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7화
“연구소장이랑 일하는 건 괜찮은가?”
폐하의 질문에 나는 눈을 끔뻑였다.
몇 주 동안 청소를 효율적으로 해보겠다던 초비의 활약이 눈에 선했다.
빗자루 네 개를 풍차처럼 붙여서 돌리다 성배를 하나 찌그러트리고, 자동으로 물청소해주는 기계를 발명했다며 예배당을 물바다로 만들고.
하지만 근신 때문에 곤란한 사람을 고자질할 수는 없지, 없어.
“일 잘하죠. 초비.”
“연구소장이? 성녀가 좋아하는 얼굴이라서 평이 후한 건가.”
“제가 무슨 얼굴만 밝히나요……!”
네. 얼굴만 밝힙니다.
미인 최고.
뭐 이런저런 일이 있었지만, 솔직히 말해서 초비도 미인이었다.
앙칼진 고양이 같은 면이 있달까.
젠달엔 왜 이렇게 미인들이 많은 거야. 여기가 천국이다.
“얼굴만 밝히는 게 아니시다?”
“그럼요.”
“흐음.”
폐하는 다 안다는 얼굴로 피식 웃었다.
윽. 내 심장.
저 미소는 볼 때마다 새롭다.
폐하 입술 색이랑 똑같은 틴트 나오면 완판되지 않을까.
레시피 대회 1등 하는 것보다 그게 돈을 더 잘 벌겠는데……?
“지난번에 준 선물은 잘 쓰고 있어.”
폐하가 손목을 흔들었다.
흰색 셔츠의 커프스에 사파이어가 반짝였다.
그 귀하신 곳에 제 누추한 것이 있으니 참으로 더 누추해지는군요.
크흡. 폐하 좀만 기다려요. 제가 꼭 1등 해서 호강시켜 드릴게요.
오늘 오후에도 헬리와의 레시피 연구 일정이 있었다.
요새는 헬리가 더 적극적인 게, 이렇게 든든할 수가 없다.
“그래서 말인데.”
“네?”
“손.”
“네.”
“…….”
갑자기 시야에 폐하의 손바닥이 들어오고, 손을 찾으시길래 얹었다.
아무 생각 없이.
“……폐하, 지금 웃으려 하셨죠,”
“달란다고 정말 바로 줄 줄은 몰라서 말이야.”
그러니까 말이야.
왜 훈련된 강아지처럼 몸이 제멋대로 움직여서-!
‘이놈의 손!’
아주…….
아주 기특해……!
폐하의 손바닥과 내 손바닥 사이의 간격은 0.5cm 정도.
이 아슬아슬하게 닿지 않는 간격이 이렇게 완벽할 수가 없다.
“기왕 웃어주실 거면 청량하게 웃어주시면 좋겠는데요!”
“……그건 아직도 포기 안 했나?”
“당연하죠!”
내가 이 세상 뜨기 전엔 그 웃음 보고야 만다.
“그때도 말했지만.”
폐하는 내 손등 위로 다른 손을 펼쳤다.
기습 공격에 심장이 철렁 내려앉았지만, 직접 손이 닿지는 않았다.
닿았으면 나 지금 세이칸 신 만났어.
폐하의 양손과 내 오른손은 사이사이 간격을 두고 샌드위치처럼 포개졌다.
“그렇게 보고 싶으면 웃겨 보든가.”
“그게 말처럼 쉽지 않거든ㅇ……. 어?”
폐하는 도발과 동시에 두 손을 거뒀다.
나는 허공에 남은 내 오른손을 보고 놀라 얼빠진 소리를 냈다.
“…….”
폐하가 손도 안 대고 스쳐 지나간 내 오른손 검지엔 반지 하나가 껴 있었다.
중앙엔 손톱만 한 타원형의 무색 다이아몬드를 연상케 하는 보석.
그 보석의 테두리를 같은 빛의 작은 보석들이 감쌌다.
반지의 고리는 엑스(X)자 패턴으로 세공됐는데, 그 사이사이에도 보석이 들어가 있었다.
거기에 얼마나 보석 컷팅을 정성 들여서 했는지, 손가락을 살짝 움직일 때마다 반짝이고 난리가 났다.
