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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략 황제의 외모가 내 취향이라 곤란하다-28화 (28/150)

28화

염색약을 쓴다는 건 무슨 소리인가!

더는 불특정 다수가 내 머리카락만을 보고 ‘성녀님!’이라 알아볼 일이 없다는 소리였다.

그래서 나는 황궁 내를 이전보다 많이 돌아다녔다.

폐하 얼굴, 프로딘타 궁, 예배당만 쳇바퀴처럼 돌던 이전과는 달리, 황궁을 구경할 수 있는 나름의 자유가 생겼달까.

그러다가 델칸 몬드리아와 우연히 마주칠 일이 몇 번 있었다.

“저기, 나 기억나?”

“안녕, 어디 가는 길이야?”

“무겁겠다. 들어줄까?”

델칸은 날 볼 때마다 좋아서 어쩔 줄 모르는 강아지처럼 와서 꼬리를 흔들었다.

친화력 만렙이라는 레트리버가 사람으로 환생하면 이런 모습일까.

알 턱이 있나.

내 인생에서 꼬리 흔들고 다가오는 댕댕이가 있었어야 말이지……!

어쨌든 그런 우연한 만남이 4번 정도 반복됐을 때쯤, 우리는 서로의 고민 상담을 해줄 수 있을 정도의 절친이 되어있었다.

“말도 편하게 해. 리리. 우린 이제 친구니까.”

신분 상관없이 지내자 해서 말도 놓았다.

미남이 친근함까지 겸비하면서 다가오는데 밀어낼 수 있는 사람?

적어도 난 아니다. 흑흑

계속 이름을 물어보는 바람에 ‘리리’라는 가명도 만들어버렸지 뭐야.

“상사한테 같이 가 준다고? 우리 주방장님?”

“응. 리리만 괜찮다면.”

델칸은 날 헬리의 조수로 알고 있었다.

그래서 윗분께 돌려줘야 하는 반지라고만 말했더니 헬리를 생각한 모양이었다.

하지만 반지의 주인은 우리 폐하지.

절대 델칸을 데려갈 수 없다.

생각해봐라.

우리 폐하 앞에 가서.

[폐하, 제가 반지는 못 돌려드리는데요, 제 친구가 같이 사과해준대요. 얘가 누군데 같이 사과를 하냐고요? 하하. 보니아 왕국에서 온 기사인데…….]

[같이? 재밌네.]

다정한 황제 연기고 뭐고 연대 책임으로 델칸이 같이 똥개 훈련을 받게 될지도 몰랐다.

아, 그전에 내가 성녀인 걸 들키겠구나.

‘델칸한테 내가 성녀라는 걸 말해야 하나?’

하지만 때론 상대의 정체를 몰랐을 때 유지되는 친구 사이가 있지.

그게 나와 델칸이 되지 말란 법은 없었다.

무엇보다, 나 여기에 친구 한 명도 없다고. 흑흑.

물론 좋은 사람은 많지만, 허물없이 지낼 수 있는 친구는 또 다른 느낌이다.

“아냐, 내가 알아서 해야지.”

“그래……?”

델칸은 보이지 않는 꼬리를 추욱 내렸다.

크흡. 우리 폐하도 저런 거 해줄 때가 있었는데. 연기였긴 했지만.

‘그나저나.’

아무리 봐도 델칸은 천연이었다.

자기가 잘생긴 줄도 모르는 데다가, 기본적으로 타인에게 쳐 놓은 벽도 없어 금세 사람을 홀려 버리는-!

그러니까 날 하녀라고 생각하면서도 ‘우리 친구 하자.’ 이런 소리를 한 거겠지.

무서운 델칸 몬드리아.

저 얼굴로 계산 없는 다정남 재질이라니.

“델칸, 너 사람 조심해.”

“응?”

“길 가다가 아무한테나 웃어주지 말고. 모르는 사람이 먹을 거 준다고 그래도 친절하게 대해주지 말고.”

내가 우리 폐하가 있으니까 지금 너한테 안 넘어가지.

안 그랬으면 친구고 뭐고 없었다.

“그러다 길거리에서 너 하나 두고 치정 싸움이 일어날 수도 있다니까.”

“그게 무슨 소리야, 리리.”

델칸이 어색하게 웃으며 눈길을 놀렸다.

하지만 나는 진심으로 델칸이 걱정됐다.

이 순정만화 주인공 같은 얼굴로, 아무한테나 친절하게 대하고 다닌다면…….

진짜 길거리에서 델칸이 내 남자라며 치정 싸움이 벌어질지도 모르는 일이다.

