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7화
델칸은 뒤도 돌아보지 않고 보니아 왕국으로 돌아갔다.
분명 고백한 건 델칸이고 안 되겠다고 한 건 나인데.
왜 내가 차인 거 같지.
잠들기 위해 침대에 누웠던 나는 문득 떠오른 생각에 결국 상반신을 일으켜 앉았다.
“검은 머리가 너무 낯설다거나……?”
옛날에 차원이동물 소설 중에 그런 거 유행했었는데.
검은 머리카락의 소녀가 다른 세계로 가서 남자들을 죄다 꼬시는……!
“후후……. 이게 현실이지.”
역시 소설은 소설이다.
현실에선 검은 머리 이방인은 낯선 존재임이 틀림없었다.
너무 낯설면 그게 또 공포심을 불러일으키는 때도 있는 법이지. 뭐.
델칸도 내가 성녀인 걸 알고는 질색하고 달아났잖아.
“차라리 잘 됐어.”
고백받은 뒤로 델칸이랑 잘 되는 망상을 잔뜩 펼쳤더니, 나는 눈만 높아질 대로 높아진 상태였다.
이 세계에서 델칸보다 잘생긴 사람은 폐하밖에 없으니.
난 앞으로 어떤 미남에게도 흔들리지 않는 한 그루의 느티나무가 될 자신이 있다는 거지……!
이제 내 인생에 연애는 가고, 남은 건 폐하 덕질 뿐이었다.
통장도 빵빵하겠다, 풍족한 덕질 라이프를 즐기다가 생을 마감하는 거야……!
델칸 안녕, 행복하게 지내렴…….
“나도 폐하 얼굴만 보고 살게……!”
덜컥. 덜컥.
내 핑크빛 미래를 다짐하는 중에, 방해꾼이 들어왔다.
고개를 돌리니 협탁에서 상자가 움직이고 있었다.
“끄으응…….”
안에서 들려오는 잠투정하는 소리.
며칠 잠잠했던 상자는 나와 단둘이 있을 때면 가끔 이렇게 들썩이곤 했다.
네가 아무리 덜컥거려도 내가 해줄 수 있는 게…….
“신성력 줘?”
있긴 했다.
들썩이는 게 심할 때는 밤새도록 칭얼거리며 덜컥거리는 바람에, 내가 잠을 못 이룰 정도라.
조용히 시키기 위해 이것저것 시도해보다가 하나가 얻어걸렸다.
나는 반지를 상자에 가져가 댔다.
반지에서 흘러나온 하얀빛의 신성력이 상자에 스며들자, 잠시 뒤 상자가 움직임을 멈추고 안에서 쌕쌕거리는 숨소리가 들렸다.
내가 주는 게 내 신성력인지 반지에 박힌 신성석의 신성력인지는 모르겠지만.
자다 깨서 잠투정하는 애 분유 먹이면서 재우는 기분이네.
내가 스무 살에 사람 육아도 아니고 상자 육아하는 기분을 느낄 줄이야.
나는 상자를 툭 건드렸다.
“……근데 이거 키워도 되나?”
***
“어머.”
샤를은 젠달에 보낸 사절단이 돌아왔다는 소리에 곧장 델칸을 찾아갔다.
왕실 호위 부대 건물에 있는 델칸의 숙소.
방문을 열자, 원형의 가면을 쓴 델칸이 침대 끄트머리에 앉아 있었다.
“돌아오자마자 그건 왜 또 쓰고 있어?”
델칸이 임무를 수행할 때 외에 이 가면을 쓸 때는 그 경우가 빤했다.
자신의 감정을 죽이고 싶을 때.
예를 들어, 델칸을 향한 학대가 정도를 넘었을 때라든가. 누군가 델칸의 어머니를 몸 파는 여자 취급하며 욕했을 때라든가.
그때마다 델칸은 방에 틀어박혀 가면을 쓰고 감정을 죽여가며 그들에게 대항하지 않으려 노력했다.
순응하는 척 조용히 살아가는 것.
