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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략 황제의 외모가 내 취향이라 곤란하다-40화 (40/150)

40화

다시는 사라지지 말라니.

어디 로맨스 소설 남주인공의 고백 같지만, 말도 안 되는 일이다.

상대는 우리 폐하인걸?

나와 폐하라니.

‘후후. 있을 수도 없는 일이지.’

초반에 폐하와 엮이면 안 되겠다고 생각했던 건, 폐하가 성격파탄자 미남이라 생각했기 때문이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겪어본 폐하는 그렇게 성격이 나쁘지만은 않았다.

하지만 그것과는 별개로 깨달은 것이 있었다.

나는 폐하를 덕질 대상 이상으로 보면 안 되겠다는 점.

말이 나와서 말인데, 이게 여느 로맨스 소설 같아서 방금 폐하가 했던 말이 고백이고, 연인이 됐다고 치면.

그 소설은 비극적 결말일 게 분명했다.

왜냐고?

실수로 입술이라도 맞아봐라.

나는 그대로 세상 하직. 폐하의 곁이 아니라 저 하늘 위에 있을걸.

요새 손 몇 번 잡았다고 그렇게 심장이 벌렁거리는데.

나는 짧고 굵은 덕질보다는 길고 눈이 만족스러운 덕질을 목표로 한다 이거야.

애초에 오를 수도 없는 나무는 쳐다보지 않는 게 좋았다.

‘그리고 폐하가 말한 의미도 그런 게 아닐 거고.’

대체품이 없는 부하(성녀)를 향한 소리일 게 분명했다.

왜, 볼프만이 똑똑한 부하는 나밖에 없다면서 무역선까지 데리고 갔던 것처럼 말이지.

그래도 폐하 입에서 사라지지 말라는 말까지 들을 정도라니.

꼭 필요한 똘마니가 된 것 같아 썩 기분이 나쁘진 않다.

입꼬리가 씰룩거렸다.

나는 기분 좋은 걸 목소리에 티 내지 않으려 노력하며 폐하를 떠봤다.

“폐하, 혹시 제 걱정하셨어요?”

“말이라고.”

“왜요?”

기대감이 뭉실뭉실 피어오르다가 뒤에 온 폐하의 말에 파사삭 가라앉았다.

“걱정할 수밖에 없지. 머리카락도 아무한테나 덥석덥석 주고 오고.”

그게 그렇게 되나.

하긴 폐하는 숭덩 잘린 내 머리칼을 알아차리곤 기절한 볼프만을 정말로 죽여버리려고 했었지.

내가 직접 잘라 포인에게 줬다는 해명이 있고서야 볼프만은 목숨을 부지할 수 있었다.

‘포인은 잘 치료받았으려나.’

볼프만에게 돌아오는 해적들을 잡을 때, 멀리 떨어진 무역선에서 구조선을 내리는 것을 목격했으니 사람들은 잘 구조됐으리라 생각한다.

후에 들어서 알았지만, 그런 대형 무역선에는 반드시 신관이 한 명 이상 동승해야 한다는 법이 있다고도 했고.

어찌 됐든 나쁘지 않게 풀린 것 같아 다행이었다.

“저주받은 아이를 봤다고 했지?”

“음, 그렇게 부르더라고요. 그냥 고열 때문에 아파하는 아이로밖에 안 보였는데. 가까이 있으면 같이 저주받는다나 뭐라나.”

처음 발견한 마차 안에서 쓰러진 포인을 아무도 도와주지 않은 것도 그 때문이었다.

그건 좀 너무했지. 애가 반쯤 죽으려고 했는데.

“그런 아이를 도왔군. 저주가 두렵지 않았나?”

“미신인 거 같던데요.”

전염병도 아니고, 저주가 옮는다는 소리는 듣도 보도 못했다.

다시금 떠오른 그 상황이 마음에 안 들어 툴툴거렸다.

“그게 진짜면 세이칸 신은 따돌림 주모자게요. 포인이 아픈 건 신성력 때문이라던데, 신성력은 세이칸 신이 줬잖아요.”

“으음. 미신은 맞지만……. 따돌림 주모자…….”

폐하는 잠시 할 말을 잃은 듯했다.

“정말이지 성녀는 어디 내놓기가 걱정스러워.”

“에이, 저 밖에선 성녀 연기 잘해요. 이런 말은 폐하 앞에서만 하죠.”

“그새 말 받아치는 솜씨가 늘었군.”

“지금 제 눈엔 벽지밖에 안 보이거든요.”

폐하 얼굴이라도 보였으면 으……. 어……. 으아……. 이러고 있었겠지만.

