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6화
초비 빈후드는 제 인생이 보이지 않는 손에 휘둘리고 있다고 굳게 믿었다.
‘젠장.’
제 맘대로 되는 게 하나 없었다.
가문도, 장래도, 인간관계도, ……제 연구 결과도.
“…….”
황제와 헨켈과 함께 배를 타고 보니아 왕국으로 향한 것까진 좋았다.
황제에게 성녀를 찾아서 데리고 돌아가면 며칠은 연구실에 틀어박혀 있게 해준다고 약속받았으니까.
문제는.
“고장?”
흠칫.
알렌드의 말에 초비가 어깨를 들썩였다.
보니아로 향하는 여객선 안.
하선이 얼마 남지 않았으니 도착한 후의 계획을 짜기 위해 황제의 객실로 모였다.
그런데. 하필이면. 중요한 이때.
‘하, 이 망할 고대 고물~~~!’
초비는 테이블 위, 길잡이의 눈을 바라봤다.
저 감긴 눈꺼풀이 이렇게 원망스러울 수가 없다.
‘고장이라니, 고장이라니!’
눈치 없는 저 펜던트를 바닥에 던져서 발로 퍽퍽 밟기라도 해야 속이 시원할 텐데.
‘후……. 빌어먹을 인생.’
초비는 헤헤 웃으며 고개를 들었다.
“이게 왜 작동이 안 될까요……?”
“…….”
그 질문에 대답할 수 있는 사람은 초비 말곤 없었다.
황제가 고쳐보라며 길잡이의 눈을 제게 맡긴 지가 2년.
그동안 길잡이의 눈을 연구한 건 초비 혼자뿐이었으니까.
‘원인이 뭐야, 대체?!’
그러니 더 미치고 팔짝 뛰겠다.
고장원인을 모르는데다가 책임은 온전히 제 것이니.
알렌드는 안절부절못하는 초비를 보며 속으로 한숨을 쉬었다.
“연구소장, 알고 있겠지만 그게 없으면 성녀를 찾을 수 없네. 시간을 주면 고칠 수는 있나?”
당장 책임을 묻지는 않을 테니 고쳐내라는 소리였다.
명줄이 늘어나는 소리에 초비는 재빨리 고개를 끄덕였다.
“넵. 최선을 다해 고쳐보겠습니다.”
“최대한 빨리 부탁하네.”
그렇다고 마냥 길잡이의 눈이 고쳐지기만을 기다릴 수는 없었다.
세 사람과 신분을 위장해 따라온 기사 몇몇은 보니아의 수도, 라벨 곳곳에 퍼져 성녀를 찾아보기로 했다.
알렌드와 헨켈, 초비는 길잡이의 눈이 마지막으로 가리킨 거리로 향했다.
상점과 술집들이 즐비한 번화가.
그곳을 시작으로 낮부터 밤까지 성녀를 찾았지만 별다른 수확이 없었다.
그러다 들어간 한 주점.
“……리리랑!”
웬 뱃사람 하나가 얼굴을 붉히며 성녀가 가명으로 쓰던 이름을 말하고 있었다.
리리. 흔한 이름이었지만, 알렌드의 주의를 끈 것은 남자의 얼굴이었다.
잘생겼군.
알렌드는 주저 없이 걸어가 남자의 팔을 붙들었다.
사랑이니, 고백이니.
거슬리는 단어들이 있었지만, 우선은 이 자가 말하는 이가 성녀인지부터 확인해야 했다.
“리리라는 그 사람의 생김새가 어땠지. 오디트리아 대륙인의 외모와 달랐나? 금발의 젊은 여자였나?”
“…….”
쇼웬은 알렌드를 못마땅하게 쳐다보다 입을 열었다.
“이국적으로 생기긴 했는데, 금발은 아니야. 갈색 머리였거든.”
성녀다.
쇼웬의 팔을 붙든 알렌드의 손에 힘이 들어갔다.
“그래서, 지금은 어디에 있지.”
“윽……. 모, 몰라.”
“모른다?”
“리리랑은 어제 처음 본 사이고. 우리랑 행선지가 같아서 데려다준다고 한 것뿐이야.”
“행선지?”
“젠달로 간다고 했어. 근데 그쪽, 물어보는 처지면서 너무 재수 없는 거 아니야? 적어도 이 손은 좀 놓고 물어보라고……!”
쇼웬은 남은 손으로 제 팔을 잡은 알렌드의 팔을 붙들었다.
요란한 소리가 난 건 그때였다.
쇼웬은 고개를 돌렸다.
남자의 일행이 있는 테이블.
남자보다 체격이 큰 자가 일어나서 이쪽을 노려보고 있었다.
