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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략 황제의 외모가 내 취향이라 곤란하다-33화 (33/150)

33화.

“끝내준다.”

나는 이번에야말로 낯선 천장을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숲에서 만난 왕녀님의 별장으로 따라온 지 이틀째.

사실은 붙잡힌 처지였다.

“젠달에서 왔어?”

도둑 새를 만난 그날, 숲의 요정처럼 등장한 왕녀님은 나를 유심히 관찰하다 물었다.

“어떻게 아셨어요?”

“그 옷. 젠달 황실에서 일하는 하녀들 옷이잖아?”

나는 왕녀님의 손가락이 가리키는 곳으로 시선을 내렸다.

내가 입은 셔츠의 왼쪽 카라에 젠달을 상징하는 금빛 독수리 자수가 새겨져 있었다.

이런, 변명할 여지가 없다.

왕녀님은 상냥한 말투로 미소 지으며 물었다.

“그래서 신성 제국의 하녀가 왜 내 개인 사냥터에 있을까?”

“아, 저, 그게…….”

“바다에 표류해서 여기까지 온 건 아닐 테고. 설마 첩자?”

“아, 아닌데요!”

“그렇게 믿어주고는 싶지만, 혹시 모르잖니. 같이 가줘야겠어.”

첩자라니.

젠달에서 황궁에 침입한 자의 말로가 어떠했는가.

핏빛 미래가 그려진다.

잠시 ‘성녀란 것을 밝힐까?’란 생각이 들었지만, 이내 접었다.

지금은 내 유일한 성녀 밑천인 검은 머리카락과 검은 눈이 없었다.

그렇다고 다른 방법으로 증명할 수도 없는 노릇이고.

[제가 사실은 성녀입니다!]

[증명해보세요.]

[못하는데요.]

……첩자냐, 성녀 사칭죄냐.

둘 다 목이 날아가지나 않으면 다행이지.

도망갈까 싶었는데, 이미 왕녀님의 활 솜씨를 본 후였다.

나는 어쩔 수 없어 왕녀님을 따라갔다.

“일단은 여기서 지내도록 하렴.”

왕녀님은 개인 사냥터에서 일어난 일이니, 병사들을 불러 시끄럽게 하고 싶지는 않다며 별장의 방을 하나 내줬다.

그리고…….

성인 열 명이 누워도 좋을 넓은 침대, 호화로운 가구, 욕실 딸린 방에,

매일 아침에 가져다주는 뽀송뽀송하게 세탁한 옷, 삼시 세끼 꼬박꼬박 나오는 밥. 각종 오락거리까지.

이게 바로 돈 많은 백수의 표본이 아닐까.

한동안 잊고 지냈던 내 꿈이 이제야 실현된 느낌이었다.

‘장난 아니다.’

첩자일 지도 모르는 애를 이렇게 대우해준다고?

사람이 이렇게까지 상냥할 수가 있나.

왕녀님은 전생에 천사였던 게 분명해.

그렇게 뒹굴뒹굴하고 있다 보면 왕녀님이 하루에 두세 번 이곳을 찾아왔다.

“선물이야, 리리. 보는데 네 생각이 나서 사 왔단다.”

“이것도 먹어보렴. 맛있니?”

“이대로 쭉 보니아에서 사는 건 어때?”

집순이 필수템이라는 인터넷이고, 스마트폰이고.

여기선 다 필요 없었다.

왕녀님 얼굴만 봐도 이렇게 재밌는데-!

폐하, 미인이 나 꼬셔요……. 엉엉.

“으, 좋다. 역시 내 천성은 백수였나 봐.”

이렇게 침대 위에서 두 다리 뻗고 아무것도 안 해 본 적이 언제냐.

늘어진 기분을 한껏 만끽하는 중에, 방문이 열리며 누군가 들어왔다.

오렌지색 머리카락을 양 갈래로 딴 여자아이였다.

아이는 가져온 과일 바구니를 내가 있는 침대 옆 협탁에 올려놓았다.

“포인, 왔어?”

“…….”

포인은 샤를 왕녀님이 내 감시역으로 붙인 아이였다.

그렇다고 방문을 지키거나 하는 건 아니고, 지금처럼 먹을 걸 가져온다거나 하는 정도의 편의를 봐주고 있었다.

겉보기로 추측해 보자면, 포인의 나이는 노엘 또래 정도.

그러고 보니 니세포르엘 신전 애들은 잘 있으려나.

지난번엔 상자 한가득 아이들의 편지가 왔었는데, 편지만으로도 삐약 거리는 모습이 떠올라서 어찌나 귀엽던지.

