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화
“어, 없다고요?”
“만들려고 했었는데요, 재료가 다 떨어져서 하나도 못 만들어놨어요.”
초비는 해맑게 자백했다.
말투가 시원하다고 해서 상황도 시원해지는 건 아닌데 말입니다.
나는 초비의 양어깨를 붙잡고 흔들었다.
“흐억. 성녀님, 어지러워요.”
“그럼 다른 방법은요?”
사고로 먹긴 했지만, 애프터 서비스가 이런 식이면 곤란하다.
아니, 애초에 초비는 폐하한테 먹이려 했잖아?
그럼 해독제 말고 다른 대안이 있으니까 그런 일을 벌이려고 한 걸 텐데.
“해독제 말고 효과 없애는 다른 방법은 없어요? 전 지금 심각하단 말이에요.”
“현 상황에서 제일 빠른 방법은…….”
역시. 초비는 다 계획이……!
“약효가 빠지는 걸 기다리시는 거죠.”
없군.
이게 무슨 ‘실연의 아픔은 시간이 해결해 줄 거야.’ 같은 소리인가.
시간이 해결은 해주겠지!
그게 기약 없는 기다림이란 게 문제지.
내게 필요한 건, 지금 당장 내 상태를 원래대로 돌려줄 해결책이었다.
“초비……. 분명히 ‘효과는 단 24시간!’ 이러면서 자신만만하게 말했잖아요. 오늘 3일째라고요.”
“벌써 삼 일이 지났어요?”
“지났는데요.”
새삼스럽게 놀라는 초비가 얄미워 퉁명스럽게 대꾸했다.
3일 동안 내 하루하루는 뇌와 몸의 전쟁터였다고.
흐헝. 내 최애 돌려줘.
초비는 문진하는 의사처럼 질문을 쏟아냈다.
“좀 전에 말씀하신 것처럼 증상도 여전하시고요? 레바르튼 근위대장을 생각하면 심장 박동이 빨라진다든지, 뺨이 붉어진다든지. 자기 전에 얼굴이 아른거린다든지?”
“……초비, 지금 나 놀려요?”
“아, 아닌데요.”
초비는 급히 고개를 저었지만, 나는 봤다.
질문하는 입꼬리가 씰룩거리고 있던걸.
새로운 장난감에 들뜬 아이를 연상시키는 모습이었다.
초비는 연구자니까 이과겠지.
이래서 이과는……!
“다 알면서 그런 질문 하는 거죠? 그래요. 심장 박동이 빨라지고, 뺨이 붉어지고, 시도 때도 없이 눈에 아른거리고 거기다…… 거기다……!”
아른거리다 못해 꿈에도 나왔다고요!
누가? 누구긴 누구겠어. 당연히 헨켈 대장이지…….
꿈에서 나타난 대장이 커프스단추를 풀며 나한테 다가와서는-!
그 이상은 나도 말 못 한다.
‘이게 뭐람.’
젠달에 뼈를 묻기로 작정하고 세운 내 인생 계획은 이런 게 아니었는데!
나는 머리를 부여잡았다.
“글러 먹었어.”
“이상하네요.”
초비는 팔짱을 끼고 앉아서 고개를 갸웃거렸다.
“……뭐가요.”
“‘사랑의 묘약’ 배합은 다 똑같거든요. 연구원들한테 먹였을 때도 24시간을 넘긴 애들이 없었단 말이죠? 저도 하루면 괜찮았는데.”
“초비도 먹어봤어요? 상대는 누구였는데요? 아니, 어떤 식으로 효과가 없어졌어요? 서서히 마음이 식어요? 아니면 단번에?”
초비가 경험자였다니.
일말의 희망에 질문을 던졌지만, 돌아오는 건 초비의 “으음…….” 하는 고민이 섞인 감탄사였다.
“뭐든 개인차가 있긴 하지만, 같은 배합에서 이 정도로 지속시간이 다르게 나오는 건 말이 안 되거든요.”
“그러면 제 상황은 뭔데요……?”
“어쩌면…….”
이어진 초비의 말에, 불길함이 내 마음에 그늘처럼 드리워졌다.
***
세이칸 신은 사람을 창조했다.
서로 사랑하라고.
“…….”
세이칸 신은 감정을 만들었다.
서로 사랑하라고.
“으아아아.”
청소하면서 발견한 게 이딴 내용의 그림책이라니.
나는 사람 두 명이 포옹하는 그림이 그려진 책을 기겁하며 던졌다.
‘사랑이 뭐예요?’라고 적힌 제목에 홀려 가지곤-!
