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5화
거친 바다의 의적.
자유를 위해 살아가지만, 때론 불의를 참지 못해 맞서 싸우는 이들.
이게 무슨 소리냐 하면, 내가 해적에게 갖고 있던 로망이었달까.
그리고 그 로망은 한 시간 전에 산산이 부서졌다.
‘내가 동경했던 해적이 이럴 리가 없어-!’
해적은 영화나 만화로만 접한 내게, 이건 마주 하고 싶지 않은 현실이었다.
맹수 우리 속에 갇힌 나는 철장 밖의 해적1을 절망스러운 눈으로 바라봤다.
“해적 현실판이 인신매매단이라니이…….”
“그럼 잘들 지내보라고.”
얼굴에 큰 흉터가 있는 땅딸보 해적1은 철장에 자물쇠를 채웠다.
그런 후 콧노래를 부르며 사다리를 타고 갑판 위로 유유히 올라갔다.
타악.
천장에 달린 나무문이 닫히며 어둠이 내려앉았다.
나는 철장에 등을 기대고 바닥에 주저앉았다.
‘으으. 또 이상한데 휘말려 버렸네…….’
힐끔 시선을 올리니 우리 속에 같이 갇힌 사람들의 실루엣이 어둠 속에서 희미하게 보였다.
해적1과 들어왔을 때 확인한 인원은 기존에 갇혔던 일곱과, 나와 함께 새로 들어온 다섯.
나까지 총 열세 명이었다.
희미한 숨소리, 불안정한 호흡, 마른기침…….
멀쩡한 사람들도 있었지만, 상태가 안 좋은 사람들이 몇 있었다.
그중 제일 심각한 건 역시…….
나는 내 옆에 쓰러져 쌕쌕거리는 아이의 이마를 손으로 짚었다.
불덩이같이 뜨겁다.
“성녀……, 성녀님…….”
“포인, 괜찮아?”
***
내가 왜 가파른 암벽 뒤, 외진 해안가에 불법 정박한 해적선에 잡혀있는가.
쇼웬과 헤어지고.
골목 안에서 들렸던 ‘……성녀님.’ 하던 소리.
익숙한 호칭에 혹시 젠달에서 날 찾는 사람이 온 것은 아닐까 생각했다.
그래서 설마 하는 기대감을 안고 골목 안으로 들어갔는데,
“뭘 봐? 꺼져.”
험상궂게 생긴 남자가 이를 드러내며 을렀다.
아치형의 뼈대를 일정 간격으로 세우고 그 위에 천을 씌운 수상한 마차.
그 마차 앞에서 흉흉한 분위기를 풍기는 세 명의 시선이 내게 꽂혔다.
아쉽게도 처음 보는 얼굴들이었다.
음, 엮이면 별로 좋지 않겠군. 돌아가서 선장님네 안주나 뺏어 먹자.
내일이면 젠달로 출발하는데 굳이 수상쩍은 일에 관심을 두고 싶지 않았다.
오지랖 부리기엔 지금 내 몸 하나 건사하기도 힘들…….
“성녀……님.”
몸을 틀려는 찰나, 성능 좋은 내 귀에 다시 ‘성녀님’하는 소리가 잡혔다.
마차 안에서 들리는 미약한 어린아이의 목소리.
다른 사람의 이름을 부르는 거면 몰라도, 성녀는 나잖아.
으. 그냥 지나칠 수가 없었다.
“저 안에 확인 좀요.”
성큼성큼 걸어가 마차의 천을 젖혔더니, 요 며칠 익숙해진 포인의 오렌지색 머리통이 바닥에 쓰러져 있었다.
그리고 무기력하게 앉아있는 사람들까지.
그들의 눈에 희망의 빛이 돌았다가, 내 모습을 확인하고는 사그라들었다.
무장한 기사도 아니고.
평범한 내가 본인들을 구해줄 만한 사람이 못 된다는 걸 빠르게 판단하고 단념한 거겠지.
옳은 판단이십니다.
뭐 사정은 모르지만, 마차 안에 있는 사람 모두를 돕기엔 내 능력이 한참 부족했다.
반지라도 사용할 수 있으면 어떻게 해 보겠는데, 무리.
쿨타임이라도 있는 건지 별장을 나온 후부터 도통 반응이 없었다.
어쨌든, 옹기종기 모여 있는 사람들과는 달리, 포인은 혼자 떨어져 죽을 둥 살 둥 하고 있었다.
아무도 열이 들끓는 포인을 신경 쓰지 않는 상황.
이대로 두면 애 죽겠다.