이불에 싸맨 몸은 옴짝달싹할 수도 없고, 어둠 속이라 눈에 뵈는 것도 별로 없으니 대답 정도는 멀쩡하게 할 수 있었다.

폐하 얼굴이 안 뵈니 대답 정도는 멀쩡하게 할 수 있었다.

“그래서 말을 잘하실 수 있으시다?”

“그럼요. 저 지금 고민 상담소 운영해도 될 정도라니까요. 폐하 고민 있으시면 지금 말씀하세요. 날마다 오는 기회가 아니라고요.”

“기회라.”

하지만 이어진 건 긴 침묵이었다.

‘고민이 없으신가? 주무실 수도 있으니까 가만히 있자.’

고요함 속에서 벽에 걸린 시곗바늘 소리가 시끄럽다 느껴질 때쯤, 폐하가 입을 열었다.

“……원래 세계로 돌아가고 싶지는 않나?”

“원래 세계요?”

“성녀가 태어나고 자란 곳. 갑자기 소환되느라 두고 온 것들도 많을 텐데. 가족이나 아끼던 물건 같은.”

“음…….”

글쎄.

가족은 있으나 마나였고. 아끼던 물건은 연예인 사진으로 갤러리가 빵빵했던 내 핸드폰 정도?

그것도 트럭에 치이면서 박살 나지 않았을까.

친구들이 좀 보고 싶긴 했지만, 그렇다고 엉엉 울 정도로 보고 싶은 건 아니라-.

“딱히 안 가도 되는데요……?”

“……배려하는 건가. 하긴 성녀는 이상한 곳에서 다른 사람을 먼저 생각하는 면이 있으니.”

“아, 아뇨. 정말로 괜찮은데요.”

나는 재빨리 폐하의 오해를 부정했다.

여기서 내 진심이 전해지지 않는다면, 그건 조금 억울한 일이다.

왜냐면 난,

“전 죽을 때까지 폐하 얼굴만 보고 살 거거든요!”

“……뭐?”

황당한 목소리로 폐하가 되물었지만, 나는 지금 내 최애가 몰라주는 내 진심을 피력했다.

내가 거짓말 하나도 안 보태서 이 세계에 있던 모든 날을 폐하 덕질로 살았는데.

그걸 최애(몸)가 몰라주는 일은 서럽지 않은가-!

“폐하가 대놓고 싫다고 하실 때까지 곁에서 지켜보는 게 제 목표거든요. 솔직히 호위 기사인 헨켈 대장이 제일 부럽긴 하지만…….”

내가 폐하를 지킬 수는 없으니. 지키겠다고 나섰다가 민폐 끼치지나 않으면 다행이다.

나는 불끈 이불을 잡아 쥐고 가슴 속에 고이 품고 다녔던 내 포부를 밝혔다.

“폐하, 저는요……! 이 세계에서 마지막까지 폐하 미모와 함께하고 싶습니다!”

“…….”

***

내가 멀쩡하게 대답을 할 수 있던 것과 잠자는 것은 별개의 문제였다.

다소 이른 아침.

나는 한숨도 못 잔 퀭한 얼굴로 바닷바람을 쐬러 밖으로 나왔다.

갑판 위에 반가운 얼굴이 보였다.

“어, 쇼웬!”

“……아.”

“뭐야, 그 미적지근한 반응은. 그제 밤에 갑자기 사라져서? 미안해. 근데 너도 알다시피 어쩔 수 없는 사정이-.”

“너…….”

“어?”

쇼웬은 할 말이 있는 사람처럼 나를 바라봤다.

쉽게 말이 나오지 않는 듯, 잠시 우물쭈물하다 질문을 던졌다.

“우리 배 주인이랑 부부냐?”

“배 주인? 선장님? 너희 아버지?”

선장님이랑 내가 왜 부부인가.

잠시 고민하던 나는 팍 식은 눈으로 쇼웬을 바라봤다.

쓰레기를 보는 눈이라 해도 좋았다.

“……나 혹시 부자라고 배에서 소문났어? 그래서 내 아들이 되고 싶어서 이런 5살 어린애도 안 할 수작을…….”

날 찾으러 온 폐하는 귀티가 잘잘 흐르지.

젠달에서 온 사람들은 나한테 존댓말을 쓰고 깍듯이 대하지.

데이데른 호의 선원들은 내 정체를 추측하는데 재미를 붙이고 있는 모양이었다.

어딘가의 귀족 자제가 아니냐는 말까지 나오는 걸 듣긴 했는데.

“쇼웬, 아무리 돈이 좋아도 그렇지. 너희 아버지 엄청 애처가시던데……. 어머님도 미인이시고…….”

