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화
「20:00 황제 폐하의 집무실에서 호위 근무
※자정에 카디얀과 근무 교대할 예정. 대장님과의 밤 산책을 노리신다면 이때를 추천해 드립니다!!」
“…….”
딱히 그 내용이 신경이 쓰이는 건 아니었다.
연구소 앞에서 초비를 기다릴 필요가 없어졌으니, 퇴근 후에 시간이 남아돌았다.
나는 저녁을 먹은 뒤, 소파에 앉아 허공을 응시했다.
원래 이 시간에 뭘 했더라.
‘폐하를 보거나, 폐하를 보거나…….’
“폐하를 봤겠지……!”
내 최애를 보러!
나는 소파에서 벌떡 일어났다.
홀린 듯 발걸음이 움직인 곳은 폐하의 집무실 복도.
항상 굳게 닫혀 있던 집무실이 오늘은 반쯤 열려 불빛이 새어 나오고 있었다.
이건 나보고 와서 보라는 건 아닐까!
‘아닐걸.’
네가 뭘 알아.
이성은 아니라고 말하는데 몸이 먼저 움직인다.
어쩔 수 없었다. 왜냐면……. 폐하가 있는 곳엔…….
“헨켈은 여기 없어.”
“헙.”
오랜만의 얼굴 공격에 나는 잠시 눈을 감았다.
복도로 새어 나오는 빛은 불빛이 아니라 폐하 외모가 자체 발광하는 빛이었나.
찬란하다. 하지만 심장이 이전처럼 뛰지 않는다.
나는 집무실 문을 열고 선 폐하의 눈치를 보며 말했다.
“제가 딱히 대장을 보러 온 건 아니거든요.”
“그럼 날 보러 왔나?”
“뭐……. 지나가는 길에…….”
쓰레기가 된 거 같다.
폐하가 저렇게 물어보는데, 대답이 뭐 이따위야!
내 주둥이를 저주하며 나는 자기 암시를 걸었다.
‘내가 좋아하는 건 폐하 외모다. 나한테는 폐하 얼굴뿐이다. 그러니 나는 지금 행복하다. 대장이 아니라 폐하를 만나서……! 대장으을…….’
앗, 텐션 처진다. 올려.
“지나가는 길에 폐하가 보고 싶어서요! 제가 워낙 폐하 얼굴을 좋아하잖아요? 역시 밤에 봐도 빛나시네요!”
“흐음.”
폐하의 한쪽 입꼬리가 올라갔다.
“헨켈이 왜 없는 줄 알아?”
“왜, 왜인데요……?”
“내가 일찍 들어가 보라 했어.”
“이…….”
이익.
“이?”
“이렇게 배려심 넘치는 상사가 계셔서 참 좋으시겠네요. 헨켈 대장은. 하하.”
미소를 잃지 않으려는 내 입가에 경련이 일었다.
그 노력을 폐하가 모를 리가.
눈꼬리 접히는 거 봐. 아주 재밌으시지……!
아니, 저도 괴롭거든요? 제 머리는 폐하가 최애라고 외치는데 제 몸이 안 따라줘서 엄청 괴롭거든요!
폐하는 싱긋이 웃다가, 가벼운 말투로 제안했다.
“헨켈과 결혼할래?”
“네에?!”
드디어 내가 미쳤구나.
이런 환청도 만들어 내고.
하지만 환청이 아닌 모양이었다.
“성녀가 원하면 그렇게 해주지. 헨켈은 믿을 만한 사람이니까 남편으로도 괜찮을 거야.”
말도 안 되는 소리에 나는 눈을 끔뻑였다.
급발진도 이런 급발진이 없었다.
이건 분명히 폐하가 날 놀리는 건데, 이런 말에도 설레는 나 자신이 너무 싫다.
“할래?”
네. 당장요. 아, 아니.
고개 끄덕일 뻔.
콩닥거리는 가슴을 애써 무시하고 상황을 진정시키려 입을 열었다.
“잠, 잠시만요. 폐하. 거기에 대장의 의견은……?”
이 주둥이가 또 제멋대로……!
대장 의견은 왜 물어보는 건데!
나는 내 헛소리를 막기 위해 양손으로 입을 틀어막았다.
넌 이제 내 신뢰를 잃었다. 주둥이.
“헨켈은 성녀라면 괜찮다 하더군.”
“……!”
헙.
나는 입술을 꽈악 눌렀다.
대장도 괜찮다 했다고…?
‘으악. 대장‘도’는 뭔데! ‘도’는!’
빗자루를 가져왔어야 했다.
이놈의 머리고 주둥이고.
이게 진짜 무슨 시련이고 무슨 고문이냐고요…….
폐하는 그런 내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중매를 성공시키려고 작정한 사람처럼 내 양손을 끌어내리고 속삭였다.