일단 구해줘야겠다는 생각에 얘 좀 데리고 간다고 했더니,
“니가 얘 보호자야? 보호자면 애 곁에 있어야지. 흐흐.”
라고 낄낄거리며 날 마차 안에 던져 넣었다.
내가 마차 안을 확인했을 때부터 이럴 생각이었겠지-!
어쩐지 안을 계속 보고 있는데도 안 말리더라니.
그렇게 마차 안에서 바깥의 대화 내용을 엿들었는데,
인신매매부터 약탈까지. 돈 되는 건 뭐든 하는 해적들이었다.
어쩐지 나 마차 안에 넣어놓곤 팔아먹을 노예 하나 더 생겼다고 좋아하더라…….
내 인생에 해적들이랑 얽히는 일이 생기다니.
“집 나가면 개고생이라니까.”
나는 포인의 머리를 들어서 내 허벅지 위에 올려놓았다.
“성녀님…….”
포인의 입에서 앓는 소리와 함께 성녀님 소리가 흘러나왔다.
처음엔 내 정체를 아나 싶었는데, 그건 또 아닌 것 같은 게.
내가 손을 잡고 말을 걸어도 포인은 날 안중에도 두지 않는단 말이지.
아무래도 성녀님, 성녀님. 하는 건 포인의 말버릇인 듯 했다.
내가 성녀인 걸 알아서가 아니라, 아플 때 의지할 만한 대상을 찾으며 되뇌는.
포인, 다음부턴 성녀님 말고 왕녀님을 찾으렴. 흑흑.
“이마가 펄펄 끓네.”
이마 말고도 포인의 온몸이 열 덩어리였다.
혹시 내가 도망친 것 때문에 왕녀님한테 혼났는지, 해적들한텐 왜 잡힌 건지.
포인에게 묻고 싶은 게 몇 가지 있었지만, 대화할 상태가 아니니.
“독감이라도 걸렸나…….”
“저주야.”
나는 고개를 들었다.
어둠에 익숙해진 내 눈은 목소리의 주인을 금세 찾을 수 있었다.
품에 아이를 안은 여자였다.
그녀는 지친 기색으로 입을 열었다.
“신성력을 가지고 태어났음에도 저주받은 몸이 신성력을 거부하는 거지.”
“저주받은 몸?”
“대륙 너머에서 온 모양이구나. 여기서 이건 동네 꼬마애들도 아는 이야긴데.”
“맞아요. 제가 다른 곳에서 와서. 자세히 들려주실 수 있어요?”
상태를 알고 있으면 나중에 포인을 치료할 때 도움이 될까 싶어 물어봤다.
“좋아. 여기선 달리 할 것도 없으니.”
“감사합니다.”
“……저런 아이들은 몸이 신성력을 버티지 못하는 시기가 오면 주기적으로 끔찍한 열병이 와. 열을 가라앉히려면 신관에게 가서 안정화를 받아야 하는데-.”
여자는 말을 잠시 멈추고 조소했다.
“우리 같은 것들은 감히 엄두도 못 낼 비싼 비용이지. 시한부 인생이나 다름없어. 아마 걔도 이번이 마지막 열병이겠네. 이렇게 붙잡혔으니.”
“마지막요?”
여자는 끅. 하고 숨넘어가는 소리를 흉내 냈다.
“죽는다고.”
“그럼-.”
“멍청한 게지. 왜 쓸데없이 젠달에 가려고 해서 이 사달을 냈는지.”
옆에서 대화를 듣고 있던 노인이 끼어들었다.
“포인이 젠달에 가려고 했었다고요? 왜요?”
“왜긴. 젠달이 성녀님을 소환했다는 이야기도 모르느냐.”
“그건 알아요.”
제가 성녀거든요.
하지만 말해봤자 성녀 사칭하는 미친 애 취급일 게 분명했다.
조용히 하자. 나.
“저 멍청한 것이 성녀님께 부탁드리면 제 병을 치료해 줄 거라면서 젠달에 가려고 했지.”
노인은 성을 내며 일방적으로 이야기를 시작했다.
듣자 하니, 포인은 날 만나러 젠달에 오려던 모양이었다.
3골드에 젠달까지 데려다주겠다는 말을 믿고 뱃삯을 낸 뒤 해적1을 따라왔는데,
사실은 그게 인신매매단 해적이었다. 라는 이야기였다.
“할아버지도 그렇게 당했어요?”
“나, 나만 그런 줄 아느냐, 저놈도. 이놈도. 그렇게 당했지.”