한마디로, 무진장 비싸 보인다는 소리였다.
내 9년 4개월 치 봉급인 조각상 정도는 우습게 제작하고도 남을 만한.
“성녀가 그때 했던 게 이런 거였나?”
“제가 뭐, 뭘 했는데요……?”
과거의 내가 무슨 짓을 했길래 이런 무시무시한 물건이 내 손가락에 자리를 잡은 건가.
흔들리는 눈으로 폐하를 바라보니, 폐하는 양손을 한 바퀴 굴리고는 무언가를 떨구는 시늉을 했다.
“종이꽃 나오게 하는 거요?”
“그래.”
“그…….”
그거랑 이거랑은 수준이 다르거든요……!
손가락에 반지 끼우는 느낌도 안 났다.
역시 세이칸에게 편애 받은 피조물.
한번 본 걸 이렇게까지 응용하는 건 대단하지만, 이런 무서운 걸 소품으로 삼지는 말아주셨으면-!
“저보다 더 잘하시는데요. 그러니까 이제 이건 다시 가져가시……어라?”
슬쩍 반지를 빼서 드리려고 했는데, 마음처럼 쉽지 않았다.
“이, 이게 왜 안 빠지지? 잠시만요, 폐하. 이걸……으윽. 익……. 왜 안 빠지…….”
그렇게 꽉 낀 것도 아닌 거 같은데 반지는 도통 빠져나올 생각을 안 했다.
초반엔 힘주기도 무서워서 살살 빼려던 것을, 지금은 있는 힘껏 용을 쓰고 있는데도.
“안 빠지면 어쩔 수 없지. 그냥 성녀가 하고 다녀야겠군.”
“아, 아니에요!”
폐하의 말에 나는 고개를 황급히 저었다.
그럴 순 없었다.
왜냐하면,
“전 이런 거 살 돈 없다고요……!”
“돈?”
폐하가 황당하다는 듯이 물었다.
“내가 이걸 성녀한테 강매라도 할 사람처럼 보인다는 건가?”
반사적으로 ‘네’라고 대답할 뻔했네.
어쨌든 이렇게 비싸 보이는 걸 손에서 안 빠진다는 이유로 날름 먹어버릴 수는 없었다.
“폐하, 이거 얼마예요?”
“그거 가짜야.”
“……거짓말이죠?”
폐하는 어깨를 으쓱했다.
“좋아. 성녀가 또 황당한 생각을 하기 전에 솔직히 말하지.”
“뭘요?”
“그 반지. 성녀한테 주는 거야. 커프스단추의 답례로.”
말도 안 되는 계산법에 잠시 사고가 멈췄다.
그러니까, 내 작고 소중한 월급으로 산 단추가 성 한 채는 살 수 있을 법한 반지가 되었다는 건가?
그게 말이 돼?
금도끼 산신령도 기함할 스케일이었다.
그리고 우리 폐하는 뭐 하나 줬다고 답례가 돌아올 만큼 상냥한 사람이……!
“……헙.”
설마, 그런 건가.
나는 양손으로 입을 가렸다.
[야, 오늘 내가 기분 좋은 데 한턱낸다! 다 시켜, 다!]
사람이 기분 좋으면 통이 커진다고.
그러다 술자리에서 한 달 치 생활비 탕진한 선배도 있었지.
폐하도 그런 상태인 게 분명했다.
‘큰일 났다.’
등줄기로 식은땀이 흘렀다.
폐하가 제정신으로 돌아온다면.
그리고 이대로 영영 내 손에서 반지가 빠지지 않는다면……!
[갚으세요.]
[네?]
[갚으라고.]
평생 폐하의 소원을 들어주는 지니가 될지도 모른다.
지난날의 똥개훈련을 하던 내 모습과 빚쟁이가 될 내 모습이 겹쳐 보였다.
‘안 돼!’
나는 주먹을 불끈 쥐었다.
그 와중에 눈치 없는 반지는 화려하게 빛나고 난리다.
자기 준 사람 닮아서 존재감 확실하네. 아주.
