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9화
“…….”
샤를은 눈앞의 광경을 허망한 눈으로 바라봤다.
폐선박이나 다름없는 범선의 갑판 위, 정갈한 솜씨로 사지를 결박당해 꿇어앉은 해적들.
“하, 함장님. 이게 대체…….”
레콩드가 당황하며 말을 더듬었다.
함장님의 지시대로 녹스담 해역으로 키를 잡아서 왔더니, 자신들이 그토록 찾던 벤 볼프만과 그 잔당들이 누군가에게 당한 채 묶여 있지 않은가.
이 정도면 그냥 떠다 먹으라고 밥상을 차려준 꼴이었다.
샤를은 대답 없이 걸어가 제일 앞에 자리 잡은 볼프만의 주머니를 뒤졌다.
얼굴이 푸르딩딩 부어오른 볼프만이 아는 척을 했다.
“너, 샤를 애팅거구나~? 나 좀 잠깐 풀어주면 안 될까? 내 부하 하나가 말도 안 되는 짓을 저질렀거든~ 걔만 좀 죽이고 다시 잡힐게. 응?”
“시끄럽네요.”
샤를의 말에 해군 하나가 볼프만의 등을 밟았다.
윽. 하는 신음과 함께 볼프만이 갑판에 쓰러졌다.
몸을 일으킨 샤를의 손에는 붉은 신성석이 장식처럼 들어가 있는 단추 하나가 들려있었다.
자신이 성녀의 옷에다가 단 추적 장치.
‘어쩐지.’
왜 성녀의 위치가 녹스담 해역으로 잡혔나 했더니.
볼프만의 주머니에 단추를 넣어놨을 줄이야.
‘이미 알고 있었나 보네.’
“나 좀 풀어 달라니까아?! 가만 안 둘 거야, 파티쟝……!”
이를 부득부득 갈며 누군가의 이름을 외치는 볼프만을 보며, 샤를은 짧게 한숨을 쉬었다.
“……다 체포하세요.”
“넵!”
이 모든 일을 성녀 혼자 한 것은 아닐 터였다.
‘자존심 상하네.’
샤를의 시선이 한곳에 멈췄다.
갑판에 박힌 볼프만의 검 손잡이에 손수건이 묶여 바람에 펄럭이고 있었다.
거기에 자수로 놓인 젠달의 문양.
성녀와 함께 움직이고, 이렇게 저 보란 듯 해놓을 사람은 샤를이 알기론 한 사람밖에 없었다.
“함장님! 수상한 배 한 척이 있습니다만!”
망원경을 펼쳐 주변을 살피던 해군이 외쳤다.
“쫓을까요?”
“아뇨, 놔두세요.”
샤를은 손잡이에서 푼 손수건을 펼쳤다. 수려한 글씨로 글자 하나가 적혀 있었다.
[빚]
‘빚이라 이거지…….’
쪼잔한 남자.
인정하기 싫지만, 벤 볼프만을 잡은 일에 보니아 왕국군의 공은 없었다.
손수건을 든 샤를의 주먹 쥔 손이 분한 마음에 잘게 떨렸다.
***
드디어 그 시간이 왔다.
열심히 피해 다녔지만, 이제 더는 피할 수 없는 그 시간이.
“여기서부터.”
나는 바닥에 깔린 카펫을 막대기로 쿡 짚은 후, 그대로 막대기를 죽 그어 내렸다.
“여기까지.”
왕녀님한테 줄 선물로 해적들을 포장해 놓은 뒤, 우리는 젠달로 향하는 데이데른 호에 몸을 실었다.
헨켈 대장, 초비, 카디얀, 다른 기사들까지…….
반가운 재회도 잠시, 앞으로의 일정을 논의하던 중.
“성녀님께서 황궁에 안전하게 도착하실 때까진 황제 폐하와 같이 계시는 편이 좋지 않을까요?”
라는 의견이 나왔다.
폐하는 나쁘지 않은 의견이라 했고, 나도 무사히 젠달에 가고 싶었기 때문에 동의했다.
그렇다고는 해도…….
객실의 가구는 ‘침대-카펫-소파’ 순으로 배치돼 있었다.
내 막대기를 따라 반대로 누운 카펫의 결이 정중앙에 선을 만들었다.
“넘어오시면 안 돼요.”