“결혼이 부담스럽다면 약혼부터 시작하는 건 어때. 성녀는 헨켈을…… 좋아하니.”
아니, 이건 아니거든.
여기서 내 심장이 일생일대의 프러포즈를 받은 사람 심장처럼 뛰면 안 되는 거거든.
약효가 사라지면 모든 게 끝날 감정이라 여기면서도, 초비가 말한 헨켈 대장이 내 찐사랑일지도 모른다는 소리가 자꾸 귓가를 맴돌았다.
진짜 너 후회한다. 신아리.
“저는……!”
***
“대장님?!”
황실 근위대의 심야 훈련 시간이었다.
막 훈련장에 도착한 카디얀은 헨켈 레바르튼을 보고 놀란 소리를 했다.
“왜 훈련장에 계십니까? 지금이면 황제 폐하의 호위를 하고 계실 시간 아닙니까?”
“폐하께서 자정까진 호위가 필요 없으시다 하셨다.”
헨켈은 훈련하는 기사들에게 시선을 고정한 채 묵묵히 대답했다.
“아, 하…….”
카디얀은 헨켈의 눈치를 한 번 보고, 훈련 중인 단원들을 일별했다.
그중 몇몇이 카디얀을 눈빛으로 추궁했다.
‘오늘 대장님의 일과를 넘긴 건 너잖아. 카디얀.’
‘왜 대장님이 여기에 계시는데?’
‘나도 이럴 줄은 몰랐지!’
‘어떻게 할 거야. 성녀님이 그걸 보고 가셨으면……!’
‘그러길래 내가 느낌표 한 개만 넣자고 했지! 추천하자고 한 놈 누구야?’
‘나 알아. 신입으로 들어온 예배당의 허퍼슨.’
‘그 부러운 인간……!’
눈으로만 대화하던 기사들은 급기야 아주 작은 소리로 속삭이기 시작했다.
평소 같았으면 그런 소리도 놓치지 않았을 헨켈이었지만, 그는 기사들을 지켜보는 듯하며 깊은 생각에 빠져 있었다.
처음이었다.
제 목숨마저 내놓을 수 있는 충성을 맹세한 고귀한 황제, 알렌드 칸 레오디우스가 자신을 멀리하는 것이.
“헨켈 경은 오늘 좀 쉬게.”
마음 아픈 일이다.
주인을 두고 쉬는 검이 세상 어디에 있단 말인가.
검은 언제나 날을 세우고 주인의 곁을 지켜야 하는 법인데.
사실 헨켈은 황제가 그러는 이유를 어렴풋이 짐작하고 있었다.
성녀님께서 황제 폐하를 무시하시고 제게 인사를 건네셨을 때.
황제 폐하의 얼굴을 똑바로 보시던 성녀님께서 저와 눈이 마주치자 얼굴을 붉히고 고개를 돌리셨을 때.
‘폐하의 심기가 불편하셨다.’
황제의 즉위 이후, 눈을 뜨고 움직이는 시간 대부분을 황제와 함께한 헨켈이었다.
남들은 모르더라도 그는 황제 주변에 달라지는 공기의 미세한 흐름을 느낄 수 있었다.
이유를 알았으니 성녀에게 자신을 무시하고 황제에게 말을 걸어달라 부탁하면 될 것을.
하지만 헨켈 레바르튼에게 그런 요령이 있을 턱이 없었다.
그저 초비 빈후드 연구소장이 말한 ‘약발이 떨어질 때’를 묵묵히 기다릴 뿐이었다.
“…….”
***
나는 눈을 질끈 감고 외쳤다.
“싫어요.”
뱉었다. 장하다. 나 자신.
이건 다 약효 때문이야.
그러니까 헨켈 대장을 떠올렸을 때 드는 이런 감정은……. 감정은…….
“어라?”
“그래.”
폐하는 무산된 중매에 일말의 미련도 없다는 듯이 손을 놓았다.
잠시만, 지금 좀 이상한데.
혼란스러운 내 시야에 폐하의 길고 잘생긴 손가락이 들어왔다.
내 관자놀이에 닿았다 떨어진 검지가 유려한 선을 그리며 하얀 빛무리를 만들어 냈다.
거기에 딸려 나온 자줏빛의 작은 알갱이들.
반짝이던 알갱이들은 이내 가루가 되어 공중으로 흩어졌다.
“지금도 헨켈과 결혼하고 싶어?”
“……아뇨?”
뭐지? 헨켈 대장을 떠올려도 아무런 감정이 들지 않았다.
얼떨떨한 내게, 폐하가 사정을 설명했다.
“연구소장이 오늘 오전에 실토했지. 보니아 왕국에서 견본으로 보낸 신성석을 가지고 약을 만들었다더군.”
“신성석이요?”