“폐하, 혹시 나중에 마음이 바뀌시더라도 걱정하지 마세요.”
“…….”
“제가 반드시 돌려드릴 테니까.”
***
“와, 이거 안 되겠는데요.”
한참을 반지와 씨름하던 초비는 포기선언을 하고 뒤로 물러났다.
“차라리 손가락을 자르고 다시 붙이는 게 낫겠어요.”
“그게 가능해요?”
초비의 말에 나는 반지 낀 검지를 까딱였다.
“가능하죠. 치료 계통의 신성력을 사용하면…… 아, 성녀님께서 직접 하셔도 되겠네요! 선대 성녀들은 모든 계통의 신성력을 사용했다던데, 성녀님께서도-.”
“두 분, 끔찍한 소리 나누지 마세요.”
날 따라 예배당에 온 시아나가 타이밍 좋게 초비의 말을 막아줬다.
전대 성녀들은 그랬단 말이지……?
다 가졌네, 다 가졌어.
하지만 우리 폐하와 같은 시대에 사는 내 각막은 가지지 못했지.
신성력 따위가 뭔 소용이냐.
그게 폐하 얼굴 보여주는 것도 아닌데.
“그런데 그거 꼭 빼셔야 해요?”
뜬금없는 초비의 질문에 나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아까도 말했지만, 폐하한테 돌려드리려면 빼야 하는데요?”
“그냥 달라고 하시면 안 돼요? 성녀님께서 부탁하시는데 쪼잔하게 안 주시겠어요? 돈도 많으신데.”
“초비, 너 지금 무슨 언행을…….”
“허퍼슨, 넌 다른 기관으로 발령 안 나냐? 같이 일하려니까 잔소리하는 선생님 같아서 짜증난다. 야.”
“너……!”
허퍼슨이 뒷목을 잡았다.
이내 예절 강의를 하는 허퍼슨과, 짜증 내는 초비가 아웅다웅하기 시작했다.
여느 때와 다름없이 평화롭군.
‘오늘 반지 빼기는 글렀네…….’
일이나 하자.
빗자루를 집어 들다가, 옆자리의 시아나와 눈이 마주쳤다.
생긋 미소 짓는 그 모습이 무척 믿음직스러운 게…….
“시아나는 혹시 반지 빼는 법-.”
“폐하는 주실 거예요.”
“응?”
“그렇지만 성녀님께서 반지가 마음에 안 드셔서 빼시려는 거면, 저희 가문에서 마음에 드시는 걸로 해드릴 수도 있고요.”
오랜만에 시아나가 눈을 빛내며 고혹적으로 웃었다.
“그것보다 더 좋은 보석으로 해드릴게요. 색은 어떤 걸 원하세요? 적색? 녹색?”
“아, 아니……. 나 반지 싫어해…….”
***
결국 별 소득 없이 퇴근했다.
그리곤 저녁을 먹고, 폐하 얼굴을 한 번 보고.
헬리를 만나려면 아직 시간이 남았기에 염색약을 사용한 뒤, 연구소 옆 연못가로 갔다.
“진짜 이걸 어떻게 빼지?”
반지는 석양의 노을빛을 반사하며 빛났다.
진짜 이쁘긴 엄청 이쁘네.
나는 고개를 돌렸다.
무엇을 숨기리, 내 옆에는 아까부터 보니아의 깐머리 미남이 앉아 있었다.
“무슨 짓을 해도 안 빠져?”
“응.”
어쩌다 이렇게 서로 말을 놓을 정도로 친해진 건지.
델칸은 반지가 안 빠지는 게 제 손가락이라도 된 것처럼 걱정스러운 눈빛을 보냈다.
“못 빼면 어떻게 되는데?”
“빚쟁이 신세……?”
깜짝 놀란 델칸의 회색 눈이 동그래졌다.
델칸도 진짜 잘생겼단 말이야.
크흡. 이 미남이랑은 스쳐 지나가는 인연이 되고 싶었는데…….
불가항력이었다.
보니아의 미남, 델칸 몬드리아는.
“리리, 상사한테 내가 같이 가서 말해줄까?”
무서운 친화력을 가진 천연 다정남이었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