우리 폐하 같았으면 서로 칼에 찔리든 말든 제 갈 길 갈 테지만.

델칸은 자기를 두고 싸우는 사람들을 화해시키려고 노력할 거 같단 말이지.

이런 캐릭터들이 다같살이나 다같죽 엔딩을 보더라니까……!

“내가 아는 사람 중에 네가 두 번째로 위험해.”

“첫 번째는 누군데?”

첫 번째는 당연히 우리 폐하지 누구겠는가.

델칸이 대형견 재질이라면 우리 폐하는 페로몬 계였다.

아주 분위기부터 위험하지.

크흐. 이런 거 어디 가서 자랑도 못 하고.

아쉽다. 아쉬워.

“나도 아는 사람이야?”

델칸은 연달아 질문했다.

포인트는 ‘네가 너무 잘생겨서 위험하니 사람들 조심해라.’라는 거였는데.

아무래도 델칸은 첫 번째가 누군지에 대해 궁금증이 생긴 듯했다.

헉. 설마 폐하인 거 알았나?

“왜?”

“궁금해서. 리리의 첫 번째라니, 부럽잖아.”

“와.”

엄청난 대사를 날린 것치고 델칸의 얼굴은 평온하기 그지없었다.

저 순수한 눈망울을 봐라.

저, 저……!

“야, 델칸. 너 진짜.”

절대 폐하랑 마주치게 하면 안 되겠다.

델칸은 내 친구 이전에 남녀노소를 막론하고 넘어가는 마성의 남자다.

“첫 번째는 소개 못 해주거든……?”

노리지 마라. 마성남.

우리 폐하는 이제 실연 따위 겪으면 안 된다고!

***

젠달에는 전설로 내려오는 황후의 이야기가 있었다.

바버논 왕국이 두 번째 성녀를 소환하기 이전의 시대.

신성 부대를 이끌며, 참전한 모든 전쟁에서 개선한 승리의 상징.

그런 황후의 왼손 약지에는 항상 반지가 있었다.

‘수호의 반지.’

온갖 신성력의 공격이 난무하는 전쟁터에서 황후를 지켜줬다는 아티팩트.

역사는 개선한 황후의 몸에 어떤 상처도 남지 않았다고 기록했다.

세월이 흘러 황후가 운명하고, 반지 또한 행방을 알 수 없게 되었다.

‘수호의 반지’를 찾으려는 후대의 황제들이 몇 있었으나 모두 찾지 못하였다.

그렇게 반지는 역사 속으로 사라진 듯했다.

며칠 전 일이 아니었으면.

알렌드는 찾는 물건이 있어 루와 함께 황제의 보물 창고에 들어갔다.

물건을 찾고, 돌아가려고 루를 불렀는데.

“갸옹, 갸오옹.”

“루, 그건 뭐지?”

보물 창고의 구석에서, 루는 날개까지 파닥거리며 신이 나 무언가를 굴리고 있었다.

“반지 보관함?”

“갸오오옹!”

루가 알렌드에게 갖고 놀던 장난감을 뺏겨 성질을 냈다.

알렌드는 개의치 않는 얼굴로 보관함을 살폈다.

세이칸의 상징인 검은 독수리를 투박하게 세공한 정육면체 형태의 평범한 나무 보관함.

뚜껑을 열지 못하도록 강한 봉인이 걸려있었지만, 알렌드에게 별다른 문제는 되지 않았다.

보관함을 연 알렌드의 벽안에 이채가 어렸다.

보관함의 평범함과는 달리 찬란한 자태를 뽐내며 빛나고 있는 반지.

수호의 반지에 관한 외형묘사는 전해 내려온 바가 없었지만, 알렌드는 지금 제 손에 있는 게 그 반지라 확신했다.

보관함 뚜껑의 안쪽, 황후의 출신 지역인 하르텐의 고대어로 적힌 문구.

[이사벨라 아벨리어의 의지가 이곳에 잠들다. 의지를 가진 자여, 반지는 영원토록 그대를 수호할 것이다.]

가장 먼저 등장한 황후의 이름. 그리고 반지의 가장 큰 보석에서 느껴지는 거대한 신성력.

무색의 신성석은 수호를 상징했다.

‘이런 곳에 있었군.’

알렌드는 반지도 챙겨 보물창고를 나왔다.

그리고 돌아가는 길에 우연히 익숙한 얼굴을 발견한 것이다.

“…….”

그는 순간 제 눈을 의심했다.

하녀 복을 입은 긴 갈색 머리의 여자.

황궁의 주방 건물로 걸어가고 있는 저 사람은 분명 성녀였다.

이번에는 또 무슨 일을 꾸미는가 하고 알아봤더니.

