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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략 황제의 외모가 내 취향이라 곤란하다-25화 (25/150)

25화

시아나와 나는 별궁의 창문 너머로 본궁 입구에 멈춰선 행렬을 구경하고 있었다.

고풍스럽고 화려한 마차에서 한 남자가 내렸다.

“저 사람이 보니아 왕국의 왕자?”

“네. 루이드 애팅거라고, 샤를 애팅거 왕녀의 오라버니예요.”

“샤를 왕녀님이랑 별로 닮진 않았네.”

거친 야생마 같은 느낌의 남자였다.

샤를 왕녀님이 요정 같다면, 저 왕자는 어디 조직의 보스 같달까.

치켜 올라간 눈꼬리 때문에 인상이 더 날카롭게 보이는지도.

“이복형제라 그런 거 아닐까요?”

“이복형제?”

“보니아의 애팅거 왕은 왕비 한 명에 정부 한 명을 뒀거든요. 막내인 샤를 왕녀가 왕비의 핏줄이고 다른 두 왕자가 정부의 핏줄이래요.”

“샤를 왕녀님이 막내셔?”

“네. 그런데 왕위 계승 서열 1순위는 적통인 샤를 왕녀예요. 그다음이 제2 왕자인 루이드 애팅거죠. 지금은 그 두 사람이 왕위 다툼을 하고 있나 봐요. 제1 왕자는 선천적으로 병약해서 왕위 계승 싸움을 할 만한 위인이 못 되고요.”

타국의 왕실 사정을 줄줄 꿰는 시아나에게 감탄하는 와중에, 내 시선을 잡아끈 얼굴이 있었다.

“오.”

“아는 분이 계세요?”

“……응? 아니, 잘생긴 사람이 있어서.”

행렬의 후열에 백마를 탄 깐머리 미남이 있었다.

주변의 기사들과는 달리, 몸에 걸친 복식부터 멀끔하고 세련됐다.

보니아에서 여기까지 오는데 며칠은 걸렸을 텐데, 저렇게 풀 세팅된 차림이라니.

왕자보다 저쪽이 더 왕자 같다.

꾸미는 걸 좋아하는 기사인가?

“말 목덜미만 보고 있는 저 기사분요? 숫기가 없는 분인가 봐요. 주변을 통 못 보고 있네요.”

“에이, 저렇게 꾸몄는데 숫기가 없을까……?”

“보세요.”

시아나가 가리킨 곳에는 백마 탄 미남을 보고 멀리서 꺅꺅거리는 하녀들이 있었다.

미남은 그런 하녀들과 우연히 눈이 마주치자, 황급히 고개를 돌려 다시 말 목덜미로 시선을 고정했다.

“그런가……?”

나는 볼을 긁적였다.

특이한 기사지만, 상당한 미남인 건 분명했다.

왜냐면 내 눈은 이 젠달에 널린 얼굴 천재들 때문에 높아져 버릴 대로 높아져 버렸거든.

그런 내 눈이 잘생겼다고 말할 정도의 미남이라니.

폐하의 미모를 몰랐더라면 나도 저기서 하녀들과 꺅꺅거리고 있었을 게 분명했다.

……아마 난 평생 연애 못 할 거야. 눈만 높아져서는.

나는 고개를 가로젓고 창문에서 몸을 뗐다.

구경 다 했으니 이제는 원래 목적을 달성하러 가야지.

“가볼까?”

“네.”

시아나는 살포시 웃었다.

“갈색 머리도 참 잘 어울리세요.”

“에이, 검은색 아니라고 아쉬워할 때는 언제고.”

“제가 그랬나요? 갈색 눈도요.”

시아나의 태연스러운 어투에 나는 내 머리카락을 내려다보았다.

태어났을 때부터 이랬던 것처럼 자연스러운 갈색.

다정한 시아나의 눈동자에 하늘색 하녀 복을 입은 내 모습이 비쳤다.

누가 봐도 황궁에서 일하는 하녀다.

나는 흡족하게 미소 지었다.

“가자. 시아나.”

***

이틀 전의 일이었다.

나는 테이블 위에 은화와 동화 몇 닢을 올려놓고 고민에 빠져 있었다.

“7실버 3코퍼…….”

내 전 재산.

“돈이 없어.”

덕질은 무엇으로 하는가.

바로 통장이지.

예배당의 월급은 꽤 짭짭했지만, 조각상은 턱도 없이 비쌌다.

허퍼슨이 오디트리아 대륙에서 가장 실력 좋은 조각가의 의뢰 비용을 알아다 줬는데,

“제작 기간이 3년이요? 조각상 하나당 금화 3천 개?”

내 작고 소중한 월급은 27골드.

9년 4개월을 꼬박 모아야 조각상 의뢰가 가능하다니.

하지만 벌써 폐하랑 주변 사람들에게 줄 선물을 사느라 이달 치 월급을 탕진해버렸다.

이런 식이면 9년은 무슨. 20년 후에도 주문 불가다.