“완전 위험해.”
나는 거꾸로 쥔 빗자루 손잡이의 끝으로 책을 덮고 원래 있던 자리로 밀어 넣었다.
폭발물 처리반 저리 가라 할 정도로 조심스러운 움직임이었다.
“어쩌면……. 진짜 사랑이 아닐까요?”
“사랑이라니. 말도 안 돼.”
나는 머리를 흔들어 초비가 어제 했던 말을 부정했다.
“내 심장, 설레지 마라.”
내 가짜 사랑이 진짜일지도 모른다.
지금 분홍빛으로 제정신이 아닌 내 뇌에 이런 실낱같은 떡밥을 주는 건 아주 위험했다.
정신 바짝 차려.
이 분홍색은 인공색소라고.
“너 약효 빠지면 후회한다. 헨켈 대장이랑 강 건널 생각 꿈에도 하지 마.”
……대장이랑?
퍽.
빗자루로 이마를 때리니 그래도 정신이 좀 든 거 같다.
초비의 말을 정말 믿는 건 아니지만(아마도), 시간이 흐를수록 불안해지는 건 어쩔 수 없었다.
4일째인데도 증상은 여전했다.
오늘 헨켈 대장이 먹은 점심은 토마토 닭고기 스튜와 바게트 세 조각.
이러다 정말 찐사랑이 돼버리면 나는……!
“허허. 그러다가 이마가 남아나지 않으시겠습니다.”
잠시 외출했던 라울 신관님이 내 쪽으로 걸어왔다.
나는 내 이마를 노리던 빗자루를 멈추고 고개를 돌렸다.
“엇, 다녀오셨어요?”
“다녀왔습니다. 그리고…… 크흠. 흠.”
“음? 무슨 하실 말씀 있으세요?”
라울 신과님은 할 말이 있는 사람처럼 헛기침을 두어 번 했다.
“지난번엔 늙은이가 성녀님께 실수한 모양이어서 말입니다.”
“실수요?”
“성녀님께선 황제 폐하가 아닌 헨켈 근위대장을 마음에 두고 계신다고…….”
“아, 아닌데요.”
“그럼 역시 황제 폐하를?”
“그것도 아닌데요……!”
진땀이 났다.
소문이 어디까지 퍼졌길래 세상사 관심 없는 라울 신관님마저 이런 소리를 하시는 거지.
라울 신관님은 손에 든 물건을 내게 건넸다.
“이건 밖에 있는 젊은 놈들이 성녀님께 가져다드리라고 하더군요.”
“……이게 뭔데요?”
초대장처럼 생긴 봉투였다.
세모난 입구엔 작은 생화 몇 송이가 꽂혀 있었고, 향수를 뿌렸는지 달콤한 향이 났다.
“저도 모릅니다. 성녀님께만 보여드려야 한다고 어찌나 성화던지. 허허. 열어서 확인해보시죠.”
…뭐지?
나는 안에 든 편지지를 꺼내서 펼쳐 들었다.
「황실 근위대장,
헨켈 레바르튼 조사 보고서」
엥?
첫 장, 첫 번째 줄부터 심히 당황스러웠다.
나는 지진 난 것처럼 움직이는 동공으로 글씨를 읽어 내려갔다.
「헨켈 레바르튼.
나이 26세.
레바르튼 백작가의 삼남.
……
칼리스칸 아카데미 차석 졸업.
……
진중한 매력, 같은 남자도 반할 것 같은 검술 실력.
……」
“열중해서 읽으시는 걸 보니 중요한 내용인가 봅니다.”
이……, 이게 뭐야.
편지지는 총 2장이었다.
첫 번째 장은 헨켈 대장의 인적 사항과 좋아하는 음식, 매력 포인트 등이 한가득.
두 번째 장에는 헨켈 대장의 요일별 일과가 빼곡히 적혀있었다.
그리고 두 번째 장의 뒷면엔…….
「성녀님의 행복을 응원합니다!
- 성녀교 일동」
“…….”
“허허……. 황궁 내에서 젊은 놈들이 만든 게 있다더니.”
어느새 곁에 온 라울 신관님이 재밌다는 듯 웃음을 흘렸다.
부들부들.
편지지를 든 내 손이 떨렸다.
성녀교 같은 게 있는 것도 놀랍지만, 이게 도대체 무슨 일이야.
헨켈 대장의 조사라니.
헨켈 대장의……!
“성녀님?”
이런 거 필요 없다며 당장에라도 찢어버리려고 했는데.
열심히 쓴 흔적이 가득한 글씨들을 봐라.
