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1화
“가는 건가! 이렇게 헤어지는 건 아쉽지만, 남편분이 선주님이시니까 말이야. 다음에 또 보자고! 사모님!”
“사모…….”
“내가 여기저기 많이 다녀봐서 아는데 말이다. 리리, 네 인생에 저런 남편은 다신 없으니까 이혼하지 말고 꼭 잡고 살아야 한다……!”
“아니…….”
황궁과 조금 떨어진 지역의 항구에서, 나는 선장님과 선원들의 작별 인사를 나눴다.
그리고.
“잘 살아라.”
재회 이후부터 툴툴거리던 쇼웬은 마지막까지 퉁명스러웠다.
지난번 말없이 사라진 일로 삐진 게 아직도 안 풀린 모양이었다.
그래도 쇼웬이랑은 죽이 잘 맞는 사이라 생각해서 서운한 기분이 든다고.
“쇼웬, 그래도 우리 언제 또 볼지 모르는데……. 인사가 그게 다야?”
“……나중에 밥 먹을 돈 없으면 찾아오던가.”
“밥 사주게? 그럼 너 삐진 거 풀린 거야?”
“내가 언제 삐졌다고 그래! 빨리 가. 네 남편 기다린다.”
“윽. 남…….”
나는 몸을 굳혔다.
이건 절대 일어날 수 없는 일에 몸이 절로 거부반응을 보이는 거랄까.
“나 이만 갈게. 너도 잘 지내고 있어. 다음에 보자!”
껄끄러운 내용에 나는 쇼웬에게 서둘러 인사를 하고 몸을 돌렸다.
멀지 않은 거리를 후다닥 뛰어가니 벌써 이동할 채비가 끝나 있었다.
마차 한 대 앞에 옹기종기 서 있던 젠달 사람들이 나를 맞이했다.
“아이고, 성, 아니, 사모님! 이제 가시죠!”
“사모님, 오셨습니까!”
“모시겠습니다. 사모님.”
초비, 기사들, 믿었던 헨켈 대장까지.
얼굴들이 한눈에 봐도 싱글벙글했다.
다들 날 놀리는 데 재미가 붙은 모양이었다.
하지만 나도 호락호락하게 놀림감이 될 수는 없지.
이쯤은 뻔뻔히……!
“가실까요? 부인.”
“으으…….”
최종 관문이 폐하면 무리다.
나는 푹 고개를 숙인 채 폐하의 에스코트를 받으며 마차에 올랐다.
도중에 누군가 손뼉을 치기 시작했다.
그러자 주변 사람들이 따라치는, 그리고 그 박수를 받으며 나와 폐하가 마차에 오르는 다소 우스꽝스러운 광경이 연출됐다.
시작은 몰라도 바람잡이는 누군지 알겠다.
“다들 박수해. 박수.”
저 잔뜩 들뜬 목소리는 초비였다.
힐끔 초비를 바라보니 저렇게 사람이 해맑을 수가 있나 싶을 정도의 웃음을 짓고 있었다.
“이제 사람 만나는 것도 당분간 끝이라고. 끝. 흐흐흐.”
‘나 초비한테 뭐 잘못했냐아아…….’
평범한 외관에 비해 마차 내부는 황실 마차와 비교해도 손색없을 정도로 안락했다.
덕분에 며칠간의 긴장과 피로가 단번에 몰려오면서, 나는 기절하듯 잠에 빠져들었다.
다시 눈을 떴을 때는-.
“으악! 미남!”
“…….”
나는 등받이에 한껏 몸을 붙인 놀란 자세 그대로 심호흡하며 주변을 살폈다.
맞은편에 웬 낯선 존잘 미남이 앉아서 날 보고 있나 했더니.
“일어났나?”
“……폐하? 으. 천사라도 되는 줄 알았네……. 은발이셨죠. 참…….”
눈을 뜨자마자 본 천상계 미모 때문에 심장이 벌렁벌렁했다.
이래서 사람이 너무 잘생기면…… 너무 좋다.
크흡. 잘생긴 거 최고……. 폐하 얼굴 최고…….
‘헛. 그럼 폐하가 나 자는 거 계속 보고 계셨던 거야?! 안 돼…! 코 골았다거나 침 흘린 거 아니겠지이이…….’
혹여 폐하의 고막이나 시각을 테러한 게 아닐까 걱정하는 중에, 폐하가 물었다.
