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7화
볼프만은 내 멱살 교환 제안에 눈을 커다랗게 뜨더니, 기뻐하는 얼굴을 했다.
“너구나! 파티쟝!”
“아니, 파티장인데…….”
그리고는 포인을 갑판 위에 집어 던졌다.
포인의 작은 몸이 갑판 위를 데굴데굴 굴렀다.
저 인간이……! 가뜩이나 아픈 애를……!!
“이름이 파티쟝이니? 그래, 너일 줄 알았지!”
볼프만은 조급한 발걸음으로 나에게 다가와 왼손으로 내 멱살을 잡았다.
컥. 내 숨통.
“어떻게 한 거야? 응?”
“영업비밀인데요.”
나는 숨통이 졸려 눈살을 찌푸리며 대답했다.
“비밀, 비밀이라 이거지?”
알고 싶으면 살려주든가.
하지만 저 반쯤 돌아버린 눈을 보니 살려달라고 말하는 즉시 죽여 버릴 것 같았다.
어쨌든, 피가 거꾸로 쏠리는 일이지만, 나랑 사람들의 목숨을 이 인간이 쥐고 있다는 것 또한 부인할 수 없는 일이었다.
“그러면 어쩔 수 없지.”
볼프만은 당장이라도 날 찌를 듯이 검을 뒤로 뺐다.
볼프만의 뒤로 밤하늘에 은하수가 빼곡하게 빛났다.
아, 반짝이는 게 우리 폐하 미모 같다.
‘조금만 기다려요, 폐하.’
내가 반드시 살아서 돌아갈 테니까!
“잘 가. 파티쟝.”
“그런데요, 선장님.”
내 부름에 볼프만의 검이 멈췄다.
나는 일부로 여유로운 척, 입을 열었다.
“똑똑한 부하 필요 없어요?”
“부하?”
“다들 멍청해서 싫다면서요. 내 장래 희망 중 하나가 해적이었거든요? 나 거둬 보는 건 어때요?”
내가 이래 봬도 알바 면접 프리패스 상이라는 소리를 좀 들었다고.
이런 곳에서 자기 어필을 하게 될 줄은 몰랐지만.
볼프만이 코웃음을 쳤다.
“얘, 니가 똑똑한 건 알겠는데 말이지. 내가 널 뭘 믿고 거두니?”
“녹스담 해역으로 갈 거죠?”
별장에서 우연히 들은 샤를 왕녀님이 혼잣말하는 소리.
나는 그때 알게 된 정보를 볼프만에게 속삭였다.
자신만만하게 웃는 것 또한 잊지 않았다.
지금 내 롤모델은 폐하다.
“너, 너! 너 애팅거의 끄나풀이니?”
“아뇨?”
“그런데 어떻게 그걸 알고 있어?”
“왕국군한테 들었어요. 취조실에 잡혀있었거든요. 사유지 좀 침범한 거 두고 내가 젠달의 첩자라나 뭐라나.”
“첩자아?”
깜짝 놀라 똥그래졌던 볼프만의 눈이 의심스럽다는 듯 가늘어졌다.
여기서 선량한 일반인인 척 해봤자 먹히지 않겠지?
자고로 친구를 사귈 땐 공통점부터 공략하는 게 빠른 법이다.
샤를 왕녀님에겐 좀 미안하지만, 나는 내가 겪은 일에 조금의 각색을 보탰다.
“아니, 먹을 거 좀도둑질 좀 했다고 사람을 첩자로 모는 게 말이 돼요?”
‘나는 나쁜 놈이다. 왕국군 놈들이 제일 싫다. 내가 당신 마음을 좀 안다. 적의 적은 아군이지 않으냐.’로 시작해서,
마지막엔 기물파손으로 왕국군을 엿 먹였다는 사이다까지.
볼프만은 생각 외로 내 말을 막지 않고 잘 들어줬다.
이 정도면 됐겠다 싶을 때쯤, 나는 본론을 꺼냈다.
“날 부하로 써주면 정보 알려줄게요. 대신, 저 사람들 목숨 보장해줘야 해요. 다치게 하는 것도 말고요.”
“…….”
볼프만은 내 얼굴에서 눈을 떼지 않고 입을 열었다.
“부하야?”
“네!”
내가 아닌 근처에 있는 해적을 부르는 소리였다.
가장 가까이에 있던 해적 하나가 목청껏 대답했다.