성녀직은 하는 일도 없이 놀고먹는데 월급 달라고 하기도 우습고.

“아-. 누가 하늘에서 돈 좀 떨어트려 줬으면 좋겠다아.”

가령 세이칸이라던가.

라는 희망을 품고 하늘을 보며 세이칸을 찾던 중, 뜰에서 하녀들의 대화 소리가 창문을 타고 내 귀로 흘러들어왔다.

“금화 천 개?!”

금화가 천 개라니.

유혹적인 그 말을 누가 무시할 수 있겠는가.

나는 귀를 기울였다.

“앙뜨완 빵집 알지?”

“알지. 동네마다 분점 있잖아. 우리 고향엔 벌써 3개나 생겼더라.”

“거기서 여는 대회인가 봐.”

들어보니 젠달에서 엄청나게 잘나가는 빵집이 주최하는 디저트 레시피 대회가 열린다는 이야기였다.

1등은 우승상금 천 골드.

그리고 레시피로 신메뉴 계약까지.

일등은 좋겠다. 천 골드면 흉상 제작은 가능하려나.

“나도 나가볼까?”

내 입에서 나온 말인 줄 알았네.

하지만 무리였다.

본선에서 참가자가 레시피를 시연해야 한다는데, ‘안녕하세요, 성녀입니다.’ 하는 이 모습으로 나갈 수 있을 리가.

그림의 떡이다. 떡.

아쉬워하는 와중에, 하녀들의 대화가 다시금 들려왔다.

“우리는 못 나갈걸? 참가 자격이 요리사 협회에서 발급한 요리사 자격증이 있는 사람에 한해서라는데?”

“그래? 아쉽다. 이럴 때도 자격증이 필요하다니.”

“관계자한테 슬쩍 들었는데, 유명한 요리사들은 대부분 참가하나 봐. 아무래도 상금이 어마어마하니까.”

“그러면 참가했어도 입상도 힘들었겠다. 아, 지난번에…….”

금세 다른 화제를 찾은 하녀들은 재잘거리며 다른 곳으로 자리를 떴다.

나는 빈 뜰을 내려다보며 중얼거렸다.

“요리사만 참가 가능……?”

***

황궁의 주방은 언제나 치열했다.

매일 수백 인분의 식사를 만들고 나가야 하는 곳.

나가는 양이 많다고 해서 음식의 질을 소홀히 할 수도 없었다.

황궁에서 머무는 귀빈들의 식사, 그리고 제일 중요한 황제 폐하와 성녀님의 식사.

거기에 나가는 모든 음식은 마지막까지 주방장 헬리 몽블랑의 손을 거쳤다.

그리고 그는 그런 자신의 직업에 큰 자부심을 느끼고 있었다.

이 제국, 아니, 오디트리아 대륙을 넘어 이 세계 어디에서도 성녀님께 요리를 내는 요리사는 저뿐이었다.

“점심이 끝났다고 한가하게들 있지 마라! 저녁엔 보니아 사절단의 연회가 있으니까!”

헬리는 주방에서 바쁘게 움직이는 요리사들에게 외쳤다.

주방이란 전쟁터에서 부하들에게 경각심을 일깨워주는 역할은 주방장인 그의 몫이었다.

“네! 알겠습니다!”

목청껏 대답하는 부하들을 보며 헬리는 고개를 끄덕였다.

“저, 헬리 주방장님.”

몇 달 전 들어온 견습 요리사, 마드렝이 헬리에게 쭈뼛거리며 다가가 말을 걸었다.

“뭐냐.”

“밖에 손님이 찾아오셨는데요.”

“손님?”

오후 4시.

이 시간에 주방을 찾는 사람들의 용건은 대부분 비슷했다.

또 어디 출출한 귀족이 아랫것을 시켜 먹을 것을 가져오라 했나 보군. 오늘은 연회 때문에 바쁜 줄 뻔히 알면서 오다니.

헬리는 투덜거리며 조리대 위에 빵이 담긴 바구니를 들고 주방 문을 열었다.

“누구의 명을 받고 왔는진 모르겠지만, 지금은 요깃거리가 이것밖에…… 허엇, 레이디 프라단.”

“안녕하세요. 헬리.”

적갈색 머리를 올려 묶은 단정한 미인이 우아한 미소를 지었다.

성녀님의 전담 시녀인 시아나 프라단. 그녀가 왜 이곳 주방까지.

“여, 여긴 어쩐 일로. 혹시 성녀님께서 보내셨습니까?”

생각지도 못한 시아나의 등장에 헬리는 당황스러웠지만, 가슴 한편이 기대감으로 벅차올랐다.

성녀님께서 제 요리를 먼저 찾으시는 날이 오고야 말았는가-!

설레는 마음으로 시아나의 말을 기다리던 헬리는, 그녀가 혼자 온 것이 아니라는 것을 깨달았다.

레이디 프라단의 뒤에 갈색 머리를 가진 소녀가 서 있었다.

같이 온 하녀인가 보군.