“……이런 게 다 정성이더라고요.”
크흡. 나 못 버려 이거…….
나는 눈물을 머금고 고이 접은 편지지를 품 안에 소중히 넣었다.
***
“폐하, 연구소장을 찾았습니다.”
에본의 보고에 알렌드는 보던 서류에서 눈을 떼고 고개를 들었다.
열린 문으로 기사 둘에게 양팔을 결박당한 채 대롱대롱 매달려 들어오는 사람이 있었다.
산발이 된 분홍색 머리, 여기저기 더러워진 흰색 가운.
“두고 나가라.”
“네. 하이벤 재상님.”
기사들이 나가고 문이 닫힌 집무실엔 알렌드, 에본, 초비 세 사람만이 남았다.
알렌드는 바닥에 무릎을 꿇고 있는 초비를 불렀다.
“연구소장.”
“네, 넵.”
“하룻밤 동안 산책이라도 하고 왔나 보군.”
성녀의 증상이 알려지고 황제에게 감금당한 2박 3일.
탈출을 감행했던 초비는 만 하루 만에 잡혀 들어왔다.
“제가 그랬던 건 모두 성녀님을 도와드리려던 의도로…….”
“알고 있네. 그래서 말했지 않은가. 해독제를 개발하면 나가도 좋다고.”
초비는 식은땀을 흘렸다.
해독제는 못 만든다. 재료가 없으니까.
그렇다고 성녀의 약효가 떨어지는 걸 기다리기엔, 감금당한 장소가 너무 끔찍했다.
본궁의 회의실 옆.
가벽을 세워 만든 방은 방음에 취약했다.
무슨 소리냐 하면, 온종일 높으신 인간들의 목소리가 들린다는 거였다.
신성력이 크고, 신분이 높은.
초비에겐 고문이 따로 없었다.
버티다 못해 방을 뛰쳐나왔다.
물건을 챙기러 연구소에 갔다가 성녀를 만났고.
다음날 새벽, 모습을 숨겨주는 망토를 입고 황궁을 탈출하려다 경비병에게 잡혔다.
‘발만 안 보였으면 안 잡혔는데.’
그전에 황제와의 계약만 아니었으면 여기에 있을 필요도…….
초비는 황제를 힐끔 바라봤다.
사람을 싫어하는 그녀가 보기에도 황제는 무척 잘생겼다.
성녀가 황제의 웃는 얼굴을 한 번 보겠다고 난리 칠 만했다.
황제는 맨날 웃는 얼굴인데 뭘 더 보겠다고 그러는지는 이해 가지 않았지만.
지금도.
생글생글 웃으며 저를 보고 있지 않은가.
“연구소장, 자신이 없다면 관둬도 좋네.”
가뭄의 단비 같은 말이었다.
책임감이라곤 없는 초비가 냉큼 대답했다.
“폐, 폐하. 말씀드리기 송구스럽지만, 제가 해독제를 만들 자신이 없습니다.”
“알겠네.”
이렇게 순순히 알겠다고 해줄 줄이야.
‘처음부터 못 한다고 할 걸. 괜히 2박 3일 동안 재수 없는 귀족들 소리나 듣고 살았잖아?’
그리운 자신의 연구실로 돌아갈 수 있다는 상상에 초비의 가슴이 뛰었다.
당연한 소리겠지만, 황제의 말은 거기서 끝나지 않았다.
“대신에 해독제를 만들 대리인을 구해야겠지. 성녀를 저리 지내시게 할 수는 없으니까.”
황제의 얼굴이 심각했다.
“그렇지 않은가. 재상.”
“그렇습니다.”
황제와 에본이 중대한 사항을 논하듯 말을 주고받았다.
초비는 두 사람을 번갈아 바라봤다.
“그럼 제조법을 말해줘야겠군.”
“제조……법 말씀이시죠?”
“그간 기다려줬지 않는가. 연구소장이 해독제를 만들 수 있다고 그래서.”
제조법을 알아야 해독제를 만들 수 있다.
맞는 소리긴 한데…….
‘당했다.’
황제한테 제조법을 알려줄 수는 없었다.
다시 할 수 있겠다고 할까.
말을 번복하는 것을 봐줄 정도로 황제는 호락호락하지 않았다.
‘성녀님이 먹은 게 ‘그거’라는 걸 알면…….’
목이 떨어질 지도 모른다.
머리를 핑핑 돌리던 초비는 꿀꺽 침을 삼켰다.
심상치 않은 초비의 모습에 알렌드가 눈을 가느다랗게 떴다.
“……초비, 무슨 짓을 한 거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