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9화
결국 반지 빼기는 한동안 포기하기로 했다.
지금 당장 방법이 없으니 어쩔 수 없지.
대신 내 손에서 어마어마한 존재감을 내뿜는 이 디자인이라도 어떻게 할 방법이 없을까 고민했는데.
초비가 모습을 가려주는 망토를 제작하고 남은 거라며 신기한 원단을 가져와 보석에 감쌌다.
“아예 반지가 안 보이게 다 감싸면 안 돼요?”
“그러면 성녀님 손가락이 잘려서 둥둥 떠다니는 것처럼 보일걸요?”
그건 좀 곤란하지.
덕분에 화려한 보석 반지는 링 반지가 되었다.
링에도 보석이 있어 비싸 보이는 건 어쩔 수 없었지만, 이 정도도 만족스러웠다.
“헬리는 지금 주방에 있겠지?”
디저트 대회의 본선이 내일이었다.
예선은 출품할 디저트의 그림과 맛 설명을 적어 제출하는 형식으로 진행됐다.
먹어보지 않고 맛 설명만으로 예선 통과 여부가 결정된다는 게 걱정됐는데, 다행히도 통과했다.
후후. 본선은 자신 있다.
곧 있으면 천 골드가 헬리와 내 손아귀에 들어올 거란 말이지!
본선에 나가서 시연하는 건 헬리가 맡기로 했다.
초비의 염색약이 있다지만, 모르는 사람들 앞에서 굳이 내 이목구비를 노출하는 것도 그렇고…….
무엇보다 몰래 황궁을 나가면 폐하가 곤란해질 수도 있으니.
조각상 비용도 좋지만.
내 최애(몸) 곤란하게 할 짓은 하면 안 되지. 암.
그러니 이제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란, 내일 본선에 나갈 헬리를 응원하는 것뿐!
“헬리, 준비는 잘 돼가요? ……어라?”
항상 연습하던 보조 주방으로 왔는데, 헬리의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조리대에 연습한 흔적이 그대로 있는 걸 보니, 좀 전까지 여기에 있었던 모양인데.
“본 주방에 있나?”
지금이 오후 7시쯤.
저녁까지 나갔으니 황궁 주방은 마무리 정리를 하고 있을 시간이었다.
그럼 가서 헬리 좀 찾아봐야겠다.
나는 몸을 뒤로 틀었다.
그리고 내 시야가 암전됐다.
***
“바닥도 확인해 봤나?”
……카디얀 목소리?
의식이 몽롱할 정도로 정신이 살짝 들었다.
두런두런 들려오는 대화 내용을 들어보니 성문 검문소에 있는 모양이었다.
하지만 나는 눈을 뜰 수도, 몸을 움직일 수도 없었다.
‘카디얀! 나 여기 있어요! 카디야안……!’
쿵. 쿵. 쿵.
나무 바닥을 때리는 소리가 울려 살갗을 간지럽혔다.
아마 그 바닥 아래 내가 누워있는 듯했다.
“네. 이상 없습니다.”
“통과해도 좋습니다. 다음.”
이어 마차 바퀴가 굴러가는 소리가 들렸다. 내 의식은 서서히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다시 정신을 차렸을 때는 다행히 눈꺼풀을 들어 올리는 게 가능했다.
어스름한 시야.
나는 딱딱한 바닥에 쓰러져있었다.
‘으. 여긴 어디야.’
몸을 일으키려고 했는데 다시 바닥으로 쓰러졌다.
왜 그런가 했더니 내 손목이랑 발목이 밧줄로 꽁꽁 묶여 있구나?
“…….”
뭐지, 이 상황.
그러니까…….
헬리의 주방에 갔다가, 카디얀의 목소리가 들렸다가, 정신을 차려보니 여기였다.
‘잠깐 정신을 차렸을 때 성문을 통과한다는 소리를 들은 거 같은데.’
그러면 여기 황궁 밖이야?!
갑자기 번쩍 떠오른 현 상황에 나는 어깨랑 머리를 바닥에 박아가며 상체를 일으켜 앉았다.
사물의 윤곽이 보일 정도의 어두운 공간이었다.
이것저것 뭐가 많이 있는 걸 보니 사람이 살지 않는 창고 같은 곳인가.
쿠울. 쿨.
“어?! 헬리!”
등 뒤에서 사람 숨소리가 들리길래 돌아봤더니 헬리가 바닥에 누워 잠들어 있었다.
헬리랑 같이 잡혀 온 건가?
“헬리, 헬리. 정신 차려 봐요.”
나는 발끝으로 헬리를 툭툭 두드렸다. 손이 등 뒤로 묶여 있어서 어쩔 수 없었다.
어깨까지 흔들어 봐도 헬리는 요지부동이었다.
누가 업어 가도 모를 정도로 깊은 잠에 빠진 모양이었다.
‘지금 밤인가? 아니면 새벽?’
황궁을 나오고 시간이 얼마나 흘렀는지도 모르겠다.
