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6화
니세포르엘 신전의 총장실.
여전히 화려한 그 방에서 황제와 헤이즐은 대화를 나누는 중이었다.
“성녀님께서 같이 오셨으면 좋았을 텐데요.”
황제의 오른편 소파에 앉은 헤이즐이 차향을 음미하며 말했다.
“아이들이 많이 아쉬워하더군요. 이제는 폐하보단 성녀님을 더 기다리는 것 같습니다.”
놀리는 의도가 다분한 말이었으나, 황실 마차가 도착하고 알렌드만 내렸을 때, 실망하던 아이들의 얼굴을 생각하면 영 근거 없는 소리도 아니었다.
“황제 폐하, 어서 오세요…….”
예전 같았으면 황제가 왔다고 신나서 방방 뛰었을 아이들이었다.
알렌드가 내린 후에도 한참을 그 뒤를 기웃거리던 아이들은 마차 안에 성녀가 없다는 걸 알고는 어깨가 잔뜩 처져 그를 맞이했다.
그중에서도 눈에 띄게 실망한 노엘은 거의 울상이 되어 자신이 만든 화관을 알렌드에게 건넸다.
성녀에게 줄 것이 분명했을 새하얀 화관을, 알렌드가 어색하게 머리에 받아썼다.
“고맙구나.”
“네…….”
황제의 눈부신 외모 덕에 화관은 맞춘 듯 어울렸다.
“성녀께선 요새 바쁘셔서 말입니다.”
화관을 삐딱하게 쓴 알렌드는 헤이즐에게 그렇게 말하며 검지로 소파 팔걸이를 두드렸다.
그의 벽안이 제 셔츠 소매에서 은은한 빛을 띠는 푸른 커프스단추를 응시했다.
“각자 연애 상담 정도야!”
그런 말을 잘도 제 앞에서 해댄다.
평생 제 곁을 떠날 생각이 없다고 말하면서도.
보니아에 다녀온 후로 이따금 참을 수 없는 답답함이 치밀어 올랐다.
데이데른 호에서 그랬고, 지난번 그 황도의 거리에서도 그랬다.
그리고 이번에도.
그게 무슨 감정인지 아직 그는 몰랐다.
“전 평생 폐하 미모와 함께하고 싶거든요!”
제 얼굴이 좋다며 아무것도 모르는 얼굴로 헤실거리는 성녀.
또다시 치밀어오는 답답함에 알렌드는 팔걸이를 붙들었다.
그 모습을 본 헤이즐이 의미심장하게 웃었다.
“폐하께선 연애는 안 하십니까?”
“생각 없습니다.”
그렇게 말하는 황제는 어느 때보다 싸늘한 얼굴이었다.
마치 자신에게 연애란 전혀 일어날 수 없는 일이라는 것처럼.
늙은이의 참견이라고 해도 좋을 것이, 저렇게 빤히 보이는 데도 가만히 있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
8살에 니세포르엘에 들어온 황제는 10년을 신전에서, 그리고 6년을 황제로 보냈다.
제가 알기론 6년 동안 황제에게 연인은 없었다. 신전에는 말할 것도 없었고.
저 젊음과 저 외모로 여태껏 사랑 한 번 못 해봤다는 건 헤이즐의 입장에선 심히 한탄할 일이긴 했다.
“제 사냥개가 되지 않겠습니까?”
황제는 그날 자신에게 그렇게 말했다.
평화주의자가 아닌 조용히 숨어 사냥감의 목덜미를 물어뜯을 때를 노리는 맹수였다.
그런 남자의 사랑은 얼마나 불타오를까.
그것을 옆에서 보는 것도 꽤 자극적인 일이 되지 않을까.
구미가 당겼다. 헤이즐은 속으로 입맛을 다셨다.
“과거의 망령들이 아직도 새벽에 찾아와 폐하를 괴롭힙니까?”
“……총장이 참견할 일은 아닙니다.”
“여전히 악몽에 시달리시는 모양이군요. 그 때문에 연인을 만들기 꺼리시는 건 아니신지.”