폐하와 같은 방을 사용하고 싶다는 건 아니었는데-!
아니, 물론 24시간 내내 눈치 안 보고 폐하 얼굴을 보는 건 좋지. 좋았지만……!
‘저건 내가 감당할 수 없는 미모인 걸……!’
이제 겨우 금발 폐하에게 조금씩 익숙해져 가던 내가, 새롭게 등장한 은발 폐하에게 면역 따위를 가지고 있을 리가 없었다.
내가 하는 짓을 팔짱을 낀 채 서서 보고만 있던 폐하가 입을 열었다.
“같이 사용하는 공간인데 넘어가지 말라?”
“네. 당연하죠. 큰일 나신다니깐요.”
내 진심 어린 경고를 폐하는 가당치도 않다는 듯이 피식 웃었다.
그리고는 ‘어디 네가 이 선을 안 넘을 수 있냐.’라는 듯한 눈빛으로 내 쪽을 바라봤는데,
그렇게 뭐 보석 같은 눈으로 쳐다보면 제가 넘어갈 줄 아시나…!
“……발, 넘어왔는데.”
“…….”
이놈의 발이 좀 더 앞에서 보고 싶다고 앞으로 움직인 모양이었다.
말을, 좀 들으라고. 내 몸!
“아, 이건 불가항력…….”
빨리 멀리 떨어져야지, 안 되겠어.
나는 후다닥 소파로 달려가 누운 뒤, 이불을 머리끝까지 뒤집어썼다.
젠달까지는 배로 2박 3일.
그때까지 폐하는 내가 지킨다.
누구한테서? 바로 나한테서.
“…….”
“안녕히 주무세요. 혹시 모르니까 침대 옆에 검 두시고요.”
내 할 말을 속사포처럼 뱉어내고 나는 눈을 감았다.
객실이 조용해졌다. 슬쩍 청각을 곤두세우며 폐하의 기척을 살폈다.
다행히 주무시려는지, 침대 쪽에서 이불이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났다.
그래, 위험한 건 나밖에 없다니-.
“으악?!”
갑자기 내 몸이 이불째 번쩍 들렸다.
발버둥 치려고 보니 폐하였다.
하찮은 내 저항으로 저 얼굴에 상처를 낼 수는 없는 일이지.
나는 누에고치처럼 축 늘어져 어디로 가는지도 모른 채 들려갔다.
발소리는 또 어떻게 죽이신 거람……!
매번 내 청력을 피해 가는 그 능력, 비법 좀 알고 싶다.
폐하 이불로 둘둘 싼 나를 침대 위에 올려놓았다.
“헉. 저 왜 여기에 있어요?”
“여기서 자. 내가 소파에서 잘 테니.”
“안 돼요!”
윽. 얼마나 꽁꽁 묶어두셨는지 이불을 풀 수가 없었다.
나는 얼굴만 빼꼼히 내민 채로 소파로 가는 폐하의 뒷모습을 향해 처절하게 외쳤다.
“차라리 제가 바닥에서 잘게요!”
폐하가 소파에서 자다니, 말도 안 되는 소리였다.
가뜩이나 폐하는 다리도 길어서 소파 밖으로 다리가 다 나오는데!
그럴 바엔 차라리 소파 맞춤형인 내가 낫지 않나!
내 최애(몸)를 저 조그만 소파에 구겨 넣고 내가 어떻게 잠들라는 건지……!
“이렇게는 못 잔다고요!”
내 눈물 젖은 호소가 먹힌 건지, 폐하는 소파에서 일어나 침대 옆으로 걸어왔다.
나는 그런 폐하를 최대한 불쌍하게 올려다보며 말했다.
“……자리 교환?”
바꾸죠, 자리.
그 와중에 은발로 내려다보는 모습 왜 이렇게 퇴폐적이시고 난리인가.
내 심장 소리 폐하한테 들리는 건 아니겠지.
“…….”
폐하는 고민하는 듯 눈매를 좁혔다가, 상체를 숙였다.
이제 곧 다시 짐짝처럼 들릴 마음의 준비를 하고 있었는데, 시간이 지나도 변하는 게 없었다.
대신에 침대 옆에 폐하가 눕는 소리가 들렸다.
“……어, 어, 어어……?!”
