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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략 황제의 외모가 내 취향이라 곤란하다-34화 (34/150)

34화

“화려하게 도망쳤네.”

샤를은 입구가 뻥 뚫려 안이 훤히 들여다보이는 방을 보고 중얼거렸다.

예상은 했지만, 주인을 잃은 새장은 주인을 품기 전보다 더 볼품없었다.

샤를은 뒤를 돌아봤다.

두 손을 공손히 모으고 고개를 푹 숙인 채 떨고 있는 포인이 있었다.

“사라졌구나.”

“…….”

“내가 아끼는 아이라고 말한 것 같은데.”

포인의 떨림이 심해졌다.

샤를은 제 손에 턱을 괴며 한숨을 쉬었다.

“결계를 어떻게 해야 한담.”

“…….”

“어쨌든. 그동안 고생했어.”

샤를의 손을 떠난 금화 두 닢이 포인의 손에 쥐어졌다.

샤를은 잔뜩 겁먹은 눈동자를 마주하며 생긋 웃었다.

“멀리 도망가지는 못했을 테니, 찾게 되면 꼭 내게 알려주렴.”

***

“폐하께 보고드릴 일이 있습니다.”

약 두 달 전,

황실 예배당을 담당하는 라울 신관이 은밀하게 뵐 일이 있다며 황제를 찾아왔다.

라울이 안내한 곳은 예배당 단상의 왼편.

휘장으로 가려진 숨겨진 공간이었다.

그곳에선 검은색으로 물든 이드만타 측정기가 웅웅 소리를 내며 작동하고 있었다.

“이드만타 측정기가……. 열흘이 넘도록 꺼지지 않습니다. 폐하께서도 아시겠지만, 이건…….”

라울은 난감한 기색이었다.

작동 이상이 생겼다면 기계의 문제를 생각해보면 될 일이지만.

이드만타는 특별한 광물이었다.

세이칸이 인간과 소통하던 시대에 하사한 완전무결한 신의 광물.

인간이 인위적으로 만든 신성석과는 그 근본부터가 달랐다.

그렇기에 이드만타로 만든 측정기가 고장 났다고 하는 것은, 신성 모독과도 다름없는 일이었다.

대충 상황을 이해한 알렌드가 라울에게 물었다.

“짐작 가는 일은 있는가?”

“그것이……. 예배당의 비밀통로가 한 번 움직인 흔적이 있습니다.”

“기사상 뒤의 통로 말이군.”

“그리고…….”

라울은 제 손을 이드만타 측정기에 얹고 신성력을 불어넣었다.

검은 측정기 표면에 하얀색 문자가 떠올랐다.

[새로운 신성력의 양을 측정할 수 없는 상태입니다.]

[측정 결과 : - ]

“신성력을 측정하려고 하면 이런 문구가 뜹니다.”

“…….”

알렌드는 나열된 문자들을 주시했다.

처음에 나타난 문구는 그도 처음 보는 것이었지만, 두 번째 문구는 근래에 본 것이었다.

성녀의 신성력을 측정할 때 나온 결과치.

침묵이 일었다.

둘 다 쉽사리 입을 뗄 수 없었다.

“폐하, 어쩌면-.”

“신관.”

알렌드는 라울의 말을 저지했다.

이번 일에 성녀가 연관돼 있을지도 모른다는 의혹은 섣부른 이야기였다.

‘성녀의 신성력 측정 결과가 잘못됐을지도 모른다.’라는, 머릿속을 스쳐 지나간 제 생각마저도.

“지금은 확실한 게 아무것도 없어.”

“이 늙은이가 실언할 뻔했군요.”

라울은 고개를 끄덕이고 입을 다물었다.

알렌드가 라울에게 물었다.

“이걸 아는 사람은 몇이나 되는가?”

“예배당 관리를 하는 허퍼슨이 알기는 합니다만, 문구가 떠오르는 것에 대해서는 모릅니다.”

“드만 남작의 외아들인가.”

“믿을 만한 인물입니다. 신실함이 남다른 친구지요. 함구하라고 하면 누구에게도 말하지 않을 겁니다.”

“좋네. 라울 신관, 이번 일에 대해선…….”

“알고 있습니다. 아는 이가 지금보다 더 늘어나선 안 되겠죠.”

지난 일을 회상하며 알렌드는 여객선 갑판 위에서 밤바람을 맞으며 서 있었다.

은은하게 비치는 달빛에 그의 은발이 물결처럼 부서졌다.

평소보다 색이 옅은 벽안엔 눈 앞에 펼쳐진 망망대해가 담겼다.