그 속엔 노엘의 편지도 있었다.

누가 열어보기라도 할까 걱정됐는지, 세 번을 다른 편지 봉투로 밀봉했다.

편지엔 지난번 일에 대한 감사, 죄송함, 다른 아이들의 편지에서처럼 삐약 거리는 일상 얘기 등등이 적혀 있었다.

그리고 편지의 끝인사 뒤에, 한참을 고민하다 적은 듯한 문장.

[성녀님, 보고 싶어요.]

크흡. 나도 보고 싶다. 노엘아…….

나는 고개를 옆으로 돌렸다.

아이들을 생각하니 괜히 또래인 포인에게 신경이 쓰였다.

“저기, 포인.”

“…….”

하지만 돌아오는 대답은 없었다.

내가 포인의 나이를 추측할 수밖에 없던 이유도 이 때문이었다.

포인은 조용했다.

“포인, 있잖아.”

“…….”

그것도 무척.

“얘는 포인이야. 리리 감시역으로 내가 데려왔지.”

왕녀님이 그렇게 말해주지 않았더라면, 나는 지금까지 포인의 이름도 몰랐을 거다.

포인은 처음 만난 후로 지금까지 내게 한마디도 하지 않았으니까.

지난번에 왕녀님한테 조용히 “네…….”라도 대답한 걸 봐선, 말을 못 하는 건 아닌 거 같고.

첩자일지도 모르는 사람이랑 말하는 게 무서운가.

“…….”

제 할 일을 끝낸 포인은 도도도 빠른 걸음으로 방을 나갔다.

문고리를 잡은 포인과 눈이 마주쳐 인사하려고 했지만, 날 못 본 척하고 문을 닫아버렸다.

어쩌면 포인에게 난 보이지 않는 투명 인간이 아닐까.

“후후후…….”

어쨌든. 너무 편하다.

넓고 쾌적하지, 밥 맛있지, 잠 잘 오지, 미모의 왕녀님도 자주 찾아와주지.

이런 삶이면 평생 여기서 살 수 있을 정도로.

너무 좋다.

“백수 최고…….”

***

‘성녀잖아.’

처음 사냥터에서 그녀를 발견했을 때, 샤를은 기가 차서 웃었다.

이렇게 쉽게 제 영역으로 들어와 줄 줄은 몰랐는데.

‘젠달의 하녀? 말도 안 돼.’

색이 좀 달라졌다고 못 알아보겠는가.

제 사냥터에 들어온 그건 성녀였다.

무슨 일이 있었길래 성녀가 여기에 있는 것인지.

기껏 젠달까지 보낸 델칸은 무엇을 하는 건지.

신경 쓰이는 부분이 몇 가지 있었지만, 하루살이처럼 사소한 일이었다.

성녀가 저한테 떨어진 마당에 그런 것들이 크게 중요하겠는가.

내 사냥감.

내 새장 안에 들어온 내 것.

“여기 너무 편해요…….”

샤를은 오전에 본 귀여운 사냥감의 얼굴을 떠올리며 속으로 콧노래를 흥얼거렸다.

‘새장 준비가 덜 되어서 금방 날아갈 줄 알았는데, 생각보다 오래 머물러준단 말이야.’

별장이라고 했지만, 젠달에서 돌아온 후에 성녀만을 위해 만든 곳이었다.

나가지 못하게 급히 결계를 쳤지만, 성녀가 가진 힘을 생각하면 쉽게 나갈 수 있을 정도의 결계였다.

‘검은색이 사라진 것과 연관이 있나.’

가령, 신성력을 사용하지 못하게 됐든지.

성녀에게 검은색이 꽤 잘 어울렸기 때문에 그 모습을 보지 못하는 게 조금 아쉽긴 했지만, 이쪽이 나을 수도 있었다.

외향으로 성녀를 구분할 수 없으면, 성녀가 길거리를 돌아다녀도 탐내는 사람이 없을 테니까.

샤를은 여전히 성녀가 탐이 났고, 갖고 싶었다.

제 곁에 두고 보고 싶을 때마다 볼 수 있으면 그보다 더한 만족감이 없을 것 같았다.

“기분이 좋아 보이는구나.”

보니아 왕국의 국왕, 이슈팔드 애팅거가 샤를에게 말을 걸었다.

국왕의 제안으로 샤를은 그와 차를 마시던 중이었다.

“젠달엔 네가 가는 편이 좋았을 텐데 말이다.”

국왕이 아쉬운 투로 말했다.

젠달과의 기술 공유는 그가 오래도록 준비해오던 일이었다.