폐하랑 한 침대에 나란히 눕다니?!
너무 놀란 나머지 나는 반사적으로 몸을 일으키려고 했다.
하지만 내 몸의 자유를 뺏은 이불은 그걸 허락하지 않았다.
뒤집힌 거북이처럼 버둥거리고 있자, 두툼한 이불 위를 토닥이는 손이 있었다.
“그냥 가만히 있어.”
숨이 턱하고 멈췄다.
지금 폐하 손이 내 몸 위에, 아니 이불 위에……!
왜 솜이불 덮었냐, 과거의 나. 천 이불 한 장이면 됐을 텐데-!
‘천 이불은 무슨…!’
여기서 내 욕망한테 몸의 주도권을 뺏기면 안 됐다.
나는 조용히 심호흡하며 마음을 진정시킨 뒤, 폐하를 설득하려 했다.
“폐하-.”
“소파에서 자지 말라며. 나도 성녀가 바닥에서 자는 꼴은 못 보겠으니 이렇게 자.”
폐하는 내 설득을 사전 차단하며 입을 열었다.
대충 들으면 그럴듯한 이유 같지만, 폐하. 그냥 제가 소파로 가면 되는데요……?
“하, 하지만요-!”
“성녀가 무슨 짓을 할지 몰라서 구역을 나눈 거라며? 이렇게 꽁꽁 싸맸는데, 무슨 짓을 할 수나 있겠나?”
“폐하, 이거 실수하시는 거거든요? 저 이번에 공격용 장비도 생겨서 마음만 먹으면 이런 이불 따윈 한 번에 북 찢고 나와서, 네?!”
물론 그 장비 주인이 폐하긴 합니다만.
이제 대충 반지의 사용법도 익혔겠다, 언제나 날 배반하는 내 무의식이 이 솜이불을 터트리고 결계 안에 나랑 폐하만 가둘지도 모르는 일이지-!
미치고 팔짝 뛸 노릇이었지만, 이어진 폐하의 목소리에 나는 입을 다물었다.
“피곤하니까 그냥 자.”
“네.”
내 무의식이 어쨌든 제일 중요한 건 폐하의 숙면이지.
그래도 최소한의 방어는 필요했다.
나는 꼼지락거리며 폐하에게 등을 진 채 옆으로 돌아누웠다.
같은 천장 보는 있는 거 완전 위험해.
“…….”
나는 번데기가 된 애벌레의 심정으로 꼼짝하지 않고 몸을 굳혔다.
잠이 올 리는 만무했다.
말똥한 정신의 머릿속에선 별의별 상상이 떠올랐기에, 내 맞은편 벽지의 패턴을 노려봤다.
나는 아무것도 느끼지 못하는 번데기다.
날 둘둘 만 이불 위에 얹어진 건 폐하의 손이 아니다.
저 고요한 숨소리는…….
“……신아리.”
“허-ㅅ.”
심장이 덜컥 내려앉았다.
다행히 놀란 소리가 크게 나기 전에 입을 다물었다.
나는 뒤를 향해 조용히 속삭였다.
“네……?”
“…….”
잠꼬대하신 건가.
그런데 말이야,
이런 야심한 밤에 저런 목소리로 내 이름을 부르는 건,
날 말려 죽이시려는 거 아닌가……!
지-.
‘넌 쿨타임 아직 안 끝났잖아-!’
불길한 소리에 나는 애국가를 부르는 심정으로 폐하의 목소리를 되뇄다.
“피곤하니까.”
내 몸뚱어리도 말을 안 듣는데, 반지마저 말을 안 들어버리는 상황이 오면 무척이나 곤란했다.
나는 지금 아무것도 느끼지 못하는 바디필로우다.
폐하의 편안한 숙면, 안락한 휴식을 책임지는.
“……다시는.”
그런 내 노력을 무시하시는지, 폐하의 잠꼬대가 다시 시작됐다.
으으. 글렀다. 나는 이제 이 들끓는 피를……!
“다시는 말없이 사라지지 마.”
멈칫.
나는 몸을 굳혔다.
잠꼬대라기엔, 너무나도 선명한 목소리였다.
낮고 부드러운 목소리는 종류를 가늠할 수 없는 짙은 감정을 띠고 다시 내 귀에 닿았다.
“말하고도 사라지지 말고.”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