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화
진화는 무슨.
폐하는 순수하게 내 걱정을 해준 거였다.
나는 또 고도의 방법으로 날 놀리는 줄 알았지.
“으아아. 저 흑역사 또 만들었어요. 제가 대장 뒤 쫓아다니는 거 다들 봤을 텐데……!”
내 옆 소파에 앉은 폐하는 태연하게 코웃음을 쳤다.
“새삼스럽게.”
하지만 핑크빛 색소가 빠진 내 뇌는 ‘신아리 흑역사 상영회’라도 연 것처럼 지난 나흘간의 내 행적들을 반복해서 재생했다.
상영 취소합니다. 나가세요.
“폐하, 그런데 아까 헨켈 대장이랑 결혼 어쩌고는 진심이셨어요?”
“……대답하는 건 부끄러워하더니 질문은 거침이 없군.”
“에이, 지금은 아무 감정도 없는데요. 저 부끄러운 짓 하는 거야 폐하는 많이 보셨고…….”
또 많이 보셨겠지.
이제 이런 질문 하는 것쯤은 아무렇지도 않다 이거다. 그런데 왜 내 눈에선 눈물이 날까. 흑흑.
하여튼 중요한 건 이게 아니었다.
내 쪽팔림보다는, 폐하가 내 결혼을 진심으로 생각했는지가 더 중요했다.
그게 언제든. 상대가 누구든.
‘결혼 같은 걸 하면 황궁에서 못 살 거 아니야-!’
예배당 청소는 정규직이 아닌 임시직이고, 나는 간당간당한 파리 목숨이었다.
예배당 청소직에서 짤린다면?
성녀 행세는 한 달에 한 번 있을까 말까고.
나는 매일 황궁에 올 명분이 마땅히 없었다.
그냥 밖에서 살다가 성녀 행세를 해야 할 때만 오는 일용직 근로자가 돼버릴 수도 있다는 소리.
그러니 만약 폐하가 진심이었다면, 나는 여기서 확실히 못을 박아둘 필요가 있었다.
“말씀 못 드렸는데 저는 독신ㅈ-.”
“신성력에 의한 세뇌는……. 잠시 손 좀 빌리지.”
폐하는 내 얼굴을 보고 고민하다, 소파 팔걸이에 있던 내 왼손을 가져가 깍지를 꼈다.
“무, 무, 무슨.”
“이렇게 설명하는 편이 성녀가 이해하기 쉬울 거 같아서 말이야.”
놀라서 말도 제대로 안 나온다.
이해가 쉬울 것 같다니.
지금 이대로라면 이해고 뭐고 하나도 귀에 안 들어올 거 같은데요-!
쿵쾅쿵쾅쿵쾅.
성난 침팬지 두 마리가 제 가슴팍 대신 내 고막을 때리는 듯했다.
진정해. 진정.
깍지 낀 이 손은 내 손이 아니다. 이 커다랗고 잘생기고 따뜻한 손은 폐하의 손이 아니다.
“후, 후우.”
“……뭐 하는 거지?”
“심신 안정 호흡을 좀…….”
“성녀도 힘들겠군. 매번 반응하느라.”
그러니깐요.
왜 이 덕심은 사그라지지도 않는지. 그래서 지금 너무 행복합니다.
‘크흡. 역시 내 최애는 폐하였어……!’
내 삶의 이유. 내 삶의 활력소.
폐하 얼굴 때문에 내가 산다.
하지만 행복과는 별개로 문제가 하나 있었다.
최애(몸)랑 손깍지라니.
여기서 더 가면 나는 아마 벌 받을지도 모른다.
진짜 철컹철컹 당할지도 모른다는 소리다.
지난번에도 말했듯이 위험한 건 폐하가 아니라 나…….
“이제 익숙해질 때도 되지 않았나?”
“으악! 끼 부리지 마세요!”
“…….”
한창 마음을 다스리는 중에 폐하가 손깍지 낀 손을 허공에서 흔들었다.
“헉. 이건 속으로 생각할 거였는데. 폐하, 지금 이건 방어기제거든요. 그러니까 위급상황에서 아무 의미 없이 놀라서 지르는…….”
“알았으니 그만 진정하고 들어봐.”
“넵.”
“신성력을 쓴 세뇌가 풀리는 방법은, 체내에 남은 신성력이 소멸할 때까지 기다리거나 그 신성력을 직접 밖으로 꺼내는 방법이 있지.”
