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화
태연한 척을 하고 싶어도 입꼬리가 계속해서 올라갔다.
마냥 세상이 아름답게 보여 주위를 둘러보다 피식 웃는 폐하랑 눈이 마주쳤다.
윽. 눈부셔. 아름다운 건 세상이 아니라 폐하였잖아.
“도대체 황궁에서 쫓아낼 거란 생각은 왜 한 거지?”
“그야, 저는 신성력이 없는 성녀잖아요.”
“그래서?”
나는 손을 꼼지락거렸다.
혼자 삽질한 원인을 설명하자니 민망했지만, 지금이 아니면 말할 기회가 없을 거 같으니까.
“무능력하니까 곁에 두기 귀찮아지실 때가 올 거고. 그렇다고 다른 나라에 주기엔 ‘세이칸 신의 대리인’이란 포장지가 아까우실 거 같고. 그래서 언젠가는 황궁이랑 멀리 떨어진 신전 같은 데로 쫓겨날 거라 생각했어요.”
말하다 보니 서럽네.
세이칸 신이 나한테 신성력만 줬어도 이런 계륵 신세 따윈 걱정하지 않아도 됐을 텐데. 흑흑.
“허.”
폐하가 어이가 없다는 듯 헛웃음을 흘렸다.
“별 쓸데없는 생각을.”
“제 미래를 위한 중요한 걱정이었는데요.”
“꽤 그럴듯한 이유를 만든 게 성녀답지만, ‘성녀’의 힘에 기대지 않을 정도로 젠달의 신성력은 충분해.”
저게 바로 신성력 수치 100의 자신감인가.
폐하는 어깨를 으쓱했다.
“그러니 너무 신성력에 신경 쓰진 말란 거야. 고작 그런 이유로 황궁에서 나가란 소리는 하지 않을 테니.”
“와.”
나는 감격스러움에 두 손으로 입을 가렸다.
한탄스러운 이 세계의 기술력.
이걸 녹음해서 내 최애가 이렇게 심성이 곱다고 동네방네 떠들고 다녀야 하는데.
‘……응?’
심성이 고와?
내가 생각했지만, 이상한 말이었다.
폐하가 심성이 곱다니. 얼굴도 아니고.
“폐하, 혹시 저한테 바라는 거 있으세요?”
“뭐?”
눈썹이 슬쩍 들렸다. 다정 모드는 아니군.
연기도 아닌데 왜 친절하시지?
……혹시 지금 기분이 좋으신가?
나는 슬쩍 소매를 매만졌다.
‘있다. 있어.’
사람은 기분이 좋을 때 웃음이 후한 법이지. 기회다.
“후후후.”
“……성녀, 괜찮나? 정신이 이상하다 싶으면 바로 말해. 조치를 취해야 하니.”
“익. 그런 거 아니에요. 폐하, 저도 손 좀 빌려주세요.”
“손?”
폐하는 순순히 손바닥을 내 쪽으로 내밀었다.
역시 기분 좋으신 게 분명해.
그나저나 뭔 손이 이렇게 이쁘냐.
청량이고 뭐고 온종일 이 손바닥만 보고 살아도 되겠다.
“뭘 하려고?”
“…….”
“성녀.”
“아, 지금 딱 좋아요. 잠시만 이대로 계세요.”
하마터면 손 본떠서 석고상 만들어 달라고 할 뻔했네.
나는 폐하에게 아무것도 없는 내 양손을 어필했다.
그런 뒤 폐하의 손바닥 바로 위에서 두 손을 마주 잡았다.
“이제 제가 손을 떼면 놀랄만한 일이 벌어지거든요.”
나는 폐하의 미심쩍은 눈초리를 바라보며, 손을 서서히 뗐다.
벌써 귓가에 청량한 웃음소리가 들리는 거 같…….
“…….”
은 건 내 희망 사항이었지.
실패다.
하지만 또 마냥 실패라고 할 순 없는 게, 폐하의 눈에 흥미롭다는 듯 이채가 돌았거든!
나는 폐하의 손을 가리키며 뽐내는 얼굴을 했다.
아무것도 없던 폐하의 손바닥 위에는 내가 지난번 허퍼슨과 만든 파란 종이꽃이 올려져 있었다.
“성녀한테 이런 재주가 있는 줄은 몰랐군.”
“이번엔 꽤 괜찮았죠? 사실 제가 원래 세계에선 마법부 출신…….”
“빠르기가 제법이던데. 소매에 넣어두고 있다가 꺼내는 방식인가?”
“……맞아요.”
죄다 보인 모양이었다.
하긴, 인간의 범주를 넘어선 신체 능력을 어떻게 속아 넘기겠어.