헤이즐은 마시기 좋게 식은 차를 한 모금 들이켰다.
그는 찻잔 속 일렁이는 제 얼굴을 보며 말을 이었다.
“과거는 과거일 뿐이죠. 그게 폐하의 미래 전부를 집어삼켜서야 하겠습니까.”
황제나 저나.
과거에 사로잡힌 불쌍한 것들임엔 분명했다.
그래도 저는 현재에 나름 충실했다.
좋아하는 수집도 마음껏 하고 있지 않은가.
황제처럼 과거의 한을 풀겠다고 현재의 저를 몽땅 갖다 바치지는 않는다는 말이었다.
하지만 알렌드가 보기엔 헤이즐도 만만치 않았다.
“과거의 죄책감 때문에 스스로를 이곳에 가둔 자에게 듣고 싶은 말은 아니군요.”
24년. 헤이즐이 니세포르엘 신전 총장직을 위임하고 흘러간 세월이었다.
전쟁 영웅이었던 그가, 본인의 고향은 지키지 못했다는 죄책감에 택한 유배지.
그게 니세포르엘 신전이라는 것을 당시에 알 만한 사람들은 다 알았다.
그렇지 않다면 제가 죽을 곳은 전쟁터라고 말하고 다니던 헤이즐 로이컨이, 총장직을 맡을 리가.
신전 결계에 일정한 신성력을 공급하는 일 때문에 총장은 이틀 이상 신전을 벗어날 수 없었다.
그마저도 혹시 모르는 적의 침입에 결계가 흔들릴 것을 생각한다면 그의 외출은 고작 반나절.
그것도 일 년에 서너 번이 전부였다.
“그래도 밖에 심어둔 눈과 귀 덕분에 심심하지는 않습니다. 재밌는 이야기도 가끔 들려오지요. 가령, 황궁에 성녀님의 얼굴을 닮은 갈색 머리 하녀가 있다던가.”
서로의 역린을 건드린 두 사람 사이에 작은 신경전이 일었다.
하지만 서로에게 열을 내봤자 소용이 없다는 걸 알기에, 신경전은 짧게 끝났다.
헤이즐이 먼저 입을 열었다.
“숨기시려면 잘 숨기셔야 할 겁니다. 원하시면 언제든 조언해드리죠.”
“총장의 수집품들처럼 말인가요. 저는 그렇게 두고 싶진 않습니다.”
원하는 대로 살아갈 수 있도록 해주겠노라 하지 않았던가.
굳은 다짐이었다.
그러나 그것과 별개로 알렌드의 마음 한편에선 그가 인지하지 못한 초조함과 불안감이 얕게 일어나고 있었다.
“그러면 잘 지키셔야겠군요.”
“그럴 겁니다.”
“어려운 길을 가시는 것 같아 말리고 싶지만, 당신은 이제 신전의 아이가 아니니깐요.”
목적어 없는 대화가 끝난 뒤, 헤이즐은 본론을 꺼냈다.
“감시를 원하신 대상이 움직였습니다.”
황제의 사냥개가 되기로 완전히 결정한 것은 아니지만, 헤이즐은 그의 부탁을 들어주었다.
맹수가 목덜미를 노리는 사냥감이 어찌나 크던지.
그 사냥터에 자신도 발을 들이밀지 않고는 못 배길 듯했다.
“움직였다?”
알렌드의 되물음에 헤이즐은 빙긋 웃었다.
주름진 그의 눈가와 달리, 호박색 눈동자에는 젊은 날의 생기가 되살아나고 있었다.
“데르아치 대공와 랑데트 후작이 꽤 친해진 모양이더군요.”
***
날씨 좋은 오후의 연못가.
나는 지금 제 복을 발로 뻥뻥 차버리는 중이었다.
“델칸. 내가 너 친구로 좋아하는 거 알지?”
마음이 찢어진다.
내가 그렇게 마음먹긴 했어도, 저 얼굴을 보니 너무 아깝다 이 말이지.
이런 미남 남친.
어디 가서 만날 건데……!
못 본 사이에 델칸은 또 겉가죽이 많이 상해있었다.