“광물에 신성력을 인위적으로 넣어 만든 돌이야. 자주색은 정신 조작 계통의 신성력을 담았을 때 나오는 색이고.”
“그럼 사랑의 묘약은…?”
“체내에 들어간 신성력에 의한 세뇌지. 처음 본 사람을 사랑하는 것처럼 만드는.”
“와.”
나는 다리에 힘이 풀려 그대로 주저앉았다.
“다행이다……. 저 인생 망한 줄 알았어요. 평생 몸이랑 싸우면서 살아야 하는 줄 알고 얼마나 걱정했는데.”
다 세뇌였다니.
내가 정말로 대장을 사랑한 게 아니라 어찌나 다행인지 모른다.
“……그런데 폐하, 저는 왜 그렇게 세뇌가 오래 간 거예요? 다른 사람들은 하루면 풀렸다고 그러던데요.”
이어진 폐하의 목소리가 짐짓 심각했다.
“세뇌가 잘 걸리는 유형은 보통 두 가지지. 하나는 몸이 신성력을 잘 받아들이는 체질이거나…….”
“그리고요?”
혹시 내 몸 어딘가 이상이 있는 건 아닐까.
잘 먹고 잘 자는 몸이지만 이 세계랑 뭔가 안 맞는 걸지도.
나도 덩달아 심각해져 귀를 쫑긋 세웠다.
“어린아이의 거짓말에도 속을 법한 단순한 머리를 가졌거나.”
“…….”
“하지만 성녀는 신성력을 잘 받는 체질이 아니니…….”
“익…….”
또 놀렸다. 또.
앞에 목소리를 낮췄을 때부터 폐하는 날 놀리려고 작정한 게 분명했다.
저 장난기 어린 눈을 보라고!
저, 저……, 눈……!
“이제 괜찮나?”
폐하는 슬쩍 입가에 미소를 띠고 물었다.
“아니요.”
“무슨 다른 문제라도?”
“눈…….”
“눈?”
“눈이……. 눈이……! 부시거든요! 지금 너무 가깝다고요-!”
나는 두 손으로 시야를 차단하며 외쳤다.
4일 치 후광을 한꺼번에 정산할 요량인 듯, 폐하는 지금 두 눈 뜨고 못 봐줄 정도로 빛이 났다.
난 지금 죽은 게 분명했다. 죽어서 미모를 관장하는 신이라도 만난 게 분명해.
무슨 4일짜리 공백기가 후폭풍을 이렇게 미친 듯이 몰고 오냐.
“가까이 오지 마세요!”
“……멀쩡해진 모양이군.”
폐하는 딱히 놀랍지도 않다는 말투로 코웃음을 쳤다.
그리곤 내 어깨를 감싸 날 일으킨 뒤, 걸음을 뗐다.
“헉…….”
으아아아아.
다리에 힘이 안 들어간다.
나는 폐하가 이끄는 대로 좀비처럼 비틀비틀 걸어갔다.
목적지는 푹신한 소파 위였다.
“눈을 가리는 건 좋은데, 어디 앉아서 하지 그래.”
설마, 우리 폐하…….
바닥에 쭈그려 앉지 말라고 소파까지 에스코트해 주신 거야……?
왜 다정하냐. 미쳤다.
“폐하.”
평상시라면 이런 다정한 모습 뒤에 무슨 계략이 있을까 걱정하고 있었을 테지만.
지금의 난 정신을 잃지 않는 것만으로도 용한 상태였다.
“오늘은 다정한 연기 삼가시길 부탁드립니다.”
“연기?”
“후폭풍이……. 제가 그걸 감당할 자신이……!”
“……원래 성녀보다 정도가 심하군. 설마 신성석의 부작용이 있는 건가? 잠시 여기 좀 봐봐.”
맞은편에 앉았던 폐하는 다급히 일어나 시야를 가린 내 두 손을 떼어냈다.
“으악.”
“어디가 아파?”
눈도 감고 있을걸.
사람이 잘생긴 것도 정도껏 해야 하는 거 아닌가.
무슨 이목구비가 저렇게 양심이 없냐.
……그런데 폐하는 왜 이렇게 걱정을…….
평소같이 비웃으면 좋을 텐데 이렇게 걱정하니까…….
“…….”
“얼굴은 또 왜 이렇게 빨개지는 거지? 성녀, 괜찮은가?”
“……폐하.”
“말해 봐.”
코앞에 진중한 표정으로 크리티컬 공격을 날리고 있는 저 외모.
일그러진 잘생긴 눈썹 아래 깊고 짙은 푸른 눈이 날 똑바로 바라보고 있었다.
이러니 내 눈꺼풀이 또 파업을 벌였지.
시린 눈에 눈물이 살짝 맺혔다.
나는 울상을 짓고 폐하에게 물었다.
“이건……. 무슨 수치플이에요……?”
진화했다. 폐하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