초비의 염색약을 사용한 그에게선 신비로운 분위기가 풍겼다.

신분을 숨기기 위해 황제의 의복을 벗고 평범한 귀족의 옷을 입었지만, 타고난 미모와 흘러나오는 기품은 감출 도리가 없었다.

덕분에 여객선 내에서는 신분을 숨긴 고귀한 핏줄이 배를 타고 있다는 소문으로 떠들썩했다.

소문의 당사자인 알렌드는 신경도 쓰지 않았지만.

잔잔한 바다는 수평선 너머가 보이지 않을 정도로 광활했다.

보니아 왕국까지 내려갔으면 성녀도 이 바다를 건넜을 테지.

“…….”

알렌드는 계속해서 길잡이의 눈으로 성녀가 있는 곳을 확인했다.

이틀간 같은 자리에 있던 반지는 몇 시간 전부터 다시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러니.’

꽈악.

알렌드는 난간을 세게 쥐었다.

‘성녀는 살아있을 거다.’

굳게 다문 그의 입술에서 결연함이 묻어나왔다.

***

“리리, 여기도 좀 닦아라!”

“네, 갑니다! 가요!”

나는 대걸레 모양의 솔로 바닥을 쓱싹거리며 갑판을 누볐다.

어젯밤.

내 유일한 캐시템(대여) 덕분에 문이 폭파돼서 밖으로 나온 것도 좋고.

민가를 찾은 것도 다 좋았는데-.

내가 잊은 게 하나 있었다.

‘나는 개털이라는 걸.’

젠달까지 가는 교통비는 고사하고, 당장 먹을 걸 살 돈조차 없었다.

이럴 줄 알았으면 하녀복 안쪽에 비상금 주머니라도 만들어 달아두는 건데.

크흡. 보고 싶다.

내 작고 소중한 7실버 3코퍼.

다행인 건, 내가 찾은 민가가 보니아 왕국의 수도인 항구도시, 라벨이라는 점이었다.

별장을 나온 후, 돈 없는 나는 묵을 곳을 찾지 못하고 밤거리를 헤매고 있었다.

“거기, 어린애는 빨리 들어가서 자라!”

잘못 들은 줄 알았는데, 나한테 하는 소리였다.

시비를 건 사람은 주점에서 술판을 벌이다 바람을 쐬러 나온 험상궂게 생긴 아저씨.

“……저 어린애 아닌데요?”

“그래도 집에 들어가서 자!”

“집도 없는데요!”

“잉? 거지냐?”

밥이나 먹고 가라면서 주점에서 먹을 걸 시켜줬다.

그러다 내 목적지를 주제로 한 대화가 이어졌다.

“젠달? 우리도 거기로 가는데?”

“정말요?”

듣자 하니 아저씨는 젠달에 물건을 보내는 배의 선장이었고, 같이 술판을 벌이던 사람들은 선원들이었다.

“선장, 데려다주죠?”

“승선비는 잡일로 때워, 리리!”

“오오-! 막내 들어온 거야? 일 열심히 해라-!”

성격 좋은 선장님과 선원들 덕에 나는 젠달로 가는 중형 범선 ‘데이데른 호’를 얻어 탈 수 있게 되었다.

청소와 각종 잡일을 해야 한다는 조건이 붙었지만, 돈이 없으면 몸으로 때워야 하는 건 당연한 거지. 암.

“이제 며칠 후면 폐하 얼굴이 내 눈앞에…….”

“다 끝냈냐?”

실실 웃으며 양동이의 구정물을 바다로 버리고 있었는데, 굵직한 목소리가 끼어들었다.

나는 고개를 돌렸다.

햇빛에 오랜 세월 그을린 구릿빛 피부, 뱃일로 탄탄히 다져진 근육질 몸.

건강미 넘치는 화창한 미남인 쇼웬이 내 쪽으로 걸어오고 있었다.

올해 스무 살로, 나랑 동갑인 이 녀석은 선장님의 아들.

다섯 살 때부터 배를 타기 시작해 지금은 배 안에서 다섯 손가락 안에 드는 베테랑이라고 했다.

“쇼웬, 여기 나무 바닥에 푯말 하나 세워줘라. 미끄럼 주의라고.”

“그건 왜?”

“내가 너무 완벽하게 닦아놔서 사람들이 넘어질지도 모르니까.”

“어이구. 잘나셨네.”

쇼웬이 빈정거렸지만, 봐라. 이 깨끗한 갑판을-!

