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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략 황제의 외모가 내 취향이라 곤란하다-31화 (31/150)

31화

손이 떨린다. 신성석은 그냥 보석보다 몇 배는 더 비싸다는데.

도대체 내 손가락에 얼마짜리가 끼워져 있는 거야.

그렇다면.

‘살아남는다.’

살아남아서 폐하한테 반지를 돌려드려야 한다. 절대 윅한테 줄 수 없지.

나는 아직도 결계를 내리치고 있는 윅을 바라봤다.

나 하나 베어보겠다고 저렇게까지 열심히 하는 것도 대단하네.

어쨌든 시간이 별로 없었다.

쩍. 쩌억.

아직까진 나한테만 들리는 것 같은데, 결계에 조금씩 금이 가고 있었다.

아마 이 다음다음이 마지막 방어.

“죽어라!”

윅은 결계에 막힌 검을 다시 들어 힘껏 내리쳤다.

쩌저저억.

결계가 깨어지자 중심을 잃은 그의 몸이 앞으로 쏠렸다.

그때를 놓치지 않고 나는 앞으로 뛰쳐나가 검을 피했다.

그리고 땅에 박힘 검을 빼내려는 윅의 오금을 걷어차고 다시 무작정 뛰었다.

하, 인생. 살아남기 힘들다.

내가 폐하 얼굴 보겠다고 이렇게 달려본 적도 없는데에-!

“하아. 하아.”

이번에도 절벽에 막혀 앞으로 나갈 수 없었다.

떨어질 뻔하진 않았지만, 절벽은 아까와 달리 아래가 보이지 않을 정도로 깊었다.

폭포가 있는지 거센 물줄기 소리도 들렸다.

앞에는 끝이 보이지 않는 절벽, 뒤에는.

“망할 꼬맹이.”

눈에 핏발이 서고 머리칼과 옷이 땀으로 흠뻑 젖은 윅.

흡사 광인 같았다.

윅은 악에 잔뜩 받친 얼굴을 하곤 내 앞으로 걸어왔다.

“불쌍하다고 좀 봐줬더니. 그냥 죽어라.”

윅의 검이 매섭게 번뜩이며 공기를 갈랐다.

스걱.

검에 베인 건 내가 아니었다.

피를 토하며 쓰러지는 윅의 뒤로 찬란한 금발이 태양처럼 떠올랐다.

누군가 내 인생에서 가장 아름다운 걸 목격한 순간이 언제였냐고 묻는다면,

바로 지금이라 대답하지 않을까.

아침 해를 받고 서 있는 폐하는, 마치 지금 막 인간계에 강림한 남신 같았다.

누구든 이 광경을 마주하게 된다면 홀려서 넋을 잃고 볼 수밖에 없을걸.

짧게 몰아쉰 숨. 폐하의 가라앉은 푸른 눈이 윅을 일별하고 내게 닿았다.

무감정하던 눈이 아는 사람을 발견했다고 감정이 생겼다.

이 상황이 마음에 안 들어 짜증이 나신 거 같기도 하고, 그래도 다행이라고 생각하시는 거 같기도 하고.

어쨌든.

“폐하!”

폐하의 얼굴을 보니 그제야 살았다는 안도감이 들었다.

그 외에 앞으로도 폐하의 얼굴을 볼 수 있다는 감격스러움, 다시 만난 반가움, 쫓기던 서러움 등등…….

한데 얽힌 감정들에 긴장마저 풀려버리니.

아, 콧잔등 시큰거린다.

우는 건 꼴사나우니까 참자.

“성녀, 괜찮나?”

“폐하 덕분에 완전 멀쩡하죠. 윽. 오랜만에 보니 더 눈부셔……. 아, 맞다! 폐하, 헬리도 찾아야 해요. 새벽에 다른 곳으로 끌려갔는데-.”

“이미 찾았어. 쿠이제라는 놈의 집에 잡혀 있더군. 그놈에게 물어 여기를 알아냈지.”

“정말요? 헬리 그럼 무사해요?”

“무사해.”

“다행이다…….”

내가 숲속에서 추격전을 벌이는 사이, 밖에선 상황이 종료된 모양이었다.

헬리가 무사해서 정말 다행이다.

“돌아가자.”