“……감히 ……께 저런 언행을…….”
“야, 참아. 참아. 쟤는 뭘 알겠냐.”
초비의 만류에 헨켈이 검을 뽑으려던 손을 멈췄다.
알렌드의 옅은 빛의 푸른 눈동자가 쇼웬을 잠시 응시했다.
그는 쇼웬을 잡은 손을 떼고, 입을 열었다.
“배의 선장이 누구지.”
“날세 만.”
아들이 힘에서 밀리는 걸 한쪽에서 흥미롭게 지켜보던 데이데른 호의 선장, 데른이 대답했다.
‘호오.’
데른은 술기운에 딸꾹거리면서도 제게 다가오는 남자를 보고 감탄했다.
그도 이런저런 세상을 겪으며 세월을 맞다 보니 사람 보는 눈이 꽤 좋았다.
‘쇼웬 놈이 질 만 하구만. 보기 드문 인잴세.’
어제 만난 그 아이랑 연이 있나.
하긴 그 아이도 예사 인물은 아니었지, 엉뚱한 면이 있긴 했지만.
어느새 데른 앞으로 다가온 알렌드가 테이블을 짚었다.
이어진 그의 말에 데른은 취기가 싹 달아나는 것을 느꼈다.
“배와 당신들. 얼마면 되나?”
***
“…….”
“함장님?”
샤를은 저를 부르는 소리에 고개를 들었다.
그녀의 전속부관인 레콩드가 지시봉으로 해도 한 군데를 짚은 채 샤를을 보고 있었다.
‘아, 보고 받던 중이었지.’
새벽 2시경.
샤를은 함장실에서 레콩드에게 해적들의 위치를 보고받고 있었다.
‘따분해.’
상석에 앉은 그녀는 습관처럼 엄지로 나침반의 뚜껑을 밀어 올렸다.
일반적인 나침반과는 달리, 바늘이 없고 좁은 격자무늬 위에 기하학적 문양이 그려진 것이었다.
그 위에서 붉은 점 하나가 반짝였다.
“요즘 자주 보시는군요. 그 나침판.”
샤를은 생긋 웃었다.
“중요한 걸 표시해놨거든. 오늘 일이 끝나면 찾으러 가려고.”
“그럼 빨리 소탕해야겠군요.”
레콩드는 비장한 얼굴로 보고를 이어갔다.
“말씀드린 대로 세 척은 위치를 확보했습니다. 놈들의 목표물은 녹스담 해역을 지나 도이탐으로 가는 무역선 두 척.”
레콩드의 손을 따라 배 모형들이 해도 위에서 움직였다.
“함장님께서 계획하신 대로 저희는 세 척 중 벤 볼프만의 배를 쫓을 겁니다. 나머지 해적선의 위치를 미리 알아내기만 한다면 무역선을 덮치기 전에 저희 쪽에서 먼저 놈들을 소탕할 수 있을 듯합니다.”
레콩드가 지시봉을 접었다.
보고가 끝난 것이었다.
“흐응. 점심 먹기 전까지는 끝날까?”
“지금껏 함장님의 계획대로 됐으니 남은 과정도 수월하게 진행될 것 같지만……. 그래도 거물이니깐요.”
“그렇지. 거물이지.”
샤를은 속으로 투덜거렸다.
루이드가 있을 때나 귀찮게 굴 것이지. 하필이면 이때.
“산하에 배 다섯 척을 거느린 벤 볼프만 해적단…….”
샤를은 중지와 엄지로 가까이 있는 배 모형을 튕겼다.
해적선 역할을 하던 배 모형이 테이블 아래로 떨어져 바닥을 굴렀다.
‘짜증나네.’
***
“난 니들같이 팔팔한 것들이 좋아.”
끼익. 끼익.
챙이 넓은 모자를 쓴 해적이 짧고 넓은 외날 검을 위협적으로 휘두르며 갑판 위를 걸어 다녔다.
낡은 갑판에선 걸을 때마다 못이 흔들리고 나무판자가 휘는 소리가 났다.
“요즘 노예상들이 죄다 눈이 높아져서 말이야. 비실비실한 것들은 값도 제대로 안 쳐주거든. 그렇지? 부하야?”
“넵! 그렇습니다! 볼프만 선장님!”
“멍청한 놈! 그렇게 말해버리면 이것들이 내가 볼프만인 걸 알잖아!”
“아, 죄송합니다! ……님!”
“관둬라. 너 같은 멍청이가 내 부하라니.”
볼프만은 걸음을 멈추고 한 손으로 얼굴을 가린 채 탄식했다.
“니들도 봤지? 내 부하 놈들이 다 이렇게 멍청하다니까.”