배가 미친 듯이 고프지 않은 걸 보면 그렇게 오랜 시간이 지난 것 같지는 않은데.
일단 여기서 빠져나갈 방법부터 찾아야겠네.
혹시 밖의 소리를 들으면 어딘지 알 수 있을까 싶어 청력에 집중했다.
“……사람 두 명 데리고 황궁 밖으로 나오기가 얼마나 힘든지 아나? 이봐, 쿠이제. 그것도 다 계산해서 줘야 할 거야.”
“한 명은 네 멋대로 데려온 거잖아. 그리고 윅, 네가 먼저 사람 빼 오기 좋은 마차가 있다고 접근했으면서 너무 돈, 돈 하는 거 아니야?”
남자 두 명의 목소리가 들렸다.
이름이 쿠이제랑 윅……인가? 누구지?
그런데 사람을 빼 오다니.
헉. 설마 성녀라고 납치당한 건가?
헬리는 나 때문에 같이 잡혀 온 거고?
헬리, 제가 크나큰 민폐를…….
“하녀는 왜 잡아 왔어? 몽블랑만 있으면 되는데.”
“헬리 몽블랑이랑 대회에 공동 참가한 하녀더군. 몽블랑이 본선에 나가지 못하면 하녀가 대신 나갈 게 아닌가? 그래서 데리고 왔지.”
“오오. 윅. 노련해.”
덤은 나였나?!
대화 내용을 더 들어보니 본선은 아직 시작하지 않은 모양이었다.
그럼 지금은 본선 전날 밤이거나 당일 새벽이겠네.
“헬리 몽블랑. 그러길래 황궁에 처박혀 살지. 왜 밖으로 나오려고 해서 말이야.”
쿠이제라는 사람이 조소했다.
뭐 둘의 대화를 듣자 하니,
헬리가 황도에서 잘 나갔을 때 같은 요리사였던 쿠이제가 헬리를 질투했다.
헬리가 황궁으로 들어가고 이제 황도는 자기 세상이라 생각했는데, 대회에 참가하는 걸 알고 거슬렸다.
그래서 헬리가 대회에 참가할 수 없게 납치했다.
정도가 사건의 자초지종인 듯했다.
‘그렇게 똑똑한 사람들은 아닌가 봐.’
대회 참가를 저지하고 싶었으면 다른 수도 많았을 텐데.
굳이 황궁에까지 잠입해서 납치하다니.
간이 배 밖으로 나왔거나 머리가 안 좋거나.
그러면 여긴 대회가 끝날 때까지 갇혀있는 건가.
으. 대회에 참가하자고 말 꺼낸 건 나잖아.
헬리한테 미안하다. 열심히 도와줬는데.
내가 저 인간들 얼굴 꼭 확인해서 기억하고야 만다.
황궁 감옥에서 콩밥 좀 먹어봐야 납치가 얼마나 나쁜 일인 줄 알지.
“쿠이제, 저 두 사람은 계획대로 진행할 건가?”
계획? 이다음에 또 계획이 있어?
윅의 물음에 쿠이제가 답했다.
“당연한 소리를. 하녀는 뭐, 휘말린 게 안타깝지만 어쩌겠어. 계획대로 둘 다 죽여야지.”
“뭐?!”
“…….”
앗. 나도 모르게 너무 큰 소리로 외친 모양이었다.
죽인다니. 놀라서 그만.
대화가 끊기고 밖에서 경계하는 듯 정적이 흘렀다.
“왜 그래, 윅?”
“잠시, 안에서 무슨 소리가 난 거 같은데.”
들리는 소리로 가늠해보자면, 두 사람은 우리가 갇힌 건물에서 좀 떨어진 곳에 있었다.
그러니 방금 내가 지른 소리도 벽에 막혀 제대로 들리지 않았을 확률이 높았다.
자는 척하자. 자는 척.
나는 열심히 움직여 다시 헬리 옆에 가만히 누웠다.
“조용한데?”
“잘못 들었나.”
문이 열고 안을 확인하는 소리가 들리더니 다시 닫혔다.
한 번 경계해서인지, 사뭇 은밀해진 쿠이제의 목소리가 문 너머로 들려왔다.
“그러니까, 내일 죽여.”
***
여느 때와 다르게 조용한 새벽이었다.
알렌드는 지저귀는 새소리를 들으며 책장을 넘겼다.
오늘인가.
그 열심히도 준비하던 대회의 본선이.
시아나 프라단을 통해 알아본 봐, 성녀는 황궁에 남는다는 듯했다.
그러니 아침 일찍 출발할 주방장을 격려하러 갔는지도.
오늘은 제가 첫 번째 순위에서 밀려난 모양이었다.
똑똑.
알렌드는 노크 소리에 고개를 들었다.
아직 헨켈이 올 시간은 아닌데.
[폐하!]
그의 머릿속에서 환히 웃는 성녀의 얼굴이 떠올랐다.
그러고 보니 가끔 서재에 문을 두드리고 쳐들어올 때가 있었다.
