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4화
문제의 발단은 녹스담 해역에서 볼프만과 해적들을 잡았을 때였다.
“이건 훔친 거니까 돌려줘야죠.”
볼프만이 무역선에서 가져온 나무 상자를 갑판에 꽂은 볼프만의 검 옆에 두고 왔는데-.
“이게 왜 여기에 있지?”
젠달로 향하는 데이데른 호의 객실 선반에 그 상자가 있었다.
아무런 무늬도 없는 짙은 고동색.
외관이 비슷한 다른 상자가 아닐까 싶었지만, 열쇠 구멍도 없이 봉인이라도 된 듯 열리지 않는 상자가 흔할 리 없었다.
해적들을 묶을 때 누가 갑판 위에서 가져왔나?
처음에는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
어떻게 상자를 돌려줄지가 고민이었지.
“그 무역 회사에 우편으로 상자를 보내면 되잖아? 물건 가지고 사업하는 곳이니까 무명으로도 보내도 다 받아서 확인해보겠지.”
“오오.”
쇼웬의 조언은 꽤 일리가 있었다.
그래서 젠달에 도착하자마자 상자를 카디얀에게 부탁했는데, 황도 우체국에 있어야 했을 그게 내 바구니에 있었다는 거지.
폐하의 얼굴을 가리려 숄을 꺼냈을 때, 바구니에서 떨어져 바닥을 구르던 그거 말이다.
그 후로도 몇 번 우편으로 보내길 시도했지만, 상자는 번번이 돌아왔다.
그뿐이랴.
땅속 깊숙이 묻었을 때도, 바위를 칭칭 묶어 연못에 빠트렸을 때도, 지하 감옥에 집어넣고 문을 잠그고 나온 이번에도……!
살아있는 거라 해도 이렇게는 못 하겠다.
어떻게 매번 돌아올 수가 있는 거지?
내가 허구한 날 황궁 지박령 되고 싶단 소리를 하고 다니긴 했어도, 이런 오컬트 쪽은 쥐약이었다.
“으. 볼프만은 도대체 뭘 훔쳐 온 거야.”
차라리 무역 회사로 편지를 보내볼까.
혹시 님들 배에서 저주받은 상자가 없어지진 않았나요.
그 상자가 절 스토킹하고 있는데 정상인가요……!
“…….”
나는 상자를 노려보다 한숨을 쉬었다.
얘를 일단 치워야 오늘 잠을 자든 뭘 하든 하지.
“으…….”
나는 담요 두 장을 가져와 손끝부터 팔꿈치까지 둘둘 말았다.
원래 두께보다 두 배 정도는 커진 양팔을 뻗고 몸을 최대한 뒤로 빼며 상자를 집으려 했다.
잔뜩 겁먹어서 인상을 쓰고 있는 게, 모르는 사람이 봤으면 세상 쫄보도 이런 쫄보가 없었다.
그런데 말이지.
저주받은 상자 맨손으로 만질 수 있는 사람 있으면 나와 보라고 해……!
상자는 담요를 두른 내 양손 사이에 들어왔고, 나는 조심스럽게 상자를 들어 올렸다.
혹시 막 옮기다가 이 불길한 상자한테 부정이라도 타면 큰일이다……!
“…….”
흡. 나는 숨을 참고 한 걸음, 한 걸음을 내디뎠다.
상자는 여느 무생물처럼 잠잠했다.
이렇게 가만히 있는데 어떻게 다시 돌아오는 거랑.
설마 도깨비 같은 건가. 사람 안 볼 때만 움직이는.
도깨비 하니까 생각난다.
어렸을 때 동네 할머니들이 도깨비 터에 살면 부자 된다던 이야기를 종종 했는데.
……잠시만.
나는 불현듯 떠오른 생각에 걸음을 멈추고 상자를 의심쩍은 눈으로 바라봤다.
앞서 말했다시피, 나는 요즘 너무 잘나간다 이거지.
“볼프만이 그렇게 가지고 싶어 했던 게 저주받은 상자일 리는 없고.”
내가 해적선 선장이라 해도, 고작 스토킹 상자를 얻자고 무역선을 털었을 거 같지는 않다.
“설마 행운을 가져다주는 상자인가?”
왜, 게임에서도 가끔 행운 스탯만 왕창 올려주는 장비 같은 거 있잖아.
세이칸 신이 보물찾기 기분으로 그런 거 하나쯤은 만들어뒀을 수도 있지.
“……라고 생각해 봤자, 근거가 하나도 없잖아.”
