직이면서 요란을 부리나 했는데, 그게 아니었다.
“갸오옹.”
발코니에서 창을 긁고 있는 날개 달린 검은 고양이.
잊을 수 없는 익숙한 저 모습은 분명…….
“주인님?”
“갸옹. 갸아옹.”
나는 감격에 젖어 입을 틀어막았다.
화단을 기어다가 폐하한테 걸린 뒤로, 다시 만날 수 있다는 기대는 고이 접어두었는데.
이렇게 내 눈앞에 나타나다니.
나는 허겁지겁 발코니 창을 열어 주인님을 맞이했다.
기다렸다는 듯이 안으로 들어온 주인님은 내 다리에 몸을 비볐다.
보드라운 털과 따뜻한 온기.
나 운다, 울어……!
“그르릉.”
그리고 침대 위.
배를 까고 뒹굴며 내 손을 가지고 장난치는 모습에 내 심장이 강타당했다.
지금껏 이런 경험이 있었던가.
나한테 친절한 동물은 주인님이 처음이야…….
나는 웃음을 실실 흘리며 그 시간을 만끽했다.
내 행복이 끝난 건, 상자가 덜컥거리기 시작하고부터였다.
마치 꽁냥거리는 주인님과 나 사이를 질투라도 하듯, 상자는 협탁에서 요동치다 바닥으로 떨어졌다.
거기에 놀라 팔짝 뛰어오른 주인님이 바닥에 착지해 상자와 대치했다.
“갸아아옹-.”
덜컥. 덜컥.
퍽. 퍽.
털을 잔뜩 곤두세운 주인님은 들썩거리는 상자를 앞발로 공격했다.
상자는 유효타도 안 된다는 듯 계속해서 움직이고.
상황은 점점 격해졌다.
이러다 복도에서 야간 호위를 하는 듄에게까지 들리는 건 아닌지 마음을 졸이고 있었는데.
아니나 다를까, 듄이 방문을 노크했다.
듄한테 이 꼴을 보이면 안 돼……!
나는 고개를 빼꼼 내밀어 듄에게 변명했다.
“하하. 지금 고양이 울음소리 흉내 내고 있거든요! 고양이랑 친해지고 싶어서!”
하지만 듄이랑은 못 친해지겠지. 흑흑.
그렇게 문을 닫고 침실로 돌아와 보니, 상자는 두 동강이 나 있었다.
대신…….
“…….”
커다란 흰 동그라미에 작은 갈색 동그라미를 그려 넣은 눈이 달린 부들부들한 은색 털 방울 인형.
만지기도 아까워서 침대 머리맡에 두고 눈으로 보기만 했던 우리 알-폐하 이름을 따서 지었다-이……!
“퓨, 퓨우!”
얇은 털실 팔을 주인님에게 날리고 있었다.
비현실적인 상황에 벙쪄 있는데, 알이 내는 소리가 묘하게 익숙했다.
마치 상자 안에서 칭얼거리던 그 목소리 같이…….
“말도 안 돼.”
상자 안에 있던 게 알한테 들어가서 움직이고 있는 거라고?
아닐 거라는 생각이 먼저 들었지만.
부서진 상자는 텅 비었고 알한테선 상자에서 나던 소리가 났다.
이건, 백 프로 맞는 가정이라고 해도 무방하지.
나는 떨리는 눈으로 알을 바라봤다.
“귀여워…….”
앗, 아니지. 아니야.
나는 정신을 차리기 위해 고개를 흔들었지만, 그런 생각이 드는 건 어쩔 수 없었다.
“퓨우우!”
주먹만 한 털 방울이, 공격하겠다고 털실 매듭을 진지하게 날리고 있는 모습.
뭔데. 하찮고 귀엽다.
주인님도 그 모습에 전투 의욕이 떨어졌는지 앞발로 알을 슬쩍슬쩍 건들기만 했다.
딱히 말릴 생각은 안 들어서 침대 위에 누워 둘을 구경했다.
그러다 밀려오는 졸음에 눈을 끔뻑이고 있을 때쯤.
싸움이 슬슬 지겨워진 주인님은 알을 버리고, 내 옆으로 와서 몸을 동그랗게 말았다.
“갸옹.”
나중에는 알도 통통 뛰어와서는 내 머리맡에 자리를 잡았다.
그렇게 자고 일어나보니 주인님은 또 흔적도 없이 사라졌고.
나한테 남은 건 이 알의 탈을 쓴 정체 모를 생명체란 소리였다.
“저녁 식사를 준비해올게요.”
시아나가 나간 뒤, 나는 제과점 종이봉투 안에 숨겼던 알을 꺼냈다.
“퓨! 퓨!”
나밖에 없단 걸 알았는지, 알은 소파를 통통 뛰었다.
솔직히 상자 안에서 용이라든지 요정이라든지, 신비한 생물체가 나오지 않을까 기대했는데.
“퓨우?”
“…….”
나는 날 올려다보는 알을 검지로 툭 건드렸다.
상자였을 때와는 달리, 알은 고작 검지에 밀려 중심을 잃고 쓰러져 바둥거렸다.
이렇게 하찮은 애가 해봤자 뭘 어떻게 하겠냐마는…….
“그래도 뭔지는 알아봐야겠어. 볼프만이 훔쳐 온 거니까.”
***
“폐하!”
나는 이른 새벽부터 폐하의 서재에 들이닥쳤다.
크흡. 이 서재의 공기, 며칠만이냐.
간만의 향기를 좀 더 폐 속까지 느끼고 싶었지만, 용건부터 해결해야 했다.
나는 헨켈 대장처럼 진지한 얼굴로 책상에 앉은 폐하에게 걸어갔다.