이번에도 이해할 수 없는 황당한 부탁을 하려고 찾아온 건가.
알렌드는 피식 웃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아침부터 무슨…….”
“폐, 폐하.”
문을 열자 모습을 드러낸 사람은 성녀가 아닌 시아나 프라단이었다.
“시아나. 무슨 일인가.”
안절부절못하는 그녀의 모습에 알렌드는 미간을 좁혔다.
시아나 프라단.
그녀가 어떤 위인인가.
불과 일 년 전까지만 해도, 젠달의 사교계는 시아나 프라단을 중심으로 돌아가고 있었다.
외모, 인맥, 재력, 재능…….
모든 것이 화려한 그야말로 탐스럽게 만개한 붉은 장미 같은 여자였다.
그런 그녀가 성녀가 소환되고 얼마 지나지 않아, 자신을 찾아왔다.
“성녀님의 전담 시녀가 되고 싶어요.”
하지만 성녀를 맡기기엔 자신과 시아나 프라단은 쌓은 신뢰가 없었다.
거절하였더니 그다음 날 충성 계약을 패로 들고 나타났다.
성녀의 전담 시녀가 되고 싶다는 소원을 들어준다면 제 목숨을 건 충성 계약을 맺겠다며.
까닭은 모르나 시아나 프라단은 성녀에게 진심이었다.
그런 그녀가 이렇게 사색이 되어 제 앞에서 무릎을 꿇을 일이 달리 뭐가 있겠는가.
“성녀님께서 사라지셨습니다.”
순간 거대한 바위가 알렌드를 찍어 누르는 듯했다.
하지만 그는 태연한 척을 하며 시아나에게 물었다.
“사라지셨다니. 지난번처럼 황궁 내를 산책하고 계시는 것일 수도 있지 않은가.”
“하, 하지만. 지난밤 헬리 몽블랑을 찾아가신다고 하셨는데, 자정을 넘기도록 오지 않으시고……. 그래서 주방, 주방으로 가보니 정리가 하나도 되지 않은 주방에 사람만 없어진 듯한…….”
알렌드는 불안한 기색이 역력한 시아나를 살폈다.
어젯밤부터 지금껏 성녀를 찾아다녔는지 항상 단정했던 시아나의 머리가 마구 흘러내려 헝클어져 있었다.
“…….”
아무래도 소동으로 끝날 단순한 실종이 아닌 것 같군.
알렌드는 급히 겉옷을 걸치고 서재를 나섰다.
“시아나.”
“네.”
“헨켈과 에본에게 내 집무실로 오라 연락하게. 그리고 연구소장에게도.”
“무엇을 하시려고요…?”
“찾으러 가야지. 성녀께서 실종되셨다며.”
복도를 빠져나가는 알렌드의 빠른 걸음이 그의 초조함을 대변해주고 있었다.
***
“와, 진짜요? 진짜 멋있다. 아저씨 사람 아니죠? 어쩜 그렇게 멋있지.”
“멋있냐? 꼬맹이, 네가 사람 볼 줄을 좀 아는구나?”
“그럼요! 얼마나 강하면 17 대 1로 싸워서 이겨요?”
양 엄지까지 세워서 추켜올려줬더니 윅은 점점 더 신나서 거들먹거렸다.
이 우물 안 아저씨야, 우리 폐하는 군대랑 혼자 싸워서도 이기거든.
하지만 나는 지금 이 인간한테 얻을 정보가 있었다.
“그런데 우리 주방장님은 어디로 가신 거예요?”
“쿠이제가 알겠지. 그자가 직접 처리한다고 데려갔으니까.”
쿠이제. 윅의 의뢰인 이름이었다.
직접 처리한다니.
이 사람들한텐 사람 목숨이 그렇게 쉬운가.
“헉. 저희 주방장님 죽어요?”
“그렇겠지? 왜. 무섭냐?”
“아, 아뇨. 분해서요.”
“분해? 뭐가?”
윅의 눈이 의미심장한 빛을 띠었다.
난 윅에게 보란 듯이 양 주먹을 불끈 쥐었다.
아까 간, 쓸개 다 빼줄 것처럼 딸랑거렸더니 윅은 나에게 손발의 자유를 주었다.
후후. 후회할 거다.
어쨌든 지금은 그 타이밍이 아니지만.
“저 사실 주방장님한테 당한 게 많아서요. 제가 타지에서 왔는데, 여기 텃세가 장난 아니더라고요. 그래서 주방장님 살아계실 때 뒤통수 한 번 때리는 게 제 소원이었데, 죽는다고 하시니까 영원히 이룰 수 없는 소원인가 싶고…….”
헬리, 혹시 주변에 잡혀 있는 거면 귀 막아주세요.
이건 제 진심이 아닙니다.
“…….”
윅은 조용히 날 훑어봤다.
숨 막히는 묘한 긴장감이 흘렀다.
와씨. 살인해 본 사람이라고 생각하니까 무섭네.
“야, 이 꼬맹이!”
퍽. 윅의 거친 손이 내 등을 강타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