나와 다섯 걸음 정도 떨어진 거리에서 폐하가 내게 손을 뻗었다.

나도 폐하를 향해 손을 뻗었지만, 우리의 손이 만나는 일은 없었다.

“……어?”

보이지 않는 무언가가 내 발목을 힘껏 낚아챘다.

기분 나쁜 웃음과 함께 윅이 중얼거리는 소리가 귓가에 들렸다.

“신성력은 꼬맹이 너만 있는 게 아니지.”

“신아리!!”

일그러져가는 폐하의 얼굴을 바라보며, 나는 절벽 아래로 추락했다.

***

앙뜨완 빵집에서 주최하는 디저트 레시피 대회 본선 당일.

헬리 몽블랑은 비틀거리며 대회장에 나타났다.

며칠 밤이라도 샌 듯한 충혈된 눈에 새하얗게 질려버린 안색.

“저게 헬리 몽블랑이라고?”

전설의 요리사 헬리 몽블랑.

화려했던 그의 전성기를 기억하던 사람들이 놀라 수군거렸다.

“완전 폐인인데?”

“황궁 주방에서 쫓겨날 거란 소문이 영 근거 없는 소리는 아니었나 봐.”

“저래서 오늘 시연이나 제대로 할 수 있으려나…….”

일부 소문을 좋아하는 사람들을 제하고, 대부분의 사람이 헬리의 상태를 우려했다.

하지만 대회 시작 후, 헬리는 그런 걱정들이 무색할 정도로 거침없고 군더더기 없는 움직임으로 시연을 진행했다.

그러다 가끔, 제게만 들릴 정도로 같은 말을 중얼거렸다.

“성녀님……. 성녀님의 염원을…….”

얼마 지나지 않아 헬리가 만든 디저트가 심사대에 올랐다.

안개꽃을 닮은 디저트를 입안에 넣는 순간, 심사위원들은 탄성을 질렀다.

“훌륭해요.”

심사위원이자 앙뜨완 빵집의 사장인 올리비아가 감탄했다.

강력한 우승 후보였던 쿠이제가 불참했지만,

나오지 않는 편이 그에게 더 좋은 일지도 몰랐다.

지금 여기, 이 ‘팝콘’이라는 디저트를 이길 수 있는 건 전 세계 어디에도 없을 테니까.

“재료 고유의 맛을 살리는 기존 디저트의 미학을 깨지 않으면서도, 이런 맛을 낼 수 있다니. 바삭하면서도 부드럽고, 고소하면서도 짭짤해요. 이 녹인 설탕을 입힌 팝콘은 단맛과 짠맛의 환상적인 하모니가…….”

그녀는 평을 늘어놓으면서도 중간중간 팝콘을 입에 집어넣었다.

다른 심사위원들도 마찬가지였다.

한 움큼씩 팝콘을 쥐어 가고, 손이 비면 또 쥐어 갔다.

오목한 접시에 가득 담겼던 팝콘은 순식간에 동이 났다.

“과연, 헬리 몽블랑. 신의 요리사란 말이 그냥 붙여진 게 아니었군요.”

결과에 이견은 없었다.

심사위원의 만장일치로 우승자가 결정됐다.

“우승은-! 헬리 몽ㅂ…….”

사회자가 우승자의 이름을 발표하려는 그 순간,

“우승자는 리리 굿페이스 님이시다!”

단상 위에 목석처럼 서 있던 헬리가 사회자의 말을 끊고 외쳤다.

하늘을 올려다보는 그의 뺨에 눈물이 흘러내렸다.

‘성녀님, 보고 계십니까. 성녀님의 디저트가 우승했습니다…….’

***

델칸은 젠달의 황궁 내 미묘한 분위기를 감지했다.

평소와 다름없는 황궁이었지만, 개중 날이 선 사람들이 있었다.

예를 들어 젠달의 재상이나 황실 호위 부대의 대장, 그 부대의 기사 몇몇.

황제의 측근들이 연관된 일이라면 큰일이 분명한데, 이렇다 할 사건이 일어났다는 이야기는 들리지 않았다.

소수의 사람만 알고 있고, 그것을 외부에 발설하는 일이 금기시되는 큰일인가.

‘황제에게 무슨 문제라도 생겼나?’

그렇다 하더라도 델칸이 그 일에 관심을 가질 이유는 없었다.

