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8화
“우리 정말 탈출하는 거야?”
“그럼요! 이제 이 지긋지긋한 해적들이랑은 안녕이에요.”
나는 사람들을 구명선에 태우고 도르래를 돌렸다.
우리는 지금 녹스담 해역의 작은 범선에 있었다.
볼프만의 해적선 다섯 척 외에 새롭게 구한 평범한 배였다.
벤 볼프만은 옆의 대형 무역선에 부하 여섯 명과 좀도둑질하러 들어갔고.
“왕국군 한 방 먹이는 걸로 만족하죠?”
“파티쟝, 나는 하기로 마음먹은 걸 해내야만 하는 사람이야.”
꼭 갖고 싶은 게 있다며 죽어도 무역선에 해적질은 해야 한다길래.
그러면 몰래 들어가서 도둑질만 하고 나오는 게 낫지 않겠냐 제안했다.
“이런 작은 범선 하나만으로 어쩌려고요. 거기는 무역선이니까 포탄도 다 있을 텐데. 몰래 가면 우리도 피해 없고, 선장님은 원하는 걸 얻고요.”
“……파티쟝, 너는 역시 똑똑해.”
볼프만이 같이 들어가자고 해서 나도 들어갔는데, 길을 잃은 척하고 다시 나왔다.
그리고 범선을 지키고 있는 해적3에게 접근,
“선장님이 우리 역할 바꾸라는데요?”
“그걸 내가 어떻게 믿냐?”
“못 믿으면 말고요. 근데 그거 알아요? 선장님이 이번에 배 안에서 물건 찾는 사람한테 부선장 자리 준다던데-.”
“……배 잘 지키고 있어라!”
그렇게 배는 내 손에 들어왔다.
후후. 이 배는 이제 제 겁니다.
라고 말해봤자, 항해사도 없는 범선으로 우리끼리 어떻게 할 수도 없는 노릇이라.
구명선을 타고 조난된 척 연기해 무역선에 도움을 청하기로 했다.
“이 아이……. 빨리 치료를 받아야 할 거 같아.”
아이를 안은 여자가 말했다.
그녀의 말대로, 포인은 당장이라도 숨이 넘어갈 듯 불안정한 호흡을 유지하고 있었다.
“…좋은 방법이 있을 거예요. 우선은 여기서 탈출하는 게 먼저니까 빨리 가요.”
“파, 파티쟝.”
구명선의 사람들이 난간에서 밧줄을 풀고 있는 내 뒤를 보곤 겁에 질려 나를 불렀다.
“어라?”
“…….”
“뭐 하는 거니? 파티쟝?”
볼프만. 더럽게도 빨리 왔네.
반대편 난간에서 갑판을 딛는 발소리가 들렸다.
“바로 노 저어서 무역선 선원들이 볼 수 있는 시야 안으로 들어가세요. 물살에 휩쓸릴 수 있으니까 너무 가까이 붙지는 마시고요. 그리고 포인은…….”
나는 노인의 품에서 정신을 잃은 포인을 바라봤다.
“무역선 안에 신관이 있으면 치료를 해달라고 하세요. ……성녀의 명이라 하고요.”
나는 단검을 꺼내 내 머리카락을 손에 잡히는 대로 잘라 노인에게 건넸다.
별장을 나온 후, 혹시 모를 성녀 사칭죄를 면하기 위해 이것저것 시험해보다가 알게 된 건데, 염색약의 효과는 복용자의 몸을 떠나면 사라지는 모양이었다.
갈색이었던 내 머리칼은 검은 잉크가 물에 퍼지듯 원래 색으로 변했다.
“파, 파티. 아니, 당신은……!”
“세이칸 신의 가호가 여러분께 있기를.”
크흐. 마지막 대사는 성녀처럼 보였으려나.
못 볼꼴을 꽤 보여서 신뢰감이 떨어질 수도 있겠지만, 이렇게 말해주면 희망이 생기지 않을까 싶었다.
사람은 가장 힘들 때 신을 의지한다니까 말이지.
나는 천천히 풀던 밧줄을 확 놓았다.
풍덩-!
순식간에 구명선은 바다 위로 떨어졌다.
자꾸 이쪽을 올려다보길래 손짓하니, 허둥지둥 노를 찾아 젓기 시작했다.