“보니아 왕국은 타국 출신이 살기 힘든 나라라서. 그래서 젠달에서 새롭게 시작하려고 했어. 거기는 민족적 차별은 없다고 들었으니까. ……이렇게 노예 신세가 될 줄은 몰랐지만.”
여자의 마지막 말에 우리 안에 절망감이 맴돌았다.
중간중간 흐느끼는 소리도 있었다.
“…….”
나는 포인의 머리를 조심스럽게 바닥에 두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덜컹덜컹.
“튼튼하네.”
양손으로 철창을 잡고 흔들었다.
자물쇠가 걸린 철창문은 열쇠로 여는 것 외엔 다른 방법이 없어 보였다.
“……뭐 하는 거야?”
여자가 의아함을 품고 물었다.
나는 잠자코 고개를 들어 천장을 올려다봤다.
“배 잘 지켜라~”
“정말 나만 두고 간다고?”
“제비를 그렇게 뽑은 건 너잖아.”
“아침에 올 테니까 밤에 잠들어 버리지 말고 똑바로 지켜.”
“야, 빨리 가자. 벌써 자정이다. 자정. 내 술 다 사라진다고-.”
갑판에서 해적들이 낄낄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밤에 벌이는 술판은 인신매매단인 해적도 예외가 없는 모양이었다.
‘자정이라고?’
데이데른 호의 출항은 오전 7시.
젠달로 가려면 7시간 안에 선박장으로 가야 했다.
일이 좀 꼬이긴 했지만, 나는 그 배를 반드시 타야 한단 말이지.
“……저기요.”
나는 뒤를 돌아봤다.
“해적선 탈출 파티 멤버 구합니다.”
“……?”
“하실 분?”
***
“쇼웬. 아직도 기다리냐?”
선원 하나가 주점의 나무문을 열고 들어오는 쇼웬에게 물었다.
자정이 넘은 늦은 시간.
데이데른 호의 선원들과 몇몇 손님들만이 남은 주점은 한산했다.
그렇다고 조용한 것은 아니었다.
술이 오른 이들이 왁자지껄 떠들고 있었으니.
쇼웬은 제 자리에 앉으며 선원의 물음에 대답했다.
“걱정되잖아요. 배고프다고 따라온 애가 갑자기 사라졌으니까.”
“나타난 것도 갑자기 나타났잖냐. 마음이 바뀌어서 떠났을 수도 있지. 인생이 그런 거다, 인마. 술이나 마셔.”
쇼웬은 선원이 제 쪽으로 밀어주는 술잔을 떨떠름하게 잡았다.
“그래도 걔는 떠날 때 말 한마디 없이 갈 애가-.”
“쯧쯧. 사랑이네. 이거.”
술이 올라 얼굴이 빨개진 다른 선원이 히죽거렸다.
“얘들아! 우리 도련님이 사랑에 빠지셨단다!”
“아, 아니라고요!”
“아뉘라고요~ 이 자식 얼굴 빨개진 거 봐라. 크크크. 사랑이다, 사랑!”
휘익, 휘익.
선원들은 휘파람을 불어가며 쇼웬을 놀리기 시작했다.
쇼웬은 귀 끝까지 붉어진 얼굴로 자리에서 일어나 선원들에게 소리쳤다.
“아니라니까요! 제가 무슨 리리랑!”
“라앙? 리리라앙?”
“벌써 고백했냐? 이야, 쇼웬, 그렇게 리리가 좋냐? 어?”
“다들 그만……뭐야?”
쇼웬은 인상을 쓰고 고개를 돌렸다.
누군가 제 팔을 붙들었다.
로브를 입고 후드까지 써 외향이 보이진 않았지만, 저보다 키가 크고 체격이 좋은 걸로 봐 어딘가의 기사 나으리 정도 되는 것 같았다.
벽과 가까운 테이블에서 남자와 똑같은 로브를 입은 두 사람이 안절부절못하며 이쪽을 바라보고 있었다.
단독행동이라 이건가.
“왜 남의 팔을 함부로 잡고 그래?”
쇼웬은 기분 나쁜 티를 내며 제 팔을 빼려고 했지만 쉽지 않았다.
‘무슨 힘이…….’
힘에 있어 누구한테도 지지 않을 자신이 있는 쇼웬이었다.
술에 취하지도 않았는데, 제가 힘에서 이길 수 없다니?
쇼웬은 침을 꼴깍 삼켰다.
‘일반인이 아니다.’
흘러나오는 기운마저 범상치 않았다.
이유는 알 수 없었지만, 제게 희미한 살기마저 보이는 듯했다.
쇼웬의 등이 순식간에 축축하게 젖었다.
후드 속에서 낮고, 깊은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리리’라고 했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