이럴 줄 알았으면 무역선으로 갈 때 볼프만한테 훔치려는 게 뭐냐고 물어볼걸.
탈출하려는데 정신이 팔려서 그럴 생각도 못 했다.
황궁의 사람들에게 물어보기도 했으나, 다들 상자에 관해 아는 게 없었다.
폐하도 모르셨고.
“니세포르엘 신전의 총장인 헤이즐 로이컨, 그자라면 알지도 모르겠습니다만…….”
에본 재상님이 그렇게 말했으니, 다음에 니세포르엘 신전에 갈 때 얘도 들고 가봐야 하나.
“너 정체가 뭐야?”
내 손안에 있는 상자를 향해 중얼거린 그때였다.
덜컥.
“으아앗!”
내 말을 알아듣기라도 한 것처럼, 상자가 갑자기 튀어 올랐다.
나는 기겁하며 그대로 뒤로 넘어졌다.
내 비명에 호위를 위해 복도에 있던 카디얀이 방문을 두드렸다.
“성녀님? 괜찮으십니까?! 무슨 일이십니까!?”
“네, 네……! 괜찮아요! 그냥 넘어질 뻔해서요!”
나는 괜찮다는 말을 전하고는, 엉덩방아를 찧은 자세 그대로 앉아 바닥에 던져진 상자에 시선을 고정했다.
덜컥. 덜컥.
상자는 모서리를 바닥에 부딪혀가며 멈추기 직전의 주사위처럼 움직이고 있었다.
“상자가…… 살아있어?”
저주받은 상자니, 도깨비니. 이런저런 소리를 하긴 했어도 막상 눈앞에서 저러는 걸 보니 무섭단 말이지……!
말했지만, 오컬트는……!!
나는 반지 낀 검지를 상자가 있는 방향으로 들었다.
혹여나 상자가 달려들기라도 한다면 공격이든 방어든 해야겠다는 마음이었다.
“…….”
대치 상황에 긴장감이 고조됐다.
그러다 덜컥거리는 소리 외에 미세한 잡음이 조금씩 들려오기 시작했다.
“상자 속?”
청력을 집중하니, 이내 잡음이 또렷해졌다.
“끄으응…….”
잠투정하며 칭얼거리는 소리 같기도 하고.
시간이 지나자 칭얼거림이 잦아들면서, 상자의 움직임도 줄어들기 시작했다.
이내 상자가 완전히 움직임을 멈췄을 땐,
“피유우…….”
쌔액. 쌔액.
곤히 잠든 어린아이가 내는 것 같은 숨소리가 들려왔다.
나는 검지를 내리고 상자를 바라봤다.
“진짜 정체가 뭐지……?”
상자가 살아있는 게 아니라, 상자 안에 작은 무언가가 살아있었다.
***
“좋은 아침.”
아침부터 상자한테 인사하는 사람이 있다?
그게 바로 접니다.
나는 침대 옆 협탁에 놓인 상자에 말을 걸었다.
그 후로 움직이는 일도 없었고, 안에서 들리는 숨소리는 다른 사람 귀에 들릴 정도도 아니라 그냥 대놓고 올려놨다.
그랬더니 다들 내가 상자 버리기를 포기했다고 생각하는 듯했다.
그래, 뭐 별수 있겠는가.
안에 생명체가 있는 거 같은데 어디 갖다 버릴 수도 없고.
그 전에 버려도 다시 돌아오는데.
일단은 얘 숨소리라도 들을 수 있는 내가 데리고 있는 게 맞지 않을까.
그렇게 화려한 뛰어오르기를 선보였던 상자는 일주일째 자는 것처럼 잠잠했다.
이러다 갑자기 알 깨고 나오듯 상자 열고 나오는 건 아니겠지.
“잘 자고 있어.”
상자에 인사한 후, 방을 나서기 전 나는 거울을 확인했다.
오랜만에 보는 갈색 머리에 평민들의 옷을 입은 내가 서 있었다.
후후. 오늘은 예배당 출근이 아니란 말씀.
나는 상자를 향해 의기양양하게 말했다.
“내가 간식값 벌어올게!”
***
오디트리아 대륙에서 가장 많은 가맹점을 보유했다는 앙뜨완 빵집.
나는 그 본사의 호화로운 귀빈실에 앉아 계약서를 읽고 있었다.
“푸딩, 와플, 에그 타르트…….”
이 황홀함에 젖은 목소리는 내가 낸 소리가 아니었다.
맞은편에 앉은 앙뜨완 빵집의 사장, 올리비아의 것이었다.
그녀는 헬리와 내가 만든 디저트를 먹으면서 그 이름들을 되뇌고 있었다.
