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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략 황제의 외모가 내 취향이라 곤란하다-19화 (19/150)

19화

나는 그냥 허퍼슨의 사촌에게 폐하를 웃길지도 모르는 몇 가지 재주를 배우고 싶었던 것뿐이었다.

그게 이런 상황까지 오게 될 줄은 전혀 예상하지 못했다고…….

“서, 성녀님께…….”

먼지 쌓인 바닥에서, 작은 체구의 여자가 내게 절을 한 채 몸을 벌벌 떨고 있었다.

그녀가 입은 하얀 연구소 가운 위로 분홍색 웨이브 머리가 길게 늘어졌다.

“용서를…….”

“왜, 왜 이러시는 거예요?”

사촌이니 알겠지 싶어 허퍼슨에게 물어보니 난감한 듯 내 눈치를 살피며 말했다.

“연구소장은 신성력이 없어서요……. 아시다시피 젠달은 다른 나라보다 신성력이 우선시 되는 나라고…… 그러다 보니 아마 얘가…….”

그러니까 그게 무슨 상관이냐고요-!

저기 옆 궁 신성력 제로인 에본 재상님은 다른 귀족들을 눈짓으로 부리던데……!

“저, 그냥 일어나시면 안 될까요……?”

“아, 안 됩니다. 성녀님께 감히 고, 고고개를 들 수는….”

얼마나 겁을 먹고 있는 건지, 바닥에 찰싹 달라붙은 이마가 덜덜덜 소리를 내며 진동했다.

눈이 마주쳐서 ‘안녕하세요.’라고 인사만 했을 뿐인데, 이럴 일인가 싶다.

그리고요.

……신성력은 저도 없거든요?

이걸 말할 수도 없고.

나는 답답한 마음에 두 손에 얼굴을 파묻었다.

“으아…….”

“히이익…….”

이어 연구소장의 기겁하는 소리가 들렸다.

환장하겠다.

***

그러니까, 앞의 상황을 설명하려면 시간을 조금 앞으로 돌려야 했다.

“허퍼슨의 사촌이 황궁 연구소의 소장이라고요?”

“네. 숙식도 거기서 해결하고 있으니 오늘도 있을 겁니다.”

초비의 사촌이 연구소장이라니. 그것도 황궁 내에 있는.

쇠뿔도 단김에 빼라 했다.

허퍼슨과 나는 퇴근 후에 연구소를 찾아갔다.

예배당에서 30분을 걸어가면 나오는 곳이었다.

“와. 이런 곳이 황궁 내에 있었어요?”

“과거에 유희용 사냥터로 쓰이던 곳입니다. 최소한의 관리만 하고 방치돼 있던 곳에 황제 폐하께서 연구소를 만드셨죠.”

마치 숲속이라도 해도 믿을 만한 울창한 나무들.

2층짜리 연구소는 그 속의 작은 연못 옆에 외딴 섬처럼 자리 잡고 있었다.

허퍼슨은 2층의 ‘연구소장실’ 문 앞까지 나를 안내했다. 그리고 노크하기 직전, 내 쪽을 돌아봤다.

입술을 달싹거리며 뭔가를 망설이는 듯했지만, 이내 ‘제가 어떻게 성녀님의 뜻을…….’ 이라며 체념한 얼굴로 문을 두드렸다.

똑똑.

“초비.”

“…….”

안에선 대답이 없었다.

허퍼슨이 거침없이 문고리를 돌렸다.

“헉. 그렇게 막 열고 들어가도 돼요?”

“괜찮습니다. 안에 있어도 없는 척할 녀석이라서요. 그나저나 이런 누추한 곳에 귀한 분을…….”

문이 열리며 방의 전경이 드러났다.

교실 반 정도 되는 크기의 방. 중앙에 6인용 테이블과 오른쪽 벽의 책꽂이들, 왼쪽에 책상 하나가 가구 전부였지만, 방은 결코 휑해 보이지 않았다.