나도 같이 가면 좋겠지만, 그랬다가는 저 벤 볼프만이 바로 쫓아와 다 죽여 버리려고 할 걸.
“찾으려던 건 찾았어요?”
나는 몸을 돌렸다.
다가오는 벤 볼프만은 옆구리에 작은 상자를 끼고 있었다.
“부하야, 뭐한 거니?”
“뭐하긴요. 당신 뒤통수쳤죠. 벤 볼프만.”
볼프만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이래서 똑똑한 것들은 안 된다니까.”
볼프만이 검을 뽑아 들었다.
선장이니까 역시 실력이 좋겠지? 지난번 멱살 잡을 때 보니까 힘도 좋아 보이던데.
하지만 나도 믿을 구석이 영 없는 건 아니었다.
“저 만만히 보지 않는 게 좋을걸요.”
지잉.
내 감정에 동조해 울리는 반지의 소리가 들렸다.
나는 볼프만을 똑바로 바라보며 한 발짝 앞으로 움직였다.
“나 쿨타임 끝났거든요.”
***
쿠웅-!
꺾인 돛대가 갑판 한가운데 떨어졌다.
곳곳에 연기가 피어오르고 파손된 범선은 전쟁터를 방불케 했다.
무역선은 저 멀리 평온한 상태로 멀어졌고, 쪽배를 타고 갔던 해적들은 이쪽으로 돌아오기 시작했다.
다행히 구명선을 타고 간 사람들은 해적들한테 들키지 않은 모양이었다.
‘그나저나!’
나는 구멍이 숭숭 난 범선에서 멀쩡한 공간을 찾아 뛰었다.
이렇게까지 화려하게 할 생각은 아니었는데……!
‘너 너무 강한 거 아니냐고!’
당연한 소리겠지만, 반지에게 항의해도 돌아오는 답은 없었다.
얘는 그냥 내가 ‘저기를 폭파해야 하나?’에서 ‘저-.’만 생각해도 노란빛을 쭉쭉 뿜어내며 사방을 터트리고 다녔다.
‘누가 주인 안 닮았다고 할까 봐!’
아니, 폐하는 강하지만 정도는 있지……!
“파티쟝…….”
갑판의 구멍에 빠졌던 볼프만이 기어 올라오며 날 불렀다.
그렇게 많이 맞았는데 이 정도면 정신을 잃고 쓰러져도 되지 않을까.
이제부터 바 볼프만이라고 불러도 되겠어.
바퀴벌레도 인정할 만한 생존력이다.
“후우…….”
부러진 돛대 기둥 옆에 멀쩡한 갑판이 있었다.
그곳에 멈춰선 나는 숨을 몰아쉬며 볼프만을 바라봤다.
하도 뛰어다녀서 그런지 머리가 지끈거렸다.
‘저 팔만 아니었어도.’
연탄처럼 새카맣게 변한 볼프만의 양팔.
그게 반지의 공격을 받는 족족 상쇄시키고 있었다.
이 세계에서 검은색은 신성한 색 아니었냐고…! 왜 볼프만이 저런 힘을.
“네가 신성력 보유자인 걸 내가 알아봤어야 했는데.”
“저기, 진정하-.”
지잉-.
‘그 저기가 아니라고!’
이렇게 컨트롤이 극악인 장비도 어디 없을 거다.
반지는 번쩍이는 섬광을 볼프만을 향해 쏘았다.
이변 없이 볼프만은 양팔로 내 공격을 막았다.
다만,
주르르륵.
“……?”
기울어진 선박을 따라 내 쪽으로 미끄러져 내려온 나무 상자 하나.
볼프만이 무역선에서 가져온 것이 방금 공격 때문에 품속에서 떨어진 모양이었다.
“그거 건들지 마-!”
하지만 상자는 이미 내 손에 들어온 후였다.
“건들지 말라고 했지!”
볼프만은 지금까지와 달리 여유 하나 없는 모양새로 내게 달려들었다.
반지가 다시 노란빛을 쏘았지만, 팔로 공격을 막은 볼프만은 멈추지 않고 오직 나만을 노렸다.
날카롭고 검은 손톱이 내 눈을 찌르기 직전.
“고개 숙여.”