주방장 헬리 몽블랑과 요리대회를 나가는 모양이었다.

저러다 무슨 일이 생기겠군.

사고를 친다는 의미는 아니었지만, 성녀는 본인의 의지와 상관없이 주변에 크고 작은 사건이 끊이질 않았다.

그렇다고 열심히 하는 일을 말릴 수는 없는 노릇이고.

일단은 뭐라도 쥐여 줘야 안심이 될 것 같았다.

그래서 황후의 반지를 줬다.

“꼭 돌려드릴게요!”

그런 반응이 나올 줄은 어느 정도 예상했지만, 제 선물이 그렇게까지 받기 싫은가 싶어 살짝 서운한 마음이 들었던 것도 사실이었다.

답례라고까지 말했는데, 그렇게 기를 쓰고 안 받으려고 할 정도는 아니지 않나.

그리고 반지를 준 것이 단지 대회 때문만은 아니었다.

“으아아악!”

사내의 비명이 꿉꿉하고 어두컴컴한 지하 감옥을 채웠다.

지난번 초비가 갇혔던 감옥이 있는 곳에서 3개의 층을 더 내려가야 나오는, 황궁에서 가장 깊숙한 감옥이었다.

“…….”

알렌드는 회상을 그만두고 감옥 안으로 눈길을 돌렸다.

갖은 고문과 심문으로 너덜너덜해진 남자가 의자에 결박당한 채 사지를 잘게 떨고 있었다.

이틀 전, 한밤중에 프로딘타 궁을 침입하려다 알렌드에게 잡힌 암살자였다.

‘구멍이 있으니 쥐새끼들이 질리지도 않고 들어오는군.’

알렌드가 지냈던 니세포르엘 신전의 결계는 한 번도 침입자를 허용한 적이 없는 철벽의 요새였다.

결계에 공급되는 헤이즐의 신성력이 안정적이라는 게 제일 큰 이유였지만,

니세포르엘 신전이 출입자를 철저히 통제하고 있다는 점도 무시할 수 없었다.

허락된 자만이 들어올 수 있는 폐쇄적인 공간.

하지만 황궁은 그럴 수 없었다.

황궁의 결계는 6명의 신관이 날마다 유지하는데 필요한 양의 신성력을 나눠 공급했다.

그러나 결계는 언제 올지 모르는 외부공격에 대응하기 위한 것일 뿐.

많은 사람이 출입하는 입구의 통제는 철저히 인력에 기댈 수밖에 없었다.

그러다 보니 가끔 이런 쥐새끼가 인파에 껴서 들어오는 일도 있었다.

“말해라. 널 보낸 이가 누구지. 성녀님을 암살하라는 명령을 받고 잠입한 건가.”

“헤……. 흐헤헤…….”

헨켈의 심문에 남자는 실실 웃으며 침을 흘렸다.

“백치가 된 모양이군.”

“죄송합니다.”

이틀 동안 만족스러운 정보 하나 얻지를 못했는데.

면목이 없어진 헨켈이 허리를 숙였다.

“경 잘못이 아니네. 잡혔을 때를 대비해 정신 조작을 해놓은 모양이야.”

질이 좋지는 않았다.

보아하니 암살자인 남자가 임무에 실패할 시 정보 발설을 금하고, 일정 시간 후 정신을 파괴하는 방식인데.

덕분에 이쪽은 이틀을 낭비했다.

암살자도. 바로 정신이 파괴됐다면 고문의 고통을 느끼지 않아도 됐겠지만, 쥐새끼의 사정까지 생각해줄 필요는 없지.

“잘된 일이네. 정신은 회복할 수가 없어 안 건드리려고 했는데, 저쪽에서 먼저 망가트려 줬으니.”

알렌드는 감옥 안으로 들어와 암살자의 머리 위로 손을 펼쳤다.

손에서 넘실거리던 신성력이 짙은 자줏빛으로 변해 암살자의 몸에 침투했다.

암살자는 짧게 경련하다 고개를 뒤로 휙 젖히더니 낄낄 기분 나쁜 웃음을 흘렸다.

마치 지금 몸에 들어온 신성력이 마음에 들기라도 한 것처럼.

괴이한 웃음소리가 잦아들자 알렌드가 물었다.

“누가 너에게 이번 일을 맡겼지?”

암살자의 벌려진 입에서 갈라진 목소리가 한 음절씩 흘러나왔다.

“데……르……아……치…….”

데르아치 대공.

헨켈이 곧장 고개를 돌려 알렌드의 안색을 살폈다.

“…….”

알렌드의 오른쪽 눈썹이 눈에 띄게 올라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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