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화
“초비.”
나는 숨을 몰아쉬며 초비의 앞을 막아섰다.
콧노래를 부르던 초비는 화들짝 놀란 얼굴로 날 쳐다봤다.
“서, 성녀님.”
“여기서 뭐해요?”
“황궁 산책 중이었는데요……. 무슨 문제라도…….”
“허퍼슨이 초비는 연구소 밖으로 잘 안 나온다고 하던데요.”
“날씨가 좋아서 걷다 보니 여기까지 왔지 뭐예요~”
“……폐하 동선을 쫓은 게 아니고요?”
초비는 시선을 아래로 돌리며 딴청을 부렸다.
나는 초비가 들고 있는 물잔을 향해 손을 펼쳤다.
“그거 주세요.”
“이, 이건 안 돼요.”
“거기에 약 탔잖아요. 다 봤거든요?”
조금 전, 폐하가 도착할 건물 옆면에서 초비는 물잔에 약을 타고 있었다.
잠복해 있다가 폐하한테 드리려는 속셈이었던 건지. 아니면 뭔지.
하여튼 초비가 들고 있는 물잔은 위험했다.
내가 주면 거들떠보지도 않을 테지만, 젠달의 다정한 폐하는 드실지도 모른다고……!
“힉. 그걸 어떻게 보셨어요?”
“주세요.”
“아, 안 돼요.”
초비는 물잔을 옆으로 숨겼다.
나는 물잔을 잡은 초비의 손을 감싸 쥐었다.
“그거 폐하 드릴 건 아니죠……?”
“제가 생각해보니깐요, 성녀님께선 안 쓰실 거 같아서~”
“이익. 그렇다고 초비가 쓰면 어떻게 해요!”
“제가 꼭 성녀님께 황제 폐하의 웃음을 보여드릴게요. 믿어주세요!”
“됐거든요……!”
초비는 설득이 먹히지 않는 강적이었다.
차라리 물잔을 엎어버리는 게 나을 듯해 나는 손에 힘을 줬다.
하지만 초비의 힘도 만만치 않았다.
우리는 컵을 사이에 두고 팽팽한 실랑이를 벌였다.
“이 방법이 제일 쉽다니깐요……!”
“약으로 사람 마음을…… 그러면 안 되죠……!”
“고작 24시간……인걸요?”
“그래도 사랑하는 감정은 자연스럽게……!”
“성녀? 그리고……. 연구소장인가?”
“헉.”
“꺄악.”
우려했던 폐하의 등장이었다.
초비와 나는 실랑이를 멈추고 숨을 몰아쉬며 폐하를 올려다보았다.
허억. 허억. 아까 멀리서 보고 지금 가까이서 보니까 더 잘생……. 아니, 아직 물잔을 못 엎었는데-!
“지금 두 분께서 뭘 하시는……?”
먼저 행동한 건 초비였다.
내 힘이 느슨해진 틈을 타, 초비는 물잔을 폐하를 향해 들어 올렸다.
그건……!
“폐하! 목마르지 않으세요?”
“저 목말라요!”
“아…….”
꿀꺽.
“…….”
꿀꺽. 꿀꺽.
사고 쳤다. 라고 생각하면서도 나는 마시는 걸 멈출 수 없었다.
한 모금도 남기면 안 돼.
“서, 성녀님?”
눈을 질끈 감은 채 물잔을 다 비우고서야, 나는 고개를 푹 숙였다.
초비가 안절부절못하며 날 불렀다.
“……먼저 가볼게요.”
땅만 보고 간다. 그리고 약효가 빠질 때까지 혼자 방에 틀어박혀 있는 거야.
나는 초비와 폐하를 스치듯 지나갔다.
“성녀.”
“성녀님!”
이거 설마 바짓단에도 반하나? 우리 폐하 제복핏에 두근거리는데.
“연구소장. 이게 무슨 일인지 잠깐 얘기 좀 나눴으면 좋겠네만.”
“아, 저. 그게……. 제가…….”
뒤쪽에서 추궁하는 폐하와 쩔쩔매는 초비의 대화가 들렸다.
도와주고 싶었지만, 우선은 내가 아무도 없는 곳에 틀어박히는 게 중요했다.
‘근데 이거 효과 있는 거 맞나? 마시기 전이랑 별다를 게 없는데.’
이제 오른쪽.
나는 기억 속에서 프로딘타 궁으로 가는 방향을 더듬어 걷다가, 갑자기 나타난 거대한 장애물에 부딪혔다.
그대로 엉덩방아를 찧을 정도로 단단한 게, 꼭 벽에 부딪힌 것 같았다.
“아야……. 벽인가? 언제부터 여기에 벽이…….”
“괜찮으십니까. 성녀님.”