그만큼 중요한 사안이니만큼, 자신이 아끼고 믿음직스러운 샤를이 갔으면 하는 마음이 컸었다.

“오라버니도 젠달에 가보셔야죠.”

“루이드 그 녀석은 영 믿음직스럽지 못해서 말이다.”

쯧. 하고 국왕이 혀를 찼다.

“루이드가 젠달에 가는 바람에 네가 해적 소탕을 맡게 됐다지?”

“네. 조만간 녹스담 해역에 출몰할 거라는 정보가 들어와서 정확한 날짜를 알아보고 있어요.”

바다와 인접한 보니아 왕국은 해상 무역이 활발했다.

그러다 보니 인근 해역에서 물건을 실은 배들을 노리는 해적들의 출몰이 잦았고, 보니아 왕가는 왕국군을 이끌고 주기적으로 해적을 소탕했다.

“어련히 잘할까.”

믿음직스러운 딸이었다.

그녀라면 훌륭히 제 뒤를 이어 국민에게 존경받는 국왕이 될 수 있으리라.

그는 흐뭇하게 딸을 바라보다, 다른 주제를 꺼냈다.

“듣자 하니 요즘 사냥터에 자주 가는 모양이더구나.”

“잡고 싶은 사냥감이 생겨서요.”

국왕이 놀란 빛을 했다.

샤를의 눈에 찰 만한 사냥감이 나타나는 것은 흔한 일이 아니었다.

지난번 샤를이 잡아 온 새벽빛 늑대의 신비한 털 색을 떠올린 국왕이 관심을 보였다.

“도와주랴?”

“아니요.”

샤를은 선을 긋듯 미소 지으며 답했다.

“제 사냥감이에요. 아버지.”

***

“음…….”

나는 팔짱을 끼고 닫힌 문을 노려봤다.

잠금장치도 없이 디귿(ㄷ)자 모양의 나무 손잡이 하나만 달린 문.

당겨도 보고, 앞으로 밀어도 보고, 옆으로 밀어도 보고, 위로도 올려보고, 몸통도 부딪혀봤는데도.

도통 열릴 생각을 하지 않았다.

“이건 아마……. 신성력 결계?”

그럼 더 답이 없었다.

신성력이라고 해봤자 내가 아는 게 있어야 말이지.

“으아아……. 어떻게 나가지!”

나는 머리를 부여잡았다.

확실히 이 생활은 편하지만, 언제까지고 여기에 있을 수만은 없었다.

나는 빚쟁이 신분이고, 일단은 젠달에 집과 직장이 있는 사람이고.

그리고 무엇보다……!

“폐하 얼굴 보고 싶어……!!”

왕녀님도 미모가 대단하시지만, 나는 역시 폐하 얼굴이 최고다.

아아, 주변 사람들 다 자동 포커스 아웃 시키고 세상 혼자 사는 그 미모!

이렇게 오랫동안 폐하 얼굴을 못 본 적이 있었던가!

나는 이렇게는 못 산다……!

“내 팔자에 백수는 무슨.”

이번 생은 글렀다.

금단 현상으로 꿈이고 현실이고 폐하 얼굴이 사방에서 아른거렸다.

천국인가? 아니, 허상인 걸 아는데 어떻게 천국이 될 수 있겠어!

게다가 144p 화질로 보는 거 같은 이 흐릿함!

여긴 지옥이다.

“실물……. 실물이 필요해…….”

나는 부들부들 떨리는 손으로 손잡이를 잡았다.

“왕녀님, 저 젠달로 돌아가려면…….”

“리리, 첩자니?”

“아닙니다.”

내 입에서 젠달 이야기만 나와도 왕녀님은 날 첩자라고 의심을 하니.

젠달에 돌아가기 위해선 자력으로 여기서 탈출하는 수밖에 없었다.

왕녀님, 제가 참 좋아하는데요.

다음에 젠달에서 성녀 신분으로 찾아뵙겠습니다.

“나간다…….”

나는 날 죽이려던 윅의 끈기를 떠올리며 손잡이를 당겼다.

벌써 서른두 번째 시도였다.

“죽어라!”

“열려라아……!”

지잉-.

귓가에 무언가의 작동음이 들린 건 그때였다.

이어 손잡이를 붙든 검지에서 노란빛이 피어올랐다.

정확히는 검지에 낀 반지에서.

쾅-!

“…….”

모락모락 피어나는 연기.

까맣게 타서 복도 쪽으로 넘어진 방문.

나는 떨어진 손잡이를 붙들고 서서 그 당황스러운 광경을 멍하니 바라봤다.

“……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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