“지금 어디쯤 왔는지 알아?”
“어딘데요?”
“황도. 조금 전 들어왔어.”
그 말에 나는 시선을 창밖으로 돌렸다.
반쯤 처진 커튼은 창문을 온전히 가려주지 못했지만,
황도에 널리고 널린 이런 평범한 외관을 가진 마차에 관심을 두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나는 마음 편히 창가에 얼굴을 붙이고 밖을 구경하기 시작했다.
“와. 이렇게 생겼구나.”
황도는 어느 유럽의 번화한 마을 느낌이 났다.
황궁과 이어지는 일직선의 넓은 포장도로를 따라 양옆으로 2, 3층의 건물들이 줄지어 있었다.
파스텔 톤의 건물들, 곳곳을 장식하고 있는 꽃과 낮은 나무들, 물건을 파는 가판대, 장난치며 지나가는 어린애들, 웃는 사람들…….
평화롭고 활기찬 모습이 절로 눈길을 사로잡았다.
“열심히 보는군. 거리에 볼 만한 거라도 있나?”
밖의 풍경엔 관심 없다는 듯, 폐하는 꼿꼿하게 등을 피고 다리를 꼬아 앉은 자세를 유지한 채 질문했다.
“신기해서요.”
나는 창밖에서 시선을 떼지 않고 답했다.
“신기하다니?”
“저 황도 처음 보거든요. 지난번 니세포르엘 신전으로 갈 땐 마차 밖을 보질 못했으니까.”
뭐, 보안상 마차 창문을 죄다 가리기도 했었지만.
지금처럼 볼 수 있게 해줬어도 못 봤을걸.
눈가리개도 하고 있었고, 나는 그때 내 욕망과 싸우느라 정신이 없어서-.
크. 많이 발전했다. 나 자신.
이렇게 폐하랑 멀쩡히 마차도 타고!
잠시만, 그러고 보니까.
“그때 못 본 거…….”
폐하의 그 청량한 웃음, 아직도 못 봤다. 내가 왜 그걸 놓쳐서는……!!
나는 울적해져서 중얼거렸다.
“평생 못 보는 건 아니겠지…….”
“…….”
“……?”
옆 통수가 따끔거려서 슬쩍 고개를 돌렸다가 깜짝 놀랐다.
폐하가 심각한 표정으로 이쪽을 보고 있었다.
저 고뇌하는 고독한 천재 미남 같은 분위기는 또 뭐람!
아무래도 나 지금 은발 폐하한테 덕통사고 당한 거 같다.
은발 폐하 못 잃어……. 근데 금발 폐하도 못 잃어…….
“신아리.”
“왜, 왜요?”
또 ‘2m 접근금지’ 자가 진단을 내려야 하는 상황이 올까, 나는 시선을 폐하의 얼굴에서 어깨로 내렸다.
아니, 어깨도 위험했다.
이렇게 넓고 듬직한 데다 잘생긴 어깨는……!
“재밌어?”
“흐헉. 네. 아니, 뭐가요?”
“밖에 구경하는 거.”
괜히 찔려서 놀란 소리를 했는데, 황도 이야기였다.
황도 구경하는 것보다 폐하 얼굴 보는 게 더 재밌는데요.
하지만 솔직히 말할 수 있을 리 없지.
“재밌……죠?”
“그렇군.”
폐하는 마부석과 이어진 창문을 두드렸다.
그러자 마차가 부드럽게 멈춰 섰다.
“어? 바로 황궁으로 가는 거 아니었어요?”
영문을 몰라 어리둥절해 하는 내게, 폐하가 다정한 미소를 지으며 손을 내밀었다.
“시간 괜찮으면, 같이 황도 구경 좀 하다 들어가실까요. 부인.”
***
랑데트 후작가.
집사는 조금 전 저택에 도착한 서신을 가지고 급히 후작의 방을 찾았다.
“무슨 일인가?”
막 잔에 따른 와인을 시음하려던 참이었다.
중요한 시간을 방해받은 후작이 짜증 섞인 목소리로 물었다.
집사는 진땀을 빼며 자신이 읽은 서신의 내용을 보고했다.
“도이탐에서 서신이 왔습니다. 녹스담 해역에서 벤 볼프만이 나타났답니다. 한데 그 시기가 랑데트 가문의 무역선이 지날 때와 겹쳤으니 확인하라 했다고…….”
“뭐라고!”