헬리는 그 소녀를 본체만체하며 시아나에게 먼저 물었다.

“성녀님께서 드시고 싶으신 게 있으십니까?”

“먹고 싶은 건 없고요.”

대답은 시아나의 뒤에 있는 소녀에게서 나왔다.

모시는 분께 저런 버르장머리 없는 언행이라니.

헬리는 인상을 쓰고 저래도 되냐는 듯 시아나를 바라봤다.

“후후.”

웃어?

레이디 프라단은 이렇게 오냐오냐하면서 신입을 교육하는 건가.

이런 식이면 당장 본인의 평판은 좋을지 몰라도 나중엔 성녀님께 해가 될 텐데.

헬리는 속으로 혀를 찼다.

저 하녀에겐 앞으로 빵 부스러기 하나도 없다.

“물어볼 건 있어요.”

소녀가 시아나의 등 뒤에서 나와 헬리 앞에 모습을 드러냈다.

헬리는 소녀를 바라봤다.

평범한 갈색 눈에 갈색 머리카락.

10대 후반으로 보이는 이국적인 외모의 소녀였다.

젊은 놈들이 좋다며 따라다닐 것 같다는 생각이 절로 들 정도로 묘한 매력이 있는 이쁘장한 얼굴.

‘대륙 공용어를 사용하지 않는 외국에서 온 모양이군? 그러니 언어가 익숙하지 않아서 버릇이 없는 게지.’

그런데 이상하게도 소녀의 얼굴이 낯설지 않았다.

‘왜지? 한 번 보고 잊기엔 흔한 얼굴이 아닌데.’

시아나는 고민하는 헬리에게 재밌다는 듯 웃으며 물었다.

“헬리, 누구신지 모르겠어요?”

“모르겠소만.”

“정말요?”

모르겠다는 제 말에 소녀의 얼굴에 화색이 돌았다.

‘가만. ‘누구신지?’라니.’

이국적인 외향에 레이디 프라단이 존칭을 쓰는 분은…….

이어진 시아나의 말에 헬리는 입을 턱 벌리며 경악했다.

“성녀님이십니다.”

“헬리, 오랜만이에요!”

***

“눈이랑 머리카락 색을 바꿔주는 염색약이요? ……이건 해독제 있는 거예요?”

“성녀님, 이 초비를 뭐로 보시고 그런 말씀을. 시장에 판매도 했던 제품인걸요. 효과를 중화시키는 약도 다 있죠.”

“그건 괜찮을 겁니다. 꽤 인기가 있었거든요. 부작용도 없었고요.”

역시 백 마디 초비의 말보다 한마디 허퍼슨의 말이었다.

“그런데 왜 ‘했던’이에요? 지금은 안 팔아요?”

“……헤헤.”

“연구소장이 유통업자랑 싸웠……습니다. 새로운 약을 시험한다고 유통업자한테 먹였는데, 온몸의 털이 죄다 죽어버려서…….”

안타까운 이야기였다.

덕분에 초비의 염색약은 시중에서 구하고 싶어도 구할 수 없는 귀한 약이 되어버렸고, 그 재고가 연구실 어딘가에서 먼지를 먹다가 나한테까지 오게 됐다는 거지.

“성녀님 이, 이 모습은 대체…….”

헬리는 상상도 못 한 내 정체에 놀라서 말을 더듬거렸다.

“물어볼 게 있어서 찾아왔어요.”

“무엇을요?”

“아, 그 전에. 헬리한테 곤란한 일이라면 거절해주세요. 세이칸 신의 이름을 걸고요.”

“네, 네…….”

헬리가 곤란할 상황은 만들고 싶지 않았기에, 나는 먼저 말을 꺼내놓았다.

‘세이칸 신의 이름을 걸고’ 라니.

초비한테 배운 걸 이렇게 써먹네.

“앙뜨완 빵집에서 주최하는 디저트 레시피 대회 아세요?”

“아, 압니다. 꽤 크게 열었더군요.”

그럼 대회 내용을 설명할 필요는 없겠다.

헬리에게 바로 본론을 꺼냈다.

“대회 주최 측에 문의했는데 공동참가가 가능하다고 하더라고요. 요리사 자격증도 한 사람만 가지고 있으면 되고!”

“그렇군요……?”

“그래서 말인데요……!”

나는 두 손을 불끈 쥐었다.

디저트 카페 주말 알바 경력 1년 2개월.

내가 비록 제과제빵에 관해 전문적으로 배운 건 없지만, 이것 하나는 자신 있게 말할 수 있었다.

“……이게 디저트라고?”

“네. 작은 생선을 넣어 만든 파이예요.”

소환 초반, 폐하가 왜 판테리온 공작 영애에게 받은 디저트를 분수대에 버리셨겠는가.

그건 죄다 이 세계의 디저트가 더럽게 맛이 없기 때문이었다.

“헬리, 저랑 한몫 좀 챙겨볼 생각 있어요?”

지금 내 눈앞에 있는 건 천 골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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