“…….”
그윽한 아이홀, 진중하게 다문 입매. 모아이 석상 저리 가라 할 만큼 뚜렷한 티(T)존.
포마드로 넘겨서 고정한 남색 머리카락, 고요한 숲처럼 차분히 가라앉은 녹안.
단정히 세운 제복 깃마저 장난 아니다.
내가 말했던가.
금욕 섹시가 이 세상에 인간으로 태어난다면 이런 모습일 거라고.
“헨켈 대장.”
“네.”
지하까지 뚫고 들어갈 것만 같은 저 중저음의 목소리.
“……왜 대장이 제 앞에 있어요?”
망했다. 진짜.
들뜬 볼에 오르는 열기와 평소보다 조금 빠른 속도로 뛰는 심장을 느낀 내 이성이 심연에서 엉엉 울었다.
***
고향을 떠난 날부터, 알렌드의 하루는 늘 이른 새벽에 시작됐다.
황제가 된 후에도 마찬가지였다.
밤은 늘 불안했고 새벽은 잡생각이 많았다.
다시 잠은 오지 않았고, 딱히 시간을 보낼만한 것은 없었다.
혼자 가만히 있는 것은 나쁘지 않았지만, 때로 드는 잡생각이 과거로까지 흘러가는 것은 곤란했다.
그래서 그는 매일 서재로 나갔다.
“갸-옹.”
이른 새벽, 궁 주변을 돌고 온 사역마 루가 알렌드가 있는 서재의 창문으로 들어왔다.
루는 책상 위로 뛰어올라 알렌드의 손에 얼굴을 비볐다.
오자마자 밥을 조르는 것을 보니 오늘은 몰래 숨어 있는 사람이 없었나 보지.
루는 성녀를 발견한 날이면 돌아와서 딴청을 부리다 밥을 조르곤 했다.
알렌드는 검지를 루의 입가에 가져갔다.
손끝에서 나온 신성력이 루의 입으로 들어갔다.
검은 꼬리가 기분 좋은 듯 낮게 살랑였다.
“수고했어.”
“갸옹.”
알렌드는 몇 달 만에 고요함을 느끼며 책장을 넘겼다.
‘조용하군.’
십 수 년간 이런 새벽이 일상이었는데, 고작 몇 달 요란함을 느꼈다고 어색해진다는 게 우스웠다.
알렌드는 저도 모르게 피식 웃음을 지었다가 입매를 매만졌다.
‘이 정도는 나쁘지 않아.’
어찌 됐든 성녀는 그가 인생을 책임져야 할 사람이었다.
처음부터 신성력의 여부는 상관없었다.
“소환진이 빛난다! 성녀님이 오시는 거야!”
“미……친.”
중요한 건, 평생을 지켜주겠단 그날의 다짐이니.
그 다짐 덕분에 삶이 즐겁다 느껴지는 날이 오리라곤 전혀 예상하지 못했지만.
이상하게도 성녀와 함께 있으면 웃을 일이 많았다.
속에서 우러나오는 웃음을 짓는 게 얼마 만인지.
남녀 간의 감정은 없겠지만, 평생을 봐야 한다면 이런 즐거움 정도는 괜찮을 것 같았다.
‘평생이라.’
알렌드의 입매가 그가 눈치채지 못할 정도로 살짝 올라갔다.
책장을 넘기던 손이 성녀를 닮은 다람쥐 삽화에 한참을 멈춰있었던 것도, 그가 눈치채지 못한 일이었다.
똑똑.
노크 소리에 알렌드는 고개를 들어 창문을 바라봤다.
어느새 날이 밝아왔다.
“들어오게.”
문을 열고 나타난 사람은 헨켈 레바르튼 근위대장이었다.
이 또한 쳇바퀴처럼 굴러가는 일과 중 하나였다.
간밤에 일어난 일이나, 오늘 황궁을 출입하는 사람들의 명부를 보고 받는다.
하지만 오늘의 헨켈은 달랐다.
언제나 차분한 표정을 유지하던 그가, 평소와 달리 초조한 눈빛으로 문을 힐끔거렸다.
살짝 열린 문을 닫아야 하는지, 말아야 하는지도 고민하는 듯했다.
“오늘도 그러시는가?”
“……네. 그렇습니다.”
알렌드의 질문에 헨켈은 난감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알렌드는 자리에서 일어나 문으로 걸어갔다.
활짝 열린 문을 지나 복도로 나온 두 남자의 시선이 한 곳을 향했다.
“저기 있으시군.”
“저기에 계십니다.”
복도 모퉁이에서 시작된 그림자가 바닥에 길게 드리워져 있었다.
조용히 바라보고만 있자 모퉁이에서 강아지처럼 빼꼼 내민 얼굴이 나타났다.
