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2화
절벽에서 떨어진 그때, 윅의 공격을 막았을 때와 비슷한 결계가 공중에서 날 감쌌다.
먼젓번과 다른 점은 결계의 모양이 반구형이 아닌 동그란 구 형태라는 것이었다.
역시 인생은 템빨이라면서 감탄하려던 것도 찰나.
“으악?!”
구 형태의 결계는 절벽의 튀어나온 바위에 부딪혀 높게 튀더니, 옆에 있던 강줄기로 뛰어들었다.
급류가 거셌다.
날 구한다고 폐하가 신성력까지 써가며 절벽에서 뛰어내렸지만.
나는 어떻게 손을 써볼 수도 없을 정도의 빠른 속도로 물살에 휩쓸려 떠내려갔다.
그대로 바다까지 나가 망망대해를 둥둥 떠다니다가 도착한 곳이 지금 있는 해안가.
“어디까지 온 거야. 대체.”
한숨이 절로 나왔다.
물론 결계가 없었으면 내 몸뚱어리는 바위에 부딪혀 산산조각이 났을 테지만.
이건 너무 멀리 온 거 아니냐고……!
촤아아아.
해안가 모래 위로 얕은 파도가 밀려왔다 밀려가기를 반복했다.
나는 그 위에 무기력하게 누워있었다.
지중해를 닮은 에메랄드빛 바다. 고운 모래 해변. 푸른 하늘.
솔직히 주변 풍경은 탄성이 나올 만큼 아름답기 그지없었다.
하지만 본인 의지와 상관없이 만 하루를 보고 있다고 생각해봐라.
질린다.
차라리 폐하 얼굴을 보여줘…!
바다가 아무리 맑고 투명하면 뭣하냐.
우리 폐하 눈동자에 비할 바가 안 되는데!
헝헝. 폐하 얼굴 보고 싶다.
“어떻게 돌아가지……?”
지리도 모르고, 돈도 없고, 능력도 없고.
지금이 갈색 머리인 게 행운인지 불행인지 모르겠다.
무인도는 아니면 좋겠는데.
꼬르륵.
“이 와중에 배고픈 거 실화냐.”
하긴 마지막 식사가 윅에게 납치되던 날인 그저께 저녁이었으니 배고플 만도 했다.
“에잇. 먹을 것부터 찾자.”
나는 몸을 일으켰다.
결계가 내 움직임을 따라 회전하며 중심을 잡았다.
결계는 사용자를 위한 보정이 돼 있는 건지, 꽤 아늑했다.
외부의 충격이 내부에까지 전해지지도 않았고, 결계가 굴러가거나 할 때도 사용자는 영향을 받지 않고 평온한 상태로 있을 수 있었다.
가만히 누워있으면 푹신한 침대에 누워있는 기분마저 들었다.
지금도.
나는 결계의 중앙에서 구름 위를 걷는 기분으로 앞으로 나아갔다.
그러다 바닷물이 들어오지 않는 해안가에 도착하자 결계는 자연스레 소멸했다.
크. 감탄스럽다. 이래서 신성석, 신성석 하는구나.
“주변에 먹을 게 있으려나?”
***
한 시간 정도 후, 나는 해안가와 이어진 숲에서 먹을 것을 제법 모을 수 있었다.
“헬리랑 디저트 연구하면서 알게 된 지식이 꽤 쓸 만했어.”
애플망고랑 사과를 닮은 과일에, 고구마 맛이 나는 뿌리채소에, 씹어 먹으면 수분을 보충할 수 있는 나무줄기 등등.
앞치마로 만든 보자기에 가득 찬 식량을 보니 흐뭇한 마음이 절로 들었다.
“굶어 죽을 걱정은 없겠다.”
나는 사과처럼 생긴 과일 하나를 베어 물고 주변 지리를 익힐 겸 앞으로 나아갔다.
길을 잃으면 안 되니 중간중간 눈에 띄는 나무들의 나뭇가지를 꺾으면서 방향 표시를 했다.
그러다 빽빽하게 자란 나무들 사이에서 걸음을 멈췄다.
“숲이 꽤 큰데? 여기를 빠져나가야 사람 사는 곳을 찾아볼 수 있을 거 같긴 한데…….”
그렇다고 계속해서 안으로 들어가기엔 일정이 촉박했다.
해가 떨어지기 전에 안전하게 잠잘 곳도 봐둬야 하고.
모닥불 피우는 것도 도전해봐야 하고.