책상 앞에 멈춰서, 알을 담은 두 손을 폐하한테 보였다.
폐하는 인형처럼 꼼짝하지 않는 알을 바라보다 한마디를 내뱉었다.
“인형?”
“네. 인형요.”
나는 비장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이 심각함. 나 지금 무슨 첩보물의 주인공이라도 된 것 같다.
하지만 폐하는 피식 웃으며 아래팔을 수직으로 세웠다.
커다란 손 아래, 손목을 감싼 셔츠의 소매가 보였다.
“자랑인가? 나도 있어.”
윽. 뭐지.
방금 엄청난 거로 심장 세게 맞은 거 같은데.
폐하의 소매에는 내가 선물한 커프스단추가 빛나고 있었다.
설마 내가 폐하한테 선물 받은 거 자랑하는 걸로 아시고 같이 자랑하신 건가……!
갑자기 들어온 공격에 허공에 뜬 내 양손이 덜덜 떨렸다.
“서, 선물 자랑하는 건 아니고요…….”
“그럼?”
“폐하, 얘 움직여요.”
남는 손이 없었기에, 나는 미동도 없는 알을 턱짓으로 가리켰다.
귀엽긴 해도 정체도 모르는 알을 데리고 있는 건 영 찝찝했다.
지난번 재상님한테 일자리 주선해달라던 때와 달리, 폐하한테 숨길 일도 아니고.
그렇다면 역시 권력의 정점에 있는 폐하에게 물어보는 게 최고지.
폐하는 알을 바라봤고, 나는 그런 폐하의 머리를 바라봤다.
흡. 두상 완전 이쁘다.
새벽에도 뽀송뽀송한 이 머릿결은 뭐야.
이 세상에 금발인 사람은 많겠지만, 폐하처럼 불순물 하나 없는 순도 100% 금 같은 머리카락은 아무도 없겠지…!
폐하 옆에 있는 창으로 햇살이라도 들어와 봐라.
햇빛 받으며 반짝반짝하는 게 미친다니까…….
“안 움직이는데.”
“눈도 미쳤…….”
“뭐?”
“아, 아무 말도 안 했는데요.”
나는 황급히 고개를 저었다.
‘으. 이놈의 입……!’
그래도 어쩔 수 없었다.
방심하고 있는데 그렇게 맑고 푸른 눈동자로 날 보시면……!
폐하 외모 진짜 미쳤어.
어쨌든, 폐하가 지켜보는 동안에도 알은 움직이지 않았다.
“얘가 인형처럼 있다가 저랑만 있으면 움직이더라고요. 상자일 때도 그러더니-.”
“상자?”
내 말을 도중에 끊은 폐하의 눈빛이 날카롭게 빛났다.
“아, 실은 지난번에 벤 볼프만이 훔쳤다는 상자요. 기억나세요?”
“기억나.”
“거기 안에 뭐가 있었거든요. 숨소리도 들리고. 막 움직이기도 하고요.”
폐하는 계속 이야기해보라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랬는데, 어제 상자가 깨졌거든요. 그다음부터 이게 움직이기 시작했어요. 제 생각엔 상자에 있던 게 인형으로 들어간 게 아닐까…….”
……내가 말했지만, 이렇게 거짓말 같을 수 없다.
누가 나한테 이런 소리 하면 정색하고 나 놀리는 거냐고 물어볼 거 같은데.
물론 폐하 빼고.
폐하 목소리라면 어떤 허무맹랑한 소리를 하셔도 온종일 들을 수 있거든…….
하지만 내 목소리는 폐하 입김도 못 따라가지.
거짓말쟁이가 되기 전에 서둘러 말을 덧붙였다.
“이게 믿기 힘드신 일이라는 건 알지만-.”
“알겠어.”
“네?”
“알겠다고.”
놀란 나와는 달리, 폐하는 한없이 차분했다.
“그러면 움직일 때까지 내가 지켜보지.”
폐하는 내 손에서 알을 가져가 이리저리 살피더니, 슬쩍 위로 던졌다.
알은 공중에서 깔끔하게 360도로 회전한 뒤, 다시 폐하의 손에 들어갔다.
“헉. 막 다루지 마세요.”
차마 볼 수 없는 광경에 나는 다급히 폐하를 말렸다.
그제까지만 해도 손때 탈까 눈으로 보기만 하고 고이 모셔뒀던 내 알인데……!
“지금 걔가 뭐가 쓰이긴 했어도, 저한텐 소중한 알이거든요……!”
“알? ……이게 알처럼 생기진 않았는데.”
“앗.”
의문스러워하는 폐하의 말투에 나는 입을 다물었다.
내가 귀엽다 그러긴 했지만, 사실 알은 딱 애들이 좋아할 만한 장난감 인형이었다.
우스꽝스럽게 생겼다 이거지…….
폐하가 준 선물이라 그런지 나는 알이 사랑스럽고 귀엽고 다 했지만.
프로딘타 궁 사람들은 알을 보고 한 번씩은 다 웃었다.
그런 인형한테 폐하 이름을 딴 이름을 지어줬노라 말할 순 없지……!
그 옛날, 내가 드렸던 꽃송이처럼 폐하의 손에서 알이 활활 불타버릴지도……!
현실이 될지도 모르는 끔찍한 상상에 대답을 미뤘다.
“또 성녀만 아는 이야기인가 보군.”
다행히 대화 주제가 다른 것으로 넘어갈 기미가 보였다.
폐하는 알을 책상 위에 올려놓은 뒤, 손가락으로 책상을 두드렸다.
“그런데 호위는 어쩌고 혼자 왔지?”
……별로 달가운 주제는 아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