후작은 큰 소리를 내며 의자에서 벌떡 일어났다.
순식간에 불안과 근심이 그의 마음에 들이닥쳤다.
“두 척 중에 한 척은 데르아치 대공께서 후원하신 배지 않느냐.”
그 배가 해적들에게 당했다면, 후원이 문제가 아니라 데르아치 대공과의 연이 아예 끊길 수도 있는 일이었다.
“……확인하라고?”
같은 자리를 이리저리 서성이던 후작은 우뚝 멈춰 섰다.
데르아치 대공이 걸려 과민하게 반응하긴 했지만, 보통 이런 소식은 피해 규모를 함께 보고하는 편이 일반적이었다.
사상자의 수라든지, 배를 수리해야 할 피해는 어느 정도인지, 얼마만큼의 물건을 잃었는지.
“그럼 해적선에게 약탈당한 게 아닌가?”
“선원들은 해적을 보지도 못했다고 합니다. 도이탐에 도착한 뒤에야 보니아 왕국군에게 연락을 받았다더군요. 벤 볼프만이 나타났는데 혹 피해당한 것은 없냐 물었다고.”
“그래서?”
“인수과정에선 아무런 문제가 없었다고 합니다.”
서신엔 물건은 빠짐없이 도착했고, 배도 멀쩡하다고 적혀 있었다.
그런데도 집사가 다급히 후작에게 보고한 것은, 제가 판단할 수 없는 문제가 하나 껴 있었기 때문이었다.
“……데르아치 대공께도 이 내용을 전할까요?”
“…….”
와인잔을 작게 돌리는 후작의 머릿속에 지난날의 기억이 떠올랐다.
데르아치 대공저를 방문한 날.
후작가를 찾아왔던 대공의 대변인이라는 사내가 끌고 온 바퀴 의자에 앉아있던 노인.
자신을 데르아치라고 소개한 노인에게서 나오는 정체를 알 수 없는 짙고 진득한 기운이 후작을 온종일 피곤케 했다.
몸이 축 늘어지던 그 감각.
불쾌하게 코를 찌르던 냄새까지도.
“아니.”
대공 쪽에서 저를 부르거나 자신이 대공을 필요로 하는 상황이 오면 모를까.
후작은 굳이 대공저로 가야 할 일을 나서서 만들고 싶지 않았다.
“피해 본 것도 없는데 뭘 알려드리기까지 하나. 후에 일이 생기면, 그때 말씀드려도 늦지 않네.”
***
“와! 다음엔 저거 해봐요, 저거!”
나는 다음 목표물을 발견하고 뛰어갔다.
폐하가 뒤따라오며 피식 웃었다.
황궁과 이어진 거리에서 조금 더 안쪽으로 들어오니 작은 축제를 연상시키는 부스들이 있었다.
길거리 게임을 할 수 있는 부스, 먹거리, 공예품 등을 파는 가판대…….
처음엔 내려서 구경까지 할 필요가 있나 싶었는데, 너무 신난다.
“아가씨, 한 판 할 거야?”
사격 게임과 비슷한 모양새를 한 부스 앞에 가니 주인이 날 반겼다.
고무공을 던져 원하는 상품을 뒤로 넘어트리면 타갈 수 있는 형식의 게임이었다.
“네! 할래요!”
내 목표는 폐하의 현재 머리칼을 닮은 은색 털 방울 인형이었다.
반드시 맞춘다는 일념으로 팔을 걷어붙이는 중에, 뜻밖의 목소리가 바로 옆에서 들렸다.
“리리?”
“어? 델칸?”
얘가 왜 여기에 있지.
의문을 풀 새도 없었다.
나를 마주 본 델칸의 얼굴이 살짝 울 듯한 표정을 짓더니,
“리리!”
반가움의 표현으로 날 끌어안았기 때문이었다.
“어, 어? 델칸?”
델칸이 확 끌어안지 않은 데다가 금세 떨어져서 나는 놀라진 않았다.
놀란 건 내가 아니라-.
스릉.
“…….”
천천히 이쪽으로 걸어오던 폐하는 눈에 보이지 않는 속도로 검을 빼서 델칸에게 겨눴다.
그리곤 델칸을 차갑게 바라보며 말했다.
“뭐 하는 짓이지. 내 부ㅇ-.”
“으아악!”
나는 황급히 달려들어 폐하의 입을 손으로 콱 막았다.
부인이라고 하려고 했죠, 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