하루 만에 장르 생존물 된 거 같네. 기분 탓이겠지?
“여기까지 표시해 놓고, 내일 다시 와보지 뭐.”
나는 근처의 나무에서 가지 하나를 꺾었다.
“깍. 까아악.”
불길한 새 울음소리가 들린 건 그때였다.
위쪽인가.
고개를 들었지만, 시야 내 어디에도 새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그사이, 같은 울음소리를 가진 새들이 하나씩 늘어나기 시작했다.
하나의 메아리가 사라지기도 전에 새로운 울음소리가 등장하고, 또 메아리가 생기고.
마지막엔 내가 울음소리에 포위당한 기분마저 들었다.
“깍. 깍.”
“아.”
생각났다.
이 울음소리는.
황궁에서 내 디저트 바구니를 채갔던 그 망할 놈의 새……!
“도둑 새가 여러 마리면 뭐라고 부르는지 알아?”
“양심도 없는 것들?”
“강도 새라고 불러.”
“……델칸, 너 그런 농담 좋아하는구나. 내가 몇 개 아는 데 좀 알려줄까?”
“응? 농담 아니야. 리리. 정말로 강도 새라고 불러. 왜냐하면…….”
나는 델칸과의 대화를 상기하며 앞치마로 싼 내 소중한 식량들을 품에 안았다.
“날강도가 따로 없거든.”
“깍. 깍.”
새 울음소리가 혼자인 날 비웃기라도 하듯 점점 커졌다.
“……내가 먹고 죽을 건 있어도 너희들한테 줄 건 없거든.”
아무래도 당분간은 달려야 하는 운명인가보다.
나는 새들을 피해 해안가로 달려갈 타이밍을 재며 오른발을 반 발자국 뒤로 움직였다.
휘이이익-.
속도 빠른 무언가가 허공을 가르는 소리가 연속적으로 나더니, 새 다섯 마리가 차례대로 지면에 떨어졌다.
모두 급소에 화살을 맞춘 깔끔한 솜씨였다.
“…….”
그리고 그 솜씨의 주인이 탄 것일 게 분명한 말발굽 소리가 이쪽을 향해 다가오고 있었다.
나는 숨을 죽인 채 소리가 가까워지는 방향을 주시하다가, 놀라서 눈을 크게 떴다.
“어머.”
숲의 엘프다.
그렇지 않고서야 저 미모를 설명할 수 없었다.
기품이 풀풀 흘러넘치는 애쉬 블론드 머리카락. 사랑스러움이 깊게 배인 헤이즐넛 눈동자.
엘프는 사냥복 차림으로 커다란 활을 든 채 털의 윤기가 흐르는 흑마 위에 앉아 있었다.
그녀가 날 발견하고 생긋 미소를 지었다.
“누가 내 사냥터를 이렇게 헤집고 다니나 했더니.”
내가 지금 꿈을 꾸고 있는 건가.
“귀여운 아이가 있네.”
샤를 언니…….
왕녀님이 왜 여기서 나와요?
***
새벽 내내 황제의 집무실엔 불이 켜져 있었다.
책상과 테이블에 산더미같이 쌓여있는 책과 각종 문서.
그것을 보고 있는 건 에본, 헨켈, 시아나, 초비였다.
“난 이제 더 못해……. 나 죽으면 묘비에 과로사로 죽었다 새겨줘라.”
초비는 퀭한 얼굴을 테이블 위에 박았다.
이틀 동안 잠도 못 자고 연구에 자료조사만 했으니 죽을 맛이었다.
“초비.”
옆 소파에 앉은 헨켈이 그녀를 불렀다.
그리고 초비가 보던 문서를 가져가고 새로운 책을 들이밀었다.
“할 수 있다.”
“헨켈 레바르튼. 넌 사람도 아니야…….”
사람이 아닌 건 저쪽도 마찬가지인가.
초비는 테이블에 이마를 댄 채 고개를 반대쪽으로 돌렸다.
무서운 집중력으로 책장을 넘기고 있는 시아나 프라단이 보였다.
저 백과사전 같은 재미도 없고 두꺼운 역사책을 몇 권째 보고 있는지 모른다.
“……비상사태라는 건 알겠는데, 왜 이렇게까지 걱정하는 건데?”
초비는 고개를 번쩍 들곤 역설했다.
“성녀님이시잖아. 황제 폐하보다도 더 강한 신성력! 급류에 휘말리셨어도 금세 빠져나오셨겠지! 지금 황도에 와 계신 거 아니야?”