좀 더 폐하를 웃길 다른 방법을…….
투둑.
“이건 뭐지?”
“아.”
폐하가 종이꽃을 들어 올리자, 꽃잎 속에 숨겨놓았던 물건이 손바닥 위로 떨어졌다.
투명한 푸른색의 보석으로 장식한 두 개의 커프스단추였다.
“사파이어?”
프로딘타 궁을 찾아오는 상인에게 충동 구매한 것이었다.
폐하의 눈과 닮은 파스텔 블루 사파이어. 그건 살 수밖에 없었지. 아무렴.
물론 폐하의 눈동자에 비할 바는 아니었지만.
“폐하한테 드리는 거예요.”
“내게?”
전혀 예상하지 못했다는 듯, 폐하의 벽안에 놀란 빛이 어렸다.
세상에. 우리 폐하가 놀라다니. 이 맛에 다들 조공하는 건가.
“저 이번에 첫 월급 받았거든요. 아, 제가 있던 세계에서는 첫 월급 받으면 소중한 사람한테 선물을 주는 문화가 있어서요.”
나는 씩 웃었다.
“선물을 누구한테 줄까 생각해봤는데, 폐하 얼굴이 제일 먼저 떠오르더라고요.”
솔직히 그런 생각 시도 때도 없이 떠오르는 게 폐하 얼굴이지.
으. 그 얼굴 내 망막에 새겨 넣고 다닐 수 있으면 좋겠다.
그러면 어딜 보든 폐하가 보일 거 아니야.
“성녀는…….”
폐하는 커프스단추를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입을 열었다.
무언가를 말하려는 듯했으나 이내 입술을 꾹 다물었다.
“시간이 늦었으니 이만 가보는 게 좋겠군. 복도에 카시얀이 있나? 호위하라 명할 테니 같이 돌아가.”
벌써 자정이 지난 모양이었다.
폐하는 소파에서 몸을 일으켜 닫힌 집무실의 문이 있는 방향으로 걸음을 뗐다.
그런 폐하의 뒷모습을 눈으로 좇고 있었는데, 우뚝 걸음을 멈춘 폐하가 날 향해 몸을 돌렸다.
“이건 고맙게 쓰지. 영광이군. 위대하신 성녀의 소중한 사람이 될 수 있어서 말이야.”
“……그거 비꼬시는 거죠?”
“하하.”
나는 뾰로통하게 말하면서도 폐하의 얼굴에서 눈을 뗄 수 없었다.
폐하의 눈꼬리가 사르르 접혀 들어가 있었다.
이런 은은한 달빛 같은 미소는 또 뭐람.
“카시얀, 성녀를 궁까지 모셔다드리게.”
“넵. 알겠습니다!”
뒤쪽으로 폐하와 카시얀의 대화가 들려왔지만, 나는 소파에서 꼼짝을 할 수가 없었다.
“…….”
콩닥. 콩닥.
뭐지. 왜 이렇게 심장이 이렇게 간질거리지.
“……세뇌가 아직 덜 풀렸나……?”
***
“좋은 아침입니다!”
허퍼슨과 나는 예배당 문을 열고 활기차게 들어오는 사람을 보고 동작을 멈췄다.
허퍼슨이 경악하며 소리쳤다.
“여긴 왜 온 거야?!”
“이야, 허퍼슨~ 여기서 다 보네. 앗, 성녀님. 안녕하십니까.”
초비는 허리를 90도로 접으며 능청스럽게 인사했다.
허리까지 오던 분홍 웨이브 머리는 단발로 짧게 잘려 산뜻한 느낌을 주었다.
“초비가 왜……?”
뜻밖의 등장에 의아해하는 사이.
단상 위의 허퍼슨이 발을 구르며 빠른 속도로 중앙통로를 걸어갔다.
그리곤 입구에 선 초비의 어깨를 붙들고 내게 들리지 않게끔 목소리를 낮춰 말했다.
하지만 허퍼슨.
저 다 들려요.
“여기까진 왜 온 거야? 너 또 성녀님께 무슨 실례를 저지르려고…….”
“그건 사고였다니까. 성녀님께서도 다 용서하셨거든?”
‘……내가 언제요?’
초비의 묘약에 신성석이 들어있었단 사실을 아는 사람은 폐하와 나, 초비와 에본 재상님, 이렇게 넷뿐.
표면적으론 ‘초비 연구소장의 발명품이 또 본의 아닌 부작용을 일으켰다’라는 말로 마무리됐다.
허퍼슨이 지금 화내는 이유도 아마 그 이유 때문일 거다.
“성녀님께서 용서하셨어도, 나는 용서 못 해.”