그게 아비인 국왕에게 존재조차 거부당하던 어린 델칸이 익힌 생존방식이었다.
이제 웬만한 일은 잘 넘겨서 가면을 찾는 일이 드물어졌다 싶었건만.
보니아로 돌아오는 길에 델칸을 심하게 건드린 놈이 있는 모양이었다.
그게 루이드면 가만두지 않겠어.
샤를은 인상을 쓰며 델칸의 가면을 들어 올렸다.
바보 같은 델칸은 쓰고 있는 가면처럼 무표정한 얼굴을 하고 있을 게 분명했다.
흠칫.
“……가면 줘. 샤를.”
델칸의 민낯과 마주한 샤를은 몸을 살짝 떨었다.
그녀가 예상했던 델칸의 얼굴을 어디에도 없었다.
욕망으로 들끓어 열이 오른 사내의 눈빛.
샤를이 놀라 당황해하는 사이, 델칸은 가면을 낚아채 다시 제 얼굴 위에 올렸다.
“…….”
닫은 창문 덮개 사이로 흘러들어온 가느다란 햇빛이 샤를과 델칸 사이에 경계선을 그었다.
어둠 속 델칸의 호흡 소리가 거칠어져 갔다.
“너 젠달에서 무슨 일 있었지.”
샤를은 확언했다.
“성녀랑 관련된 거야?”
“…….”
델칸의 혈통에 반감이 있는 사람이 아니라면, 보통은 델칸을 차분하고 어른스러운 사람이라 여겼다.
하지만 사실 그건 어렸을 때 들어간 왕실 호위 부대에서 훈련된 인격이었다.
임무 수행 중에는 웃어서도 안 된다, 감정을 보여서도 안 된다, 말을 함부로 해서도 안 된다, 힘을 함부로 써서도 안 된다…….
수많은 ‘안 된다’가 쌓여 지금의 델칸을 만들었다.
그렇게 십 수 년 교육된 자기 통제가, 이렇게 무너질 정도면 하나밖에 없지 않겠는가.
본인의 힘으로 통제할 수 없는 본능.
그 본능을 샤를도 느끼고 있었기에, 그녀는 델칸의 심정을 곧바로 이해할 수 있었다.
델칸도 같은 거다. 지금 자신처럼.
“샤를.”
참기 힘든 신음처럼, 델칸의 음성이 가면 아래에서 터져 나왔다.
“나 성녀가 갖고 싶어.”
***
샤를은 밤공기를 맡으며 콧노래를 불렀다.
성녀를 갖고 싶다고 말한 델칸은 괴로워하며 방에 틀어박혔다.
중요한 건 델칸의 입에서 그 말이 나온 게 아니겠는가.
‘이제 델칸이 반대하는 일은 없겠지.’
델칸이 반대하지 않는다면, 샤를이 신경 쓸 사람은 없었다.
본격적으로 일을 벌여도 그녀의 행동을 미리 알고 막을 사람은 없다는 뜻이었다.
샤를이 도착한 곳은 본궁과 멀찍이 떨어진 작은 후원의 동그란 분수대 앞이었다.
분수대의 수반에서 벽돌 몇 개의 위치를 바꿔 넣자, 밤안개를 만들며 부서지듯 퍼지던 물줄기가 축 늘어져 사그라들었다.
분수대의 물이 마르고, 드러난 바닥이 덜컹거리며 갈라졌다.
지하로 내려가는 나선형의 계단이 그 안에 있었다.
‘14년 만인데도 작동하네.’
샤를은 망설임 없이 등불을 들고 계단을 내려갔다.
시간이 지나 방향 감각과 거리 감각이 무뎌질 때쯤, 넓고 평평한 바닥이 계단의 마지막 단과 이어졌다.
바닥은 깊은 지하 구멍 속에 떠 있는 부유도였다.
부유도와 맞닿은 지하 구멍의 벽.
그 벽엔 미궁 입구 같은 거대한 석문이 있었다.
석문의 양옆엔 검을 든 대형 석상 두 개가, 부유도의 바깥엔 끝이 어딜지도 모르는 까마득한 낭떠러지가 존재했다.