“너무 맛있네요. 리리 님. 환상적이에요.”
“진짜요? 올리비아 씨 입맛에 맞아서 다행이네요!”
“저한테만 맞으려고요. 저희 직원들이 리리 님의 신작이라는 소리에 다들 침을 삼키고 있답니다. 오늘 가져오신 디저트도 노리고 있을 텐데……. 아쉽게도 줄 게 없네요. 제가 다 먹어버려서.”
올리비아는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으며 냅킨으로 입가를 닦았다.
줄 게 없다는 말처럼 싹싹 비워진 접시는 설거지가 필요 없을 정도였다.
“이렇게 직접 와 주셔서 감사해요. 그동안 얼굴을 통 못 봬서 궁금했었거든요. 헬리에게 열심히 편지를 보낸 보람이 있네요.”
“아, 그거 말인데요. 제 얼굴은 올리비아 씨만 알고 계셨으면 좋겠어요.”
이번 계약도 비대면으로 진행하려고 했었지만, 얼굴을 보고 계약하고 싶다는 올리비아의 말에 여기까지 방문한 것이었다.
거절할 수도 있었지만, 거절하기엔…….
[계약금은 이 정도면 될까요?]
너무 많은 돈이었지.
헬리를 통해 받은 올리비아의 편지 속 ‘0’의 개수를 생각하니 또 가슴이 뛴다.
“그럼요. 리리 님 얼굴을 아는 사람은 저밖에 없을 거예요. 그렇지 않으면 헬리가 식도를 들고 절 찌르러 올걸요.”
살벌한 소리를 아무렇지도 않게 하신다.
헬리와 같은 주방에서 일 년 정도 일했다더니, 꽤 친한 사이인 모양이었다.
“…….”
나는 계약서의 마지막까지 꼼꼼히 살핀 뒤, 서명란에 서명했다.
살폈다고 말했지만, 지난번에 올리비아가 우편으로 보내준 계약서 내용과 달라진 점이 있는지만 확인한 것이었다.
이미 젠달의 최고급 인력인 에본 재상님의 검토를 받았거든.
물론 검토는 계약서 내용이 적힌 종이를 들고, 나와 멀찍이 떨어져서 하셨다.
날 경계하는 게, 변함없이 한결같으시다니까. 흑흑.
“계약은 잘 끝났으니, 시간 괜찮으시면 놀다 가실래요? 제가 리리 님과 친해지고 싶어서요.”
“음, 좋아요……!”
그 뒤로 올리비아와 나는 팝콘의 인기라든지, 신메뉴를 어떻게 팔 거라든지, 올리비아의 남편 이야기, 헬리의 젊은 시절 이야기 등등 주제를 이것저것 옮겨 가며 한참 이야기를 나눴다.
오랜만에 지인이랑 카페에서 수다 떠는 기분이 나서 나도 모르게 푹 빠졌지 뭐야.
다음에 시아나랑도 외출할 수 있으면 좋겠다.
그렇게 서너 시간이 훌쩍 지나고 나서야, 나는 앙뜨완 본점을 나와 황궁으로 가는 마차에 몸을 실었다.
“재밌으셨습니까?”
“네. 카디얀 경은 안 지루했어요? 건물 주변에서 계속 숨어있느라.”
“성녀님을 모시는 일이 지루할 리가 있겠습니까.”
카디얀은 누가 들을세라 속삭이고는 내가 탄 마차 문을 닫았다.
이번 외출에 폐하가 붙여준 호위는 카디얀 한 명인 듯 보였지만, 나 몰래 깔아둔 젠달의 기사들이 몇 있었다.
아까 마차 안에서 창문으로 여기저기 구경하다 보니까 기사 차림의 익숙한 얼굴들이 눈에 들어왔지 뭐야.
마차가 움직이기 시작하고, 나는 지루한 시간을 때우기 위해 창문으로 시선을 돌렸다.
앗, 저기도 기사 한 명 더.
이렇게 다 들킨다니깐요. 거기다 저렇게 잘생긴 사람을 숨기려고…….
“어, 어?”
인적이 드문 담벼락 근처에서 일어나는 당황스러운 광경에 나는 의자에서 몸을 뗐다.
그리고 이마를 창문에 붙이고 좀 더 자세히 상황을 확인했다.
익숙한 얼굴이라 젠달의 기사라 생각했는데….
나는 급히 마부석과 연결된 창문을 두드렸다.
“마, 마부님! 스톱! 내 친구 집단 구타당하고 있어요! 멈춤! 멈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