타국의 일일뿐더러, 젠달의 현 상황을 살피라는 명령도 없었으니.

그가 그 상황을 신경을 쓰는 건, 이틀째 리리가 보이지 않기 때문이었다.

더욱이 리리가 최근 반지 때문에 고민하던 걸 알았기에 델칸은 그녀의 부재가 무척 신경 쓰였다.

“리리? 그런 애는 저희 주방에 없어요.”

주방에서는 리리의 존재를 모른다.

그녀의 상사라고 들었던 주방장은 현재 병가를 내고 쉬는 중이라 했다.

‘그럼 리리의 안부를 알려면 어디에 가서 물어봐야 하지?’

생각이 거기까지 닿았을 때, 델칸은 순간 낯선 곳에 홀로 동떨어진 기분을 느꼈다.

이어 마음이 공허해지며 불안했다.

왜 그러는지는 델칸도 알 수 없었다.

친구로 지내자고 한 지 고작 일주일밖에 되지 않았다.

같이 있으면 마음이 편한 친구, 그 정도였는데.

왜 이렇게까지 모든 걸 잃은 기분이 들까.

델칸은 사색에 빠져 정처 없이 걸었다.

“몬드리아.”

그러다 딱딱한 어조로 델칸을 부르는 소리가 있었다.

루이드의 최측근이자 상급 기사인 고셈이었다.

“내일모레 루이드 전하께서 황궁 밖으로 외출을 나가실 거다. 너도 호위로 나가게 됐으니 준비하도록 해라.”

“알겠습니다.”

델칸은 무뚝뚝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고셈은 그런 델칸을 못마땅하게 바라봤다.

애초에 루이드의 최측근인 고셈의 눈에 샤를의 최측근인 델칸이 곱게 보일 리 없었다.

제2 왕자인 루이드와 제1 왕녀인 샤를의 세력은 왕위 후계권을 두고 서로 대립하고 있었으니.

“별로 내키지 않는 얼굴이군. 샤를 전하가 아닌 루이드 전하의 호위는 맡기 싫나?”

고셈이 괜한 시비를 걸었다.

“아닙니다.”

“샤를 전하께서 왜 너만 젠달로 보내셨을까.”

사절단의 대표가 샤를에서 루이드로 바뀌고 난 뒤, 사절단의 인력도 새롭게 편성됐다.

기술자들을 제외하고 호위로 온 기사 대부분이 루이드의 세력이었다.

거기에 샤를 곁에 항상 붙어 다니던 델칸이 꼈다.

그러니 말이 나오기 시작했다.

‘샤를 왕녀가 델칸을 버렸다.’라는.

“드디어 네가 걸림돌이란 걸 깨달으신 모양이지. 왕가의 흉이나 다름없는 너를 왜 십몇 년이나 곁에 데리고 계셨는지.”

“…….”

고셈은 자신을 똑바로 바라보는 델칸의 어깨를 치며 자리를 떴다.

“잡종이면 잡종답게 행동해.”

뚜벅. 뚜벅.

고셈의 발소리가 사라질 때까지 델칸은 그 자리에 우두커니 서 있었다.

어느덧 쌀쌀해진 바람이 그의 머리카락을 흔들고 지나갔다.

근처 건물에서 하녀 둘이 밖으로 나오며 재잘거렸다.

“네가 잘못 들은 거 아니야?”

“진짜라니까.”

“말도 안 돼.”

하녀 하나가 믿을 수 없다는 듯이 고개를 절레 저었다.

“그 다정하신 황제 폐하께서 회의 중에 검을 빼 들으셨다고?”

***

눈을 뜨니 낯선 천장이었다.

“……라고 내가 혼자 생각하면, 뭐가 달라지냐고……!”

천장은 무슨. 지금 내 눈에 보이는 건 구름 한 점 없는 푸른 하늘이었다.

차라리 정신을 잃었다가 낯선 곳에서 눈을 뜨는 편이 나았다.

왜, 그 유명한 전개 있지 않은가.

절벽에서 떨어져서 숨만 붙었는데 지나가던 마을 사람이 주워서 구해줬다거나 하는 그거.

“으아아…….”

나는 양손으로 얼굴을 가렸다.

처참하다.

“내가 인간 탱탱볼 신세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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