등 뒤에서 들려온 천상의 목소리에 나는 반사적으로 고개를 숙였다.
뒤이어 들려온 볼프만의 단말마적인 비명.
그리고 잠잠해진 주위에 고개를 들었을 때.
“…….”
나는 내 눈을 의심했다.
쓰러진 볼프만을 한쪽 발로 밟고 선 미남자.
새벽에 본 은하수를 고스란히 담아 놓은 듯 영롱하게 반짝이는 은발.
모든 것이 고요하게 흘러갔다.
주변의 공기마저 이 광경을 깨고 싶지 않아 숨을 죽인 것 같았다.
“어…….”
저 모습은 어떻게 된 건지, 또 여기는 어떻게 오신 건지.
묻고 싶은 건 많은데 머릿속에서 맴돌기만 할 뿐 입 밖으로 나오지 않았다.
아래를 향하던 고개가 내 쪽으로 들어 올려졌다.
평소보다 투명한, 반짝이는 바닷물을 닮은 푸른 눈동자가 이쪽을 향했다.
“…….”
짧은 침묵.
먼저 입 밖에 낼 말을 찾은 건 폐하였다.
“늦었어?”
나는 입술 안쪽을 꾹 물고 고개를 저었다.
“표정은 왜 그래.”
“…….”
지금 말하면 백 프로 운다.
울면 못생겨진다고.
저 각막 앞에서 울까 보냐.
“미안해. 늦어서.”
“…….”
안 운다. 안 울어.
나는 절대로…….
“신아리.”
“…….”
“말 좀 해 봐.”
“……이름……. 부르는 거……. 반칙…….”
끄윽끄윽 넘어가는 숨을 멈춰보려 했지만, 이게 쉬운 일이 아니다.
그동안 내가 얼마나 서러웠는데.
신성력은 없지. 의지할 사람도, 탓할 사람도 없지.
상황은 언제나 내 능력 밖이었고, 나는 필사적이어야 했다.
거기에 가장 무서웠던 건,
“다시는…… 폐하, 못 보는 줄…… 알았어요.”
연고 하나 없는 이 세계는 내 세계가 아니었다.
폐하의 외모가 내 취향인 걸 슬쩍 놓고 보더라도, 나에게 이 세계와 날 잇는 유일한 끈은 폐하였다.
“신성 제국 젠달의 황제, 알렌드 칸 레오디우스입니다. 성녀.”
낯선 장소, 낯선 사람들 속에서 당황하던 내게 가장 먼저 손을 내밀어준 사람.
그 손이 없었으면 나는 과연 이 세계에서 살아갈 수 있었을까.
“이리 와.”
그때와 조금은 다른 느낌의 폐하가 내게 손을 뻗었다.
내가 그 손을 마주 잡으려 하자, 성큼 다가온 폐하가 내 팔을 당겨 품 안에 날 가뒀다.
“어어……?!”
하아, 깊고 짧은 숨이 폐하의 입에서 흘러나왔다.
“흐헝…….”
“왜.”
“괜히 손 뻗었어요…….”
“뭐?”
내 말에 폐하가 슬쩍 미간을 찌푸리며 내 얼굴을 바라봤다.
“심장, 떨린다고요……!”
“허-.”
생각해보니 서러운 게 대수가 아니었다.
내 심장이 오랜만에 본 폐하를 못 버틴단 말이지……!
이건 내 심장이 나약한 게 아니라 폐하가 너무한 거다.
“머리 뭔데요! 눈은 또 뭐고요!”
은발이라니이-!
무슨 겨울 산에 핀 눈꽃처럼 아련하고 신비로운 이 느낌은 뭔데!
“지금 이 모습, 나중에 꼭 초상화로 박제…….”
“……그건 나중에 얘기하고. 이제 돌아가지.”
폐하가 손가락으로 가리킨 곳엔 이쪽으로 다가오는 데이데른 호가 있었다.
“어? 데이데른 호?”
영문을 모르는 내게 폐하는 대강의 사정을 설명해줬다.
나도 있었던 일을 간단히 말한 후, 우리는 쓰러진 볼프만을 내려다보았다.
“폐하, 저 하고 싶은 거 있어요.”
“성녀가 원한다면, 그렇게 하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