“흥. 네가 뭔데. 그리고 지금 나한테 나가라 마라 할 상황이 아니거든? 나 오늘부터 여기서 일하게 됐어.”
“뭐, 뭐라고? 왜?”
그러니까. 왜?
나는 마른 천으로 의자를 닦으며 귀를 쫑긋 세웠다.
초비는 안 돼. 초비는.
“황제 폐하께서 성녀님을 보필하라 하셨거든.”
“네가 무슨 보필을……!”
황당한 소리에 허퍼슨의 말문이 막혔다.
나도 저게 무슨 소린가, 했는데, 막 예배당 안으로 들어온 라울 신관님이 그 이유를 설명해줬다.
“허허. 연구소장은 이번 일 때문에 근신 처분을 받았습니다. 근신 동안 연구소에 나가는 대신 예배당 청소를 도울 겁니다.”
아하. 초비가 예배당에서 일을.
평화롭던 내 직장……. 안녕…….
***
“폐하, 연구소장을 성녀님 곁에 두어도 괜찮을까요?”
에본은 알렌드에게 조심스럽게 물었다.
젠달에서 황제와 맺는 ‘충성계약’은 일반적인 충성 서약과는 달랐다.
황제가 신하의 소원을 하나 들어주는 대신, 신하에게 목숨을 담보로 한 영원한 충성을 맹세 받는 것.
세이칸의 힘을 사용하는 계약이니만큼, 절대적이며 강제적이었다.
알렌드와는 에본와 헨켈이 계약을 맺었고, 초비도 계약을 맺었다.
그런데도 에본은 걱정스러웠다.
“폐하께서 ‘제약’을 수정하셨다. ‘성녀께 어떠한 해도 끼치지 말 것. 그리고 성녀께 무조건 협조할 것.’”
제약을 어길 즉시, 초비에겐 계약의 효력이 발동돼 모든 행동을 제한당할 터였다.
하지만 그래도.
반감을 품은 것을 뻔히 아는데, 성녀님의 곁에 초비를 두는 것이 옳은 것일까.
알렌드는 그런 에본에게 생긋 미소 지으며 말했다.
“성녀께서 휘둘리는 성격은 아니시니 괜찮을 걸세. 오히려 연구소장이 구르진 않을까 걱정이군.”
성녀만큼 초비 빈후드의 목줄을 잘 쥐고 있을 이도 없겠지.
그리고 연구소장을 성녀에게 보낸 것엔 다른 이유도 있었다.
“또, 연구소장이 함께 있으면 귀족들도 당분간은 조용할 테고.”
에본은 황제의 말이 뜻하는 바를 알아듣곤 눈살을 찌푸렸다.
최근, 귀족파 측에서 성녀의 행적이 세이칸 신의 말씀에 반한다는 주장이 나왔다.
“세이칸께선 신성력의 높고 낮음으로 사람을 차별해선 안 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성녀님께선 이를 해명하셔야 할 겁니다.”
성녀가 지난번 롭휀 귀족들의 머리채를 잡아 뜯은 사건.
롭휀 귀족들이 가진 신성력 수치가 10을 넘기지 못했다는 게 귀족파 주장의 근거였다.
“정작 신성력으로 사람을 차별하는 건 그들이면서 말이죠.”
들고 있는 서류철에 가려진 에본의 주먹이 잘게 떨렸다.
“구실이겠지. 진실이 뭔지, 자신들의 주장이 정당한지는 그들도 관심 없을 걸세. 그들이 원하는 건 성녀와 대면할 기회를 얻는 것이니까.”
그리고 성녀를 도구로 사용하기 위해 살살 꾀어낼 것이다.
전쟁터로 보내든, 성녀의 이름으로 백성들을 선동하든.
권력에 찌든 그들의 가슴 속에 순수한 신앙심은 희미해진 지 오래였다.
머릿속에 남은 탐욕만이 그들을 조종하고 있을 뿐.
지금이야 황제의 눈치를 본다지만, 언제 그 탐욕이 불어난 물처럼 흘러넘칠지 모르는 일이었다.
“신성력이 없는 연구소장이 예배당에 출입한다는 이야기가 퍼지면, 귀족파의 주장도 힘을 못 쓰겠지.”
에본은 고개를 끄덕였다.
“들고 있는 건 뭐지?”
“아, 보니아 왕국에서 사절단 명단을 보내왔습니다.”
서류를 건네받은 알렌드의 눈동자가 명단을 꼼꼼히 살폈다.
그의 커프스에서 투명한 푸른 사파이어가 은은하게 빛났다.
“성녀께서 아쉬워하시겠어.”
‘루이드 애팅거’.
명단의 모든 이름을 확인한 알렌드는 피식 미소 지었다.
“제2 왕자가 오는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