“후자가 더 편하겠네요?”
“하지만 문제는 신성력이 정신과 얽혀있다는 거야. 지금 이 손처럼.”
폐하는 손깍지 낀 자신의 오른손을 잡아당겼다.
차마 닿는 면적을 늘릴 수가 없어 다섯 손가락을 빳빳이 펼친 내 왼손이 그대로 따라갔다.
“이렇게 얽힌 상태에서 신성력을 억지로 떼어 내려 하면 정신이 같이 뜯겨.”
“그럼 어떻게 되는데요?”
“덜하게는 기억을 몇 개 잃거나, 심하면 광인이 되기도 하지.”
[폐……하아…….]
순간 침을 흘리고 폐하를 따라다니는 내 모습이 상상됐다.
……잠시만, 나 그 방법으로 세뇌 풀리지 않았나?
“폐하, 저 미쳤어요?!”
“아니. 계속 들어봐.”
“넵.”
“그런 부작용 없이 안전하게 세뇌를 푸는 방법은, 얽힌 신성력과 정신을 대립하게 만드는 거야. 상황을 그렇게 몰고 가는 거지.”
폐하는 오른손을 흔들었다.
손깍지가 떨어질 듯 말 듯하게 움직였다.
불현듯 좀 전의 상황이 떠올랐다.
“헨켈과 결혼하고 싶어?”
그래서 결혼 얘기를 꺼내셨던 건가?
“그리고 마지막엔 본인 입으로 세뇌를 부정하면.”
“싫어요.”
폐하가 손에 힘을 빼자 깍지는 자연스럽게 풀렸다.
“무리 없이 신성력을 떼어낼 수 있는 거지. 아까 성녀의 머리에서 나온 자줏빛 신성력처럼. 그래도 좀 걱정스러웠는데 잘 된 모양이야.”
나는 허공에 남은 내 왼손을 주시하며 말했다.
“폐하, 저 궁금한 거 있어요.”
“이런. 성녀의 수준에 맞췄다고 생각했는데. 부족했던 모양이군.”
“이익……. 그게 아니라요.”
폐하의 입매가 장난스럽게 비틀렸다.
하, 입술도 어쩜 저렇게 모델 같…….
‘아니야. 정신 차리고 손에 초점 맞춰.’
하마터면 저 화보 같은 입술에 정신이 팔릴 뻔했다.
흐릿해졌다가 선명해지기를 반복하는 내 왼손과 폐하의 턱선을 보며, 나는 입을 열었다.
“이상한 게 있어서요.”
“이상한 거라니?”
초반에 있었던 폐하의 똥개훈련이 내 세포 깊숙이 박혀있었기 때문인지,
그동안 나는 폐하의 말을 곧이곧대로 받아들일 수 없었다.
그런데, 조금 이상하단 말이지?
나는 지난 몇 주간의 일을 회상했다.
“원한다면 평생 놀고먹게 해줄 수 있는데.”
“입학을 원한다면, 자리를 마련해보지.”
“성녀가 원하면 그렇게 해주지.”
폐하의 제안에는 언제나 전제가 붙었다.
‘성녀가 원한다면.’
‘그렇다면…….’
나는 선명한 왼손 뒤 흐릿한 폐하의 얼굴을 의식했다.
이게 최선이었다.
얼굴을 봤다간 또 저 얼굴에 홀라당 넘어가서 상황이 흐지부지될지도 모른다.
나는 확실한 대답이 듣고 싶은걸.
“제가 원하면 평생 황궁에서 안 내쫓으실 거예요?”
***
“당장 꺼져.”
초비는 감옥 속에서 이를 갈았다.
철창 너머에 서 있는 청초한 은발의 미남.
차갑게 내려앉은 그의 보랏빛 눈만큼, 냉정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본인이 자초한 일이면서 왜 그렇게 화를 내는 거지?”
“왜겠어? 그냥 네가 보기 싫으니까 그렇지. 성녀한테 홀라당 넘어간 에본 하이벤.”
“‘성녀님’이다.”
“흥. 그 ‘성녀님’ 앞에선 눈도 제대로 못 마주치는 인간이 지적은.”
초비는 에본만 보면 짜증이 났다.
아카데미 시절엔 자기처럼 신성력에 반감을 갖고 살던 인간이.