“얘가 지금 뭐라니?”
“위대하신 벤 볼프만 선장님의 부하가 되고 싶다고 했습니다!”
“내가 볼프만이라고 하지 말랬지!”
“죄송합니다! ……님!”
버럭 소리친 볼프만의 얼굴이 붉으락푸르락해졌다.
나는 그런 볼프만을 보며 꿍꿍이속이 있는 폐하의 다정한 미소를 흉내 냈다.
“똑똑한 부하, 필요하지 않아요?”
“…….”
“나는 선장님 이름 한 번도 안 말했는데.”
***
오전 6시경.
데이데른 호는 예정대로 선박장에서 출항 준비를 하고 있었다.
“야, 헨켈.”
초비는 같은 상단 갑판에 있는 헨켈을 불렀다.
그녀는 바닥에 앉아 얇은 철심 두 개로 길잡이의 눈을 휘적이는 중이었다.
길잡이의 눈은 신성력 발생기 위에 얹은 황제의 반지와 맞물려 있었다.
하단 갑판에서 눈을 떼지 않던 헨켈이 힐끔 그녀에게 시선을 줬다.
“수리에 무슨 문제가 생겼나?”
“황제 폐하께 연구소 하나 더 지어달라고 하면 해주실 거 같지 않냐?”
뜬금없는 소리에 헨켈은 그녀의 하는 말을 멀뚱히 들었다.
초비는 손을 멈추지 않고 말했다.
“나 충성계약 한 번 더 맺는다고 할까? 내가 생각을 잘못한 거 같아. 폐하께서 이렇게 돈을 잘 쓰시는 성향인 줄 알았으면, 빈후드 것들 조지는 거 말고 물질적인 걸 말했어야 했는데……!”
또 헛소리군.
헨켈은 고개를 슬쩍 젓고는 시선을 다시 아래로 뒀다.
“야, 너는 충성 계약 조건 뭐로 맺었어? 모두가 평화롭게 살 수 있는 제국을 만들어 주세요. 그딴 거 말한 건 아니지?”
“…….”
“헐, 진짜? 그러면 우리 다른 걸로 바꿔 달라고 하자.”
“……고치기나 해라.”
재미없는 놈.
초비는 투덜거리며 헨켈을 따라 하단 갑판으로 눈을 돌렸다.
일정하게 세운 난간의 틈 사이로 그림 같은 한 남자가 보였다.
바다를 바라보는 뒤태마저 완벽한 자신들의 황제.
“무슨 여기 바다도 폐하가 먹은 것 같네.”
사람들의 이목을 안 끌어보겠다고 로브도 입고 염색약도 먹었다지만.
초비가 볼 땐 다 소용없는 짓이었다.
그렇게 하면 뭣 하나.
존재 자체가 이목을 끌려고 작정한 사람인데.
안 그래도 새벽에 후드를 벗은 일로 한바탕 소동이 일어났었다.
선원들은 황제의 외모를 보고 자신들의 새로운 주인이 왕족인 게 분명하다며 축배를 들고 난리가 아니었다.
“쟤도 불쌍하지. 쇼웬인가. 뭔가.”
초비는 한쪽을 가리켰다.
맞은편에서 머쓱하게 황제에게 다가가려다 말기를 반복하는 쇼웬이 보였다.
새로운 주인한테 잘 보여야겠다는 생각과 제 자존심이 속에서 싸움하는 중인 듯했다.
“약속했던 출항 시간까지 성녀님이 오실까?”
헨켈이 이번엔 고개를 아예 초비에게로 돌렸다.
호위 기사인 그가, 황제가 있는 갑판이 아닌 이곳에 있는 이유는 초비 빈후드의 감시를 맡았기 때문이었다.
그녀의 수리가 원만하게 진행되고 있는지를 확인하기 위한.
“뭐. 왜.”
“손이 놀고 있군.”
은근슬쩍 부리려던 농땡이가 들켰다.
초비는 뗐던 엉덩이를 다시 바닥에 붙이며 수리 기구를 잡았다.
“너 솔직히 말해 봐. 에본 하이벤이랑 너랑 성녀님 좋아해?”
“무슨 의미지.”
“그냥, 뭐. 너네도 사람한테 쉽게 마음 주고 그러는 인간들은 아니니까.”
“존경한다. 너는.”
“나?”