샤를의 손이 석문을 짚자, 문의 표면에 보니아 왕국의 고대어가 떠올랐다.
[보니아의 피를 바쳐라.]
제대로 된 피가 아니라면 검을 든 양옆의 석상이 움직여 자격이 없는 침입자를 처단하려고 할 것이 분명했다.
그날처럼.
“샤를, 왜 보니아의 피가 아니라고 하는 거야……? 왕족인 네 피를 줬는데……!”
“모, 몰라! 이 울보 델칸! 너 때문이잖아!”
“석상이 우릴 죽일 거야……!”
“시끄러워. 네 피라도 내놔 봐!”
10살의 샤를은 제게 한 것처럼 9살의 델칸의 손바닥 가죽을 단도로 그어 문에 가져갔다.
여린 손바닥의 상처를 따라 송골송골 맺힌 델칸의 피가 문에 스며들었다.
델칸은 정신을 잃었고 석상은 다시 제자리로 돌아갔으며 문은 열렸다.
그때는 영문을 알지 못했지만, 세월이 흐르고 정보가 쌓이자 샤를은 아무도 모르는 진실에 다가갈 수 있었다.
현 보니아 왕국의 왕가, 애팅거 가(家)는 방계혈족이었다.
우스운 일이었다.
왕이 홀려 하룻밤을 보낸 떠돌이 무희가 보니아 직계혈족의 후손이었다니. 누가 알았겠는가.
국왕은 그날을 제 치욕이라 여기며 아이를 방치하고 무희를 죽게 내버려 두었다.
‘방계의 피를 아무리 지켜 봤자 방계지. 그깟 피, 뭐가 고귀하다고.’
결국 보니아 직계의 피를 이은 건 왕족의 수치라 쉬쉬하는 델칸이었다.
하지만 델칸은 석문을 열었을 때의 상황을 기억하지 못했고, 국왕은 무희의 일을 묻어두길 원했으니.
그 사실을 아는 건 샤를뿐.
‘그렇다고 알려주지는 않을 거지만.’
샤를은 그 사실을 굳이 들쑤셔 델칸이 제 곁에 있는 상황을 망치고 싶지 않았다.
‘직계혈족이면 성녀를 탐하는 정도도 다르려나?’
피가 옅어질 대로 옅어졌을 본인도 이렇게 성녀가 갖고 싶은데, 델칸은 오죽할까 하는 생각이 샤를의 머릿속을 스쳤다.
‘잘하면 델칸도 계획에 넣을 수 있겠네.’
샤를은 짧게 허밍 하며 품에서 가져온 작은 유리병을 꺼냈다.
병에 담아온 델칸의 피가 문에 스며들자, 문은 주인을 맞이하듯 거부감 없이 열렸다.
찬란한 빛의 공간.
작은 로비를 연상케 하는 공간 한가운데, 오색으로 빛나는 나뭇잎을 가진 커다란 나무가 있었다.
보니아의 근원.
세이칸 신의 최초의 창조물, 칸드리얀.
애팅거 왕조가 들어서면서, 이 공간의 존재를 아는 후손은 남지 않았다.
모두가 전설로 여기는 그 나무가 보니아 왕궁의 지하에 이렇게 숨 쉬고 있다는 걸 상상이나 하는 사람이 있을까.
샤를이 칸드리얀을 향해 걸어가자, 나무는 낯선 이의 존재를 느낀 듯 잎사귀를 흔들었다.
“오랜만에 보네.”
그렇게 말한 샤를의 시선은 칸드리얀에 향해 있지 않았다.
나무 앞, 원목 탁자 위에 먼지 하나 없이 올려져 있는 두꺼운 책 한 권.
미궁을 나온 후, 샤를이 고대어 연구에 빠진 건 온전히 이 책 때문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보니아 왕국의 고대어로 기록된 역사책.
샤를의 헤이즐넛 색 눈동자에 기대감이 어렸다.
그녀는 찬찬히 책의 제목을 눈에 담았다.
[보니아 왕국, 초대 성녀의 역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