그 말에 에본과 헨켈의 눈이 짧게 마주쳤다.
그런 뒤 에본의 시선은 초비의 말엔 관심도 없는 듯 책에 열중한 시아나에 닿았다가, 초비를 향했다.
‘레이디 프라단과 초비는 성녀님께 신성력이 없단 사실을 모른다.’
수호의 반지가 아무리 귀한 아티팩트라 하더라도, 신성석으로 발동된 결계가 언제까지고 유지된다는 것은 이론적으로 불가능했다.
그게 가능하게 만들려면 신성력을 계속해서 결계에 주입해야 하는데.
‘성녀님께선 주입할 신성력이 없으시니…….’
최악의 가정인 ‘성녀님께서 바다까지 흘러가셨고 바다 한가운데서 결계가 소멸했다.’도 일어났을 가능성이 충분했다.
하지만.
“결계는 아마 괜찮을 거네.”
황제께선 그렇게 말씀하셨다.
그러니 지금은 성녀님께서 무사하실 거라 믿고 자신들이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해야 했다.
제일 우선인 것은 위치 파악이었기 때문에, 지난 이틀간은 잠자는 시간도 없이 관련된 자료들을 뒤졌다.
그 와중에 또 귀족파들이 성녀를 걸고넘어졌으니, 황제가 회의 도중 검을 빼 들은 것도 에본은 백분 이해가 갔다.
오히려 제가 그러지 못한 것을 황제가 대신해줘 속이 시원했다.
“초비.”
“왜 불러.”
“헨켈 말대로야. 넌 할 수 있다.”
초비는 와락 인상을 구겼다.
에본 하이벤과 헨켈 레바르튼.
아카데미 시절에는 이렇게 남을 위해 사는 인간들이 아니었는데.
“너희들 정말 성녀님한테 홀라당 넘어가-.”
“폐하. 오셨습니까.”
“갔고 저도 넘어갔습죠. 성녀님이 너무 걱정되는 마음에 미칠 거 같아서 잠도 안 온다니깐요.”
빤히 보이는 초비의 그 속에 헨켈이 고개를 짧게 흔들었다.
알렌드는 성큼성큼 집무실 안으로 들어왔다.
일행과 같이 꼬박 밤을 새운 얼굴이었지만, 그 수척함이 오히려 그의 미모를 빛나게 했다.
에본이 알렌드에게 물었다.
“폐하, 찾으셨습니까?”
“찾았네.”
그 말에 시아나를 포함한 모두가 일사불란하게 움직였다.
알렌드가 상석에 앉고, 테이블에 수북이 쌓여있던 서류들이 치워졌다.
그리고 테이블 위에 커다란 지도 한 장이 펼쳐졌다.
오디트리아 대륙의 지도였다.
“연구소장, 수리는 끝났나?”
“넵.”
초비는 빠릿빠릿한 동작으로 물건 하나를 알렌드에게 건넸다.
감긴 눈 모양의 펜던트였다.
알렌드는 펜던트 뒷면의 홈에 제 손가락에 낀 반지의 문양을 맞췄다.
‘황제의 반지.’
그가 밤새 루와 함께 보물창고를 뒤져 찾아낸 것이었다.
‘수호의 반지’와 한 쌍인 ‘황제의 반지.’
두 반지는 ‘길잡이의 눈’으로 서로의 위치를 확인할 수 있다.
‘……라고 기록되었지.’
정말 작동할지는 해봐야 아는 일이었다.
알렌드는 초조한 심정을 애써 표출하지 않으려 노력하며, 반지에 제 신성력을 주입했다.
반지의 신성석이 그의 신성력과 반응해 붉게 빛나자, 펜던트의 눈꺼풀이 서서히 들어 올려졌다.
“…….”
작동됐다.
기뻐할 새도 없이, 숨 막히는 정적이 흘렀다.
혹여 입을 열었다 탈이라도 날까 모두 숨 쉬는 것마저 조심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길잡이의 눈이 테이블 위에 펼친 지도를 구석구석 바라보았다.
그러다 눈동자가 움직임을 멈추고, 한 지점에 가느다란 붉은 광선을 쏘았다.
다섯 명의 시선이 일제히 그곳으로 향했다.
일이 분 정도의 침묵 후, 초비가 제일 먼저 입을 열었다.
“……보니아 왕국?”
보니아 왕국.
알렌드는 지도를 주시하며 아무도 모르게 주먹을 힘껏 그러쥐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