졸업 후 황제를 만나고 거기에 찰싹 붙어서는 자기까지 팔아넘겼다.
에본에게 속아 황제와 맺은 ‘충성계약’.
귀족들이 득실거리는 황궁에서 살게 된 것도 그 때문이었다.
그뿐이랴.
에본 하이벤이 짜증 나는 데에는 이유가 더 있었다.
오디트리아 대륙에서 가장 강한 신성력을 가지고 있을 거라는 성녀.
에본은 그 성녀한테도 꼼짝을 못 했다.
가증스럽게 부끄럼까지 타면서.
“에본, 너만 아니었으면 나는 지금쯤 아무도 모르는 곳에서-.”
“아무도 모르게 빈후드 가의 망령처럼 살았겠지. 네가 그렇게 좋아하는 연구도 못 하고.”
“…….”
“너나, 나나. 가문의 수치니까. 폐하께서 거둬주지 않으셨다면 평생을 저택 밖으로 나오지 못했을 거다.”
“닥쳐.”
에본은 자신을 노려보는 초비를 향해 한숨을 쉬었다.
“도대체 왜 그런 건데. 성녀님께 신성석을 쓴 건 선을 넘었어. 세이칸 신께 반역하는 대역죄다.”
“골탕 좀 먹이려고 했던 것뿐이야. 그렇게 효과가 오래 지속될 줄은 몰랐다고.”
묘약에 섞은 신성석은 소량이었다.
24시간 갈 것도 없이 반나절 정도면 세뇌가 풀릴 그 정도의 힘.
“내 계산이 틀리다니.” 초비는 자존심이 상한 얼굴로 중얼거렸다.
에본은 후회하는 기색이라곤 보이지 않는 초비를 철창 너머로 바라보다 입을 열었다.
“너는 그분을 몰라. 성녀님께선 네가 생각하는 그런 분이 아니시다.”
“넌 좀 잘 아나 봐?”
“그분은…….”
초비에게 어떻게 말해줘야 할까.
에본은 기억 속 성녀의 행동을 떠올렸다.
그래, 그분은 언제나.
“한결같이 얼굴……을 밝……히시……는…….”
이것밖에 떠오르지 않았다.
에본의 목소리가 점점 기어들어 가고 뺨이 붉게 물들었다.
초비는 얼굴을 와락 일그러트렸다.
“한결같이 얼굴이 밝은 분이라고? 성격이 좋다 그거야? 그딴 소리 할 거면 그만하고 꺼져.”
“아니. 폐하의 말을 전하려고 왔다.”
초비는 몸을 멈칫했다.
별로 좋은 이야기는 아니겠지.
그 위대한 성녀한테 신성력을 써 세뇌를 시켰다는 죄목으로 감옥에 갇혔으니까.
이 경우……. 역시 그건가.
“사형이야?”
“…….”
에본의 자안이 안타까운 시선을 보냈다.
초비는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황제도 결국 신성력에 눈먼 다른 놈들과 똑같은 인간이었다.
“나를 위해 일해주면 그대가 꿈꾸던 제국을 보여주겠네.”
제국을 보여주긴 무슨.
황제의 사탕발림에 잠시 넘어간 제가 멍청했다.
그때 황제와 계약을 하는 게 아니었는데.
제 손으로 직접 망할 빈후드를 엿 먹이고 이 제국을 떴어야 했는데.
[그렇게 하지도 못할 거면서. 빈후드의 얼간이.]
그녀의 무의식이 키득거렸다.
초비는 떨리는 제 양팔을 붙잡았다.
에본의 입술이 그녀의 시야에서 느리게 움직였다.
***
“그렇게 기분이 좋나?”
“그럼요.”
나는 콧노래를 불렀다.
사랑의 묘약 때문에 그 고생을 하긴 했어도.
“성녀가 원한다면, 그렇게 해.”
이제 황궁에서 쫓겨날까 봐 가슴 졸이는 일은 없다 이거야.
이런 게 바로 전화위복이지.
“다음에 연구소장 만나면 묘약 일은 신경 쓰지 말라고 해야겠어요.”
또 머리 박으면서 용서해달라고 할지도 몰랐다.
그러면 나도 곤란하니까. 뭐.
“그래.”
폐하는 고개를 끄덕였다.
“다음에 만나게 된다면 말이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