밤하늘 같은 신비로운 한 쌍의 눈이 놀란 듯 살짝 커지더니 후다닥 모퉁이 뒤로 사라졌다.
“경과 눈이 마주치신 모양이군.”
“……네.”
“내 쪽은 쳐다보지도 않으시고.”
미소 짓는 알렌드의 눈썹이 살짝 들썩였다.
***
“……인생 개망했어.”
내 심장.
이것아.
“네가 이렇게 갈대 같은 녀석인 줄 몰랐다!”
나는 가슴팍을 부여잡았다.
너 나와. 나랑 대화 좀 해!
“흐헝…….”
나는 계단에 쭈그리고 앉은 내 무릎에 팔을 감싸고 얼굴을 파묻었다.
“이게 뭐야…….”
하루면 된다는 초비의 말은 순 개뻥이었다.
벌써 3일째.
내 심장은 헨켈 대장한테 미친 듯이 뛰었고, 나는 대장을 쫓아다녔다.
……아침부터 저녁까지.
대장이 3일 동안 먹은 음식이 뭔지도 쭉 읊을 수 있을 정도였다.
“헨켈 대장…….”
으아아아악.
뭘 ‘헨켈 대장…….’ 이러면서 얼굴을 붉히고 있는 건데!
나는 포개진 팔에 이마를 부딪쳤다.
‘정신 차려!’
나도 이런 내가 싫다.
하지만 이젠 뇌 속마저 가짜 감정에 먹혀버렸다.
그래도 이런 약, 폐하가 안 먹어서 다행인가.
오늘도 봤지. 그 반짝이는 금발, 조각 같은 이목구비, 어스름한 새벽의 그윽한 감성을 고스란히 닮은 남색 머리카…….
“나가.”
내 머릿속에서, 나가.
“내 최애는 폐하라고…….”
하지만 헨켈 대장과 폐하가 물에 빠지면 누구부터 구할 건데?
뇌 속에서 악마의 속삭임이 들려온다.
그런 알량한 테스트로 내 덕심을 시험하려 하다니.
당연히……!
“폐하는 뭐든 잘하시니까 수영도 잘하시지 않을까……?”
나는 그렇게 중얼거린 내 입을 찰싹 때렸다.
이런 고뇌를 언제까지 안고 살아야 하는 걸까.
그것도 이 마음이 물약이 만들어낸 가짜 감정이라는 걸 아는 상태로.
울적한 마음에 눈물이 날 거 같아 코를 훌쩍였다.
“초비…….”
초비는 그저께부터 사라졌다.
허퍼슨이 자택으로 귀가하진 않았다고 했으니 초비는 황궁 내 어딘가에 있을 게 분명했는데.
도통 목소리도 들리지 않고 모습도 찾을 수가 없었다.
그러니 시간이 날 때마다 연구소 앞에서 초비가 올 때까지 죽치고 앉아 있는 중이었다.
“진짜 세이칸 신한테 말해버릴까 보다.”
말할 방법도 없지만.
그냥 해본 말에 ‘헉’하고 숨을 들이마시는 소리가 났다.
나는 잽싸게 고개를 들었다.
“초비!”
어디 야반도주라도 하는 행색으로 양어깨에 짐가방을 멘 초비가 서 있었다.
“성, 성녀님!”
초비는 다시 내 앞에 납작 엎드렸다.
다른 사람이 이러는 건 안 익숙해질 거 같은데, 초비가 이러는 건 익숙해진 것 같다.
“죄, 죄송합니다. 그렇지만 지난번에 세이칸 신의 이름으로 맹세하셨으니 제 잘못을 문제 삼지 않으셔야…….”
그 맹세가 그런 의미였나?
“싫은데요.”
놀란 초비의 어깨가 들썩였다.
반박 못 하는 거 보니까 초비 좋을 대로 상황에 끼워 맞춘 모양이었다.
“그건 나중에 얘기하고요. 저 약 효과가 안 없어져요. 분명히 24시간이면 끝난다고 그랬잖아요?”
“효과라 하면……?”
“보고 싶고, 눈이 마주치면 부끄럽고, 심장이 뛰고…….”
말하면서도 목소리가 떨린다.
그 녹안. 그 묵직한 중저음의 목소리.
헨켈 대ㅈ…….
짝.
“정신! 차리라고!”
“서, 성녀님! 왜 손으로 이마를!?”
“아니, 잠시 나 자신과의 싸움을 좀…….”
심각하다.
이 상황을 빨리 벗어나야 해.
“어쨌든요. 해독제 주세요.”
“어……. 성녀님.”
초비는 민망한 웃음을 지었다.
“……설마.”
“없는데요. 해독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