아씨. 저런데도 잘생겼네.
나는 벤치에 앉아 반짝이는 연못을 응시하는 델칸의 그림자를 발로 쓱 긁었다.
고백 거절하는 마당에 아쉽다고 애를 주물럭거릴 수는 없으니, 그림자에라도 치대는 중이었다.
“…….”
델칸의 마음이 무거운 탓인지, 내가 아쉬운 탓인지.
우리 사이에 어색하고 묵직한 분위기가 맴돌았다.
나는 이 껄끄러운 침묵을 깨기 위해 주절주절 말을 내뱉었다.
“고백 받고 많이 생각해 봤는데, 내가 너도 좋아하고 네 얼굴도 좋아하긴 하거든……? 그런데 연애 감정이 없어……. 여기서 내가 사귀자고 하면, 누구만 좋겠니?”
당연히 나만 좋지.
내가 미남 남친 하나 가져보겠다고 델칸한테 장거리에, 상대방이 같은 감정을 가지지 않은 괴로운 연애를 하게 할 수는 없는 일이었다.
“그건 희생만 강요하는 꼴이라고. 난 널 이용하고 싶지 않아.”
“……나는 그래도 좋아.”
나지막이 중얼거린 델칸은 고개를 돌려 나를 바라봤다.
“그런 연애라도, 나는 좋아.”
세상에.
얘가 지금 사랑에 눈이 멀어서 제정신을 못 차리는 모양이었다.
고백 상대가 나만 아니었으면, 나는 델칸의 등짝을 찰싹찰싹 때려줬을 거다.
정신 차려, 이 친구 놈아……!
그래, 나라도 정신을 차려야 했다.
이 연애의 끝은 상처뿐일 게 분명하니까……!
“델칸, 너 사람 얼굴 구분 못 한다는 소리 많이 듣지.”
“……어떻게 알았어?”
“어떻게 알긴…….”
지난번에 둘이 스쳐 지나가는 걸 우연히 목격하고는 얼마나 식겁했는지.
하지만 델칸은 아무것도 모르는 얼굴로 걸어갔다.
그 후로도 몇 번.
폐하와 델칸은 마주쳤지만, 내가 전전긍긍했던 게 무색해질 정도로 델칸은 폐하를 못 알아봤다.
“으…….”
나는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오랫동안 상대방을 속여왔던 비밀을 털어놓으려면 단박에 내뱉어야 했다.
그렇지 않으면 영영 못 털어놓으니까.
들숨에 각오 날숨에 고백이다.
“그동안 말 못 해서 미안. 나 사실 성녀야.”
폐하한테는 이미 허락을 받은 뒤였다.
말을 뱉어놓고 얌전히 델칸의 반응을 기다리는데, 델칸이 짧은 웃음을 터트렸다.
“리리가 성녀라고?”
“응…….”
“그럴 리가 없잖아.”
내가 농담을 한다고 생각한 모양이었다.
씁쓸한 미소가 델칸의 입가에 걸렸다.
“그런 말도 안 되는 거짓말을 할 정도로 나는 아닌 거야?”
델칸, 내가 아무리 신분 감춘 구라쟁이라곤 해도, 네 고백 거절하려고 거짓말하는 사람은 아니란다……. 흑흑.
“거짓말 아니야.”
옆에 앉은 내 모습을 찬찬히 살피던 델칸의 회색 눈동자가 조금씩 흔들리기 시작했다.
“하지만 검은색이…….”
“이거 염색…….”
“그때 분명 전남편이…….”
“그거 신분 위장…….”
…….
델칸은 믿을 수 없다는 듯 떨리는 목소리로 질문하고, 나는 점점 고개를 숙이며 의문점을 하나씩 설명해주기 시작했다.
그러다 어느 순간 정말 내가 성녀라는 것을 납득한 모양인지, 델칸의 질문이 그쳤다.
“그러니까 우리는 안 된다고…….”
나는 힐끔 델칸의 눈치를 봤다.
그 사이 세상이 무너진 사람처럼 사색이 된 델칸이 중얼거렸다.
“어째서 네가 성녀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