“아, 아니야!”

“미인이 아니시긴. 내가 봤을 때 너 잘생긴 건 선장님 유전자보다는 네 어머니 유전자의 힘이 백 프로…….”

쇼웬은 양 손바닥을 내 쪽으로 펼치며 다급하게 외쳤다.

“아니, 배 주인이 우리 아버지가 아니라고!”

“그럼 누군데?”

“그, 너 데리러 온 남자. 은발에 잘생긴.”

“아, 우리-.”

잠시만. 폐하라고 하면 안 되나.

정체를 숨기고 탄 거라 했으니.

그러면 뭐라고 부르면 좋지.

“……알렌?”

내 순발력에 창의력까지 기대하는 건 무리다.

‘알렌드 칸 레오디우스’에서 ‘드드’나 ‘스스’란 가명이 안 나온 게 어딘가.

‘리리’같은 가명은 나 혼자면 족하다. 흑흑.

“우리 알렌……. 하여튼, 그 남자가 데이데른 호 주인이라고. 어제 시세보다 열 배 넘는 가격을 불러서 아버지가 팔아넘겼어.”

“오오, 그랬구나.”

나는 쇼웬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우리 폐하는 돈이 많으니까 그러셨을 수도 있겠지.

그래도 대단하다. 열 배라니.

폐하의 플렉스에 감탄하는 중이었는데, 쇼웬이 어처구니없다는 눈빛으로 날 보고 있었다.

“왜?”

“너 내가 했던 질문 다 까먹었지.”

“질문?”

그게 뭐였더라.

기억을 더듬는 중에 쇼웬이 툴툴거리며 먼저 말을 꺼냈다.

“그 알렌이라는 사람이랑 너 부부냐고.”

“……엥?”

“뭘 그렇게 비밀 들킨 사람처럼 그러고 있어? 그 키 작은 분홍색 단발머리 여자가 그러던데. 둘이 부부라고.”

“……?”

그게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야.

최근 들은 말 중에 가장 어이가 없는 말에 벙쪄 있었는데, 누군가 내 어깨에 손을 올렸다.

“맞아.”

이 달콤한 중저음.

나는 홀린 듯 내 어깨 위로 시선을 옮겼다.

거스러미 하나 없이 매끈한 피부, 반질반질 깨끗한 손톱, 길쭉하고 적당히 마디가 굵은 이 조각상 같은 손은…….

“부부.”

“…….”

“그렇죠? 당신.”

헐. 미친.

이걸 다정 모드로요……?

농담이라기엔 너무나 과한 폐하의 말에 나는 그대로 굳어버렸다.

무려 1박 2일 동안.

***

폐하가 쇼웬이 꺼낸 질문에 ‘부부가 맞다.’라고 답한 건 ‘재밌어 보인다.’ 정도의 이유였을 게 분명했다.

그게 본격적으로 된 건 객실로 찾아온 초비의 해명을 듣게 된 뒤부터였다.

“그 쇼웬인지 뭔지가 계속 두 분께서 무슨 사이시길래 붙어 다니냐고 캐물어서요. 부부시라 말하면 더 안 물을 거 같아서 그만. 하핫.”

자꾸 말을 거는 쇼웬이 귀찮아서 대충 대답했다는 게 초비다운 이유긴 했다.

그런데 왜-!

“부부라. 나쁘지 않은 생각이군.”

폐하가 거기에 동조하셨는지!

“성녀께서도 괜찮으신지?”

“으……, 네……?”

“‘네’는 동의군요. 그럼 남은 시간, 잘 보내보죠. 부부로.”

정체를 숨기는 지금 상황에 ‘부부’란 설정이 하나 더 추가됐다.

내가 정신을 차릴 수 있을 리 없었다.

“당신, 지금 먹고 있는 요리는 입맛에 맞나요?”

“다, 다, 다앙…….”

“이런. 당근이 들어간 요리는 없는데. 젠달에 도착하면 준비해 놓으라 하죠.”

…….

“알렌 선주님.”

“그냥 선주님이라 불러주게. 알렌은 내 아내께서 날 부를 때 사용하는 애칭이니까 말일세. 그렇죠?”

“애, 애……?”

“단둘이 아니라고 부끄러워하시는군요. 어제처럼 불러보시죠. 알렌이라고.”

시간이 어떻게 흐른 지도 모르겠다.

남은 건 저런 단편적인 기억들과 그 상황을 무척이나 즐기는 듯한 폐하의 모습.

‘이틀 길었지……. 그것도 이젠 끝이지만.’

똑똑.

객실 문을 두드리는 소리에 나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하선 준비가 완료됐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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