젠달에서 쌓은 내 경력 대부분은 성녀 행세가 아니라 예배당 청소 업무였다.

“내가 이래봬도 다니던 직장에서 두 번째로 일 잘하는-.”

꼬르륵.

“……배고프냐?”

내 배지만 천둥 친 줄.

쇼웬의 물음에 나는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너무 열정적으로 청소해서 그런가.

저녁을 먹었는데도 금세 열량이 소모된 모양이었다.

“그럼 이것 좀 먹고 있던가.”

“뭔데?”

나는 쇼웬이 준 뭉치의 매듭을 풀었다.

생선 말린 걸 먹기 좋은 크기로 자른 것이었다.

낮에 다른 선원이 준 걸 먹어봤는데, 쥐포 같아서 꽤 맛있었다.

“오오. 이거 나 줘도 돼? 너 먹을 거 아니야?”

“먹기 싫으면 말고.”

“감사. 잘 먹겠습니다.”

배고픈데 장사 없다.

나는 쇼웬이 준 것을 질겅질겅 씹으며 갑판을 둘러봤다.

“조용하네. 다들 일 끝내고 어디로 갔나 봐?”

“내일이 출항이잖냐. 육지에서 머무르는 마지막 날 밤이니 한잔들 하러 갔겠지.”

“어제 그렇게들 마셨으면서?”

“그 정도에 나가떨어지면 뱃사람이 아니지. 나도 돛 정리만 하고 갈 거야. 너도 갈래?”

“윽. 아니.”

내가 인생에서 술은 딱 한 번 마셔봤지만, 별로 좋은 기억은 아니었다.

반수 성공한 동아리 선배가 갓 스물이 된 우리를 불렀다.

우리는 처음 마셔보는 술에 들떴지, 선배는 대학 합격해서 신났지.

주량도 모르고 마구 입안으로 쏟아부었다.

그다음 날엔 우리도 울고 한턱낸 선배도 울었다.

정신은 멀쩡한데 머리는 깨질 것 같고, 시야는 울렁울렁 움직이고, 5분에 한 번씩 화장실에 달려가 변기를 잡고.

그때 다짐했지.

앞으로 내가 다시 술을 마시면 인간이 아니다.

“숙취 오면 어떻게 해. 거기에 배멀미 올지도 모르고. 나는 그 참상에 발을 들일 생각이 없습니다.”

나는 팔로 엑스(X)자를 그리며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술은 안 마셔도 되는데? 와서 안주만 먹고 가. 너 그걸로 되겠어?”

쇼웬은 내 손에 몇 조각 안 남은 건어물 조각을 보며 말했다.

내 위장을 뭐로 보고. 당연히 이것 가지고는 안 되지. 하지만.

“……나 돈 없는데.”

“너 거지인 건 다 알지. 가자. 내가 네 몫은 내주마.”

“쇼웬 선생님, 어른이셨군요.”

공짜 음식은 마다하는 법이 아니라 했다.

털어봤자 먼지밖에 나오지 않는 내 주머니 사정에 밥을 사주는 사람이라니.

저 쇼웬의 제 잘난 맛에 쑥스러워하는 표정마저 경제력 있는 어른 같다.

우리는 부둣가를 벗어나 마을로 들어왔다.

양옆으로 불이 켜진 가게들이 즐비한 골목 초입에서, 쇼웬이 걸음을 멈췄다.

“아.”

뒤를 돌아보자, 쇼웬은 얼굴을 잔뜩 구긴 채 심각하게 서 있었다.

“왜? 화장실?”

“아니. 선장님이 배에서 뭐 좀 가져오라고 했는데, 안 가져왔어.”

“그래? 그럼 같이 갔다 올까?”

“그냥 나 혼자 다녀오는 게 빠를 거 같아. 가게도 바로 저기 앞이고.”

쇼웬은 왁자지껄한 소리가 거리까지 흘러나오는 주점을 가리켰다.

산적같이 생긴 사람이 밖으로 나오며 일행과 껄껄 웃었다.

“어, 선장님이다.”

“다들 있나 보네. 가게 들어가서 먹고 있어. 금방 다녀올게.”

“응.”

배도 고프고, 가게도 바로 앞이고.

쇼웬은 왔던 길을 뛰어갔고, 나는 주점으로 가려고 했다.

뒤에 들려온 소리만 아니면.

“……성녀님.”

엥? 나?

휙 하고 고개를 돌렸다.

가게들이 있는 넓은 시가지와 달리, 내 왼쪽의 좁고 끝이 보이지 않는 어두컴컴한 골목에서, 희미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도와……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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