이리를 닮은 그의 눈이 난간을 등에 지고 일렬로 선 우리를 한 명씩 짚었다.
해적선은 해안에 정박해 있긴 했지만, 한쪽은 날카로운 암초 지대였다.
그 위로는 파도가 세차게 치고 있었고.
만약 우리가 난간 아래로 떨어진다면, 저 무시무시한 암초에 몸이 사정없이 찢길 게 분명했다.
“나는 지금까지 니들도 멍청한 줄 알았거든? 노예들은 원래 생각이 없잖아. 팔려 가라면 팔려 가고, 죽으라고 하면 죽고.”
“…….”
“내가 니들이 왜 갑자기 똑똑해졌을까 생각을 해봤는데 말이야. 니들 중에 똑똑한 놈이 하나 껴있는 거 같아.”
볼프만은 검 끝을 우리에게 겨눴다.
“그래서, 누가 주도했어?”
‘……어쩌지.’
갑판 아래에서 급 결성된 해적선 탈출 파티.
갇힌 사람 전원이 참가했고, 우리는 꽤 환상의 호흡을 자랑했다.
모두 비명을 지르며 혼자 남은 해적1을 갑판 아래로 유인.
내가 미친개처럼 사람들을 물어뜯는 흉내를 냈고, 나한테 물린 사람들이 발작을 일으키는 연기를 했다.
남은 사람들은 철장 속에서 해적1을 향해 애원했고.
“살려줘요-!”
“우리, 우리 상품이잖아요!”
“물리면 병에 걸리나 봐! 여기선 다 죽어……!”
“아, 아씨. 저건 또 뭐야…….”
해적1은 허리춤에서 주섬주섬 열쇠를 꺼내 철창을 열었다.
그리고 포인과 아이를 제외한 우리는 전원 미친개가 되어 해적1에게 달려들었다.
“이 자식!”
“감히 우리를 속여!”
“으아아악!”
“3골드에 영혼을 파냐! 세이칸 신께서도 네 영혼은 안 받으실 거다!”
거기까지는 쉬웠다.
해적1은 너덜너덜해지고 우리는 의기양양하게 갑판 위로 나왔다.
그대로 탈출 성공이라고 생각했지만,
“노예들이네? 바람 쐬러 나왔구나?”
처음 보는 해적 무리가 배 위로 올라오는 중이었다.
“누구…….”
“내 배에 왕국군 놈들이 붙어서 말이야. 여기로 이사 왔어.”
그렇게 다시 잡혔지.
“…….”
나는 힐끔 파티원들을 살폈다.
다들 겁에 질려 사색이 되어있었다.
이전이면 몰라도, 내가 파티장이 된 이상…….
“주도한 놈은 어떻게 하실 겁니까! ……님!”
“당연히 죽여야지, 이 멍청아.”
……조금 몸을 사려볼까?
그래. 나는 폐하를 만나야 하고, 또 만나야 하니까!
“그러니까 말해 봐. 누군데? 주도한 애. 걔만 죽일게.”
“…….”
“오호, 니네 보기보다 의리가 좋구나? 놀랍네. 말을 안 할 건가 봐?”
솔직히 나도 놀랐다.
누군가는 진작에 나서서 내가 주도했다고 말할 줄 알았는데.
“그러면 나올 때까지 버리는 수밖에.”
버려? 뭘 버려?
내가 말뜻을 생각하는 것보다 볼프만이 움직이는 게 더 빨랐다.
볼프만은 순식간에 내 품에서 포인을 낚아채 멱살을 잡고 팔을 난간 밖으로 뻗었다.
암초 지대 위, 포인이 공중에 대롱대롱 매달렸다.
“우선은 상품 가치가 제일 떨어지는, 얘부터.”
“……녀님…….”
열이 올라 몽롱해진 포인의 눈에 눈물이 고였다.
볼프만은 멱살을 잡은 손의 손가락을 하나씩 펼치기 시작했다.
“잘 가. 저주받은 아이.”
“……잘 가긴.”
뭘 잘 가.
나는 입속말로 중얼거렸다.
방아쇠가 당겨진 듯 머리로 피가 확 쏠리는 기분이 들었다.
윅도 그렇고, 인신매매단 해적들도 그렇고, 이 사람도 그렇고.
왜들 이렇게 사람 목숨을 쉽게 보는지 모를 일이다.
그것도 자기보다 약한 사람 한정으로.
“저기요, 미역 줄기 머리 아줌마.”
나는 한 발자국 앞으로 나갔다.
볼프만이 마지막 남은 검지와 엄지를 떼지 않은 채 고개를 돌렸다.
“내가 파티장이니까 걔 멱살, 내 멱살이랑 교환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