“에본이 그러더군. 네가 성녀님을 싫어할지도 모른다고. 정말 그런가?”
초비는 대답을 망설였다.
평소처럼 능청스럽게 넘길 수도 있는 질문이지만, 저 농담을 모르는 헨켈에게는 그러기가 힘들었다.
“……싫어하는 건 아니야. 재수 없는 귀족 놈들이랑은 다르신 거 같기도 하고.”
사실 초비도 성녀를 어떻게 생각하는지 뭐라 콕 집어 말할 수 없었다.
자신도 정상이라 말할 수는 없지만, 성녀도 이상했다.
나라 하나 휘두를 수 있는 그런 지위에 있으면서도 조각상 같은 쓸데없는 일에 열을 올리지 않나.
다른 사람 생각한답시고 빤히 얻을 수 있는 이익을 미련 없이 포기하지를 않나.
“몰라. 어쨌든 지금은 성녀님을 찾아야 내 자유가 보장되니까. ……아씨, 이게 왜 안 돼?!”
날이 밝아 가는데 이 고물은 고쳐질 생각은 안 했다.
답답한 마음에 초비는 버럭 성을 냈다.
철썩.
갑자기 불어온 커다란 파도에 데이데른 호가 휘청인 건 그때였다.
중심을 잃은 초비의 손이 철심을 길잡이의 눈에 꽂은 채 삐끗했다.
“으, 으악. 안 돼! ……되네?”
황제의 반지에서 나온 신성력을 받은 길잡이의 눈이 서서히 눈꺼풀을 들어 올렸다.
초비는 벌떡 일어나 난간에 붙어 알렌드에게 외쳤다.
“폐,! 아, 아니. 어! 그! 고쳤습니다! 고쳤어요! 이 초비가 해냈습니다!”
“…….”
그녀의 발명품의 절반이 이런 식으로 성공했단 걸 아는 헨켈이 초비를 묵묵히 바라봤다.
***
챙. 챙.
샤를은 쏟아지는 공격에 대응하느라 정신이 없었다.
기습이었다.
군함을 끌고 벤 볼프만의 배를 감시하며 붙어가는 중에, 갑자기 쏘아온 포격.
정신없는 틈을 타, 주변 지형을 이용해 몰래 접근한 해적 놈들이 배를 타고 올라와 갑판에서 백병전을 벌였다.
어디서 정보가 새 나간 건지.
“샤를 애팅거! 널 죽이는 건 나다!”
앞에서 날아오는 공격을 막으려는 그녀의 뒤로 해적의 검이 날아왔다.
샤를은 가벼운 몸놀림으로 양쪽의 공격을 흘려 넘기고 해적들을 베었다.
순식간에 둘을 제압한 샤를에게 다시 공격이 날아왔다.
‘빨리 찾으러 가야 하는데.’
나침판 모양의 추적기가 함장실에 있었다.
배가 크게 흔들릴 정도의 연달은 포격에 추적기를 챙길 틈이 없었다.
“함장님! 총 다섯 척입니다!”
레콩드가 해적들을 베며 다가와 샤를에게 보고했다.
군함을 공격한 해적선은 모두 다섯 척.
벤 볼프만의 전력이었다.
하지만 보니아 왕국군에게 큰 문제가 될 건 없었다.
그들은 수적 우세로 밀고 들어오는 해적들을 막고, 공격하고, 잡기를 반복했다.
아침 해가 하늘을 환히 밝힐 때쯤이 돼서야, 왕국군은 해적들을 모두 제압했다.
‘생각보다 더 쉽게 끝났네.’
샤를은 검은 제 검집에 집어넣었다.
녹스담 해역까지 안 가고 여기서 처리한 게 다행일지도.
추적기에 나온 성녀의 위치는 여기와 멀지 않은 해안가였다.
한동안 움직이지 않은 것을 봐 거기에 임시 둥지를 만든 모양이었다.
‘이제 갈 수 있겠어.’
샤를은 곧 만날 아리를 떠올리며 노래를 흥얼거렸다.
하지만 이내, 그녀는 두통이 일 정도의 짜증을 느껴야 했다.
“이게 다야?”
샤를은 미간을 찌푸리며 군함의 넓은 갑판 위에 무릎을 꿇고 결박한 해적들을 바라봤다.
그녀는 난감한 기색으로 서 있는 자신의 부관, 레콩드를 향해 물었다.
“벤 볼프만은 어디에 있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