“…….”

“오…….”

사방이 잡동사니와 책의 더미들로 가득했다.

오랫동안 방치된 것도 있던 듯, 몇몇 더미 위에 쌓인 먼지들이 햇살 속에서 둥둥 떠다니고 있었다.

오오, 더럽다.

허퍼슨이 좋아하겠어.

허퍼슨의 청소실력은 나날이 늘어가고 있었다. 요즘은 더러운 걸 치우는 거에 희열을 느끼는 듯도 했으니까.

지난번 라울 신관님의 사물함에서 굴러다니는 먼지를 보고 콧김을 내뿜는 모습도 목격했다.

“……이렇게까지 더러울 줄은.”

허퍼슨의 목소리가 떨렸다.

“허퍼슨 취향 저ㄱ…….”

“죄송합니다.”

죄송?

“성녀님께 처음으로 받은 가르침이 청결이건만……. 이런…… 이런 참상을 성녀님께 보여드리다니…….”

허퍼슨은 주먹을 불끈 쥐고 성큼성큼 안으로 들어갔다.

목적지는 책상 위에 엎드려 있는 한 사람의 뒤였다.

흰색 가운. 등을 덮은 분홍색 웨이브 머리.

등짝 스매싱이라도 날릴 것처럼 허퍼슨의 손이 올라갔지만, 바른 청년 허퍼슨이 그럴 리가 없지.

그는 엎드린 사람의 어깨를 슬쩍 두드렸다.

“초비.”

“…….”

“초비.”

“…….”

“……주무시는 거 같은데요?”

“깨워 보이겠습니다.”

미동도 없을 정도면 곤히 잠든 거 같은데.

어떻게 깨운다는 거지?

허퍼슨은 초비의 귓가로 고개를 숙였다.

나는 청력을 집중했다.

“최종 시안 확인했는데요.”

번쩍.

눈을 뜬 초비는 용수철처럼 튕기듯 몸을 일으켰다.

눈썹이 보이도록 자른 앞머리 아래, 머리보단 붉은 기가 도는 분홍색 눈이 책상 위를 빠르게 훑었다.

그러다 옆에 선 허퍼슨을 발견하곤 그의 어깨에 주먹질했다.

“야 이, 미친놈아.”

“아악.”

허퍼슨이 몸을 쭈그렸다. 비장했던 모습이 단번에 사라졌다.

“내가 그걸로 잠 깨우지 말라고 그랬지.”

“초비, 초비! 성녀님! 옆에 성녀님!”

“자꾸 장난칠래? 내가 그 말을 믿을 거 같냐? 성녀님께서 여기 왜 오…….”

초비는 허퍼슨의 멱살을 잡고 흔들다 허퍼슨의 검지가 향하는 곳으로 고개를 틀었다.

그리곤 그대로 굳어 날 향해 눈을 끔뻑였다.

오, 귀여운 미인상. 살짝 올라간 눈꼬리 내 취향……. 아니지, 인사부터 해야지.

“아, 안녕하세요.”

“헐.”

초비는 입을 벌리고 허퍼슨의 멱살을 놨다.

내 외형으로 내가 성녀인 걸 알아본 모양이었다.

‘이 패턴은…….’

직감했다. 이건 ‘성녀님…!’ 하면서 눈을 빛내는 그거다.

그래도 개살구 성녀 경력 8개월 차. 나도 조금은 뻔뻔함을 장착했다.

기대에 찬 눈빛이든, 감격에 젖은 눈빛이든.

‘와라.’

나는 일대일 대결에 임하는 선수처럼 초비의 다음 행동을 기다렸다.

“성녀님……!”

하지만 현실은 때론 예상과 다른 법이다.

“미, 미천한 제가 감히 서, 성녀님을 가, 같은 눈높이에 서서 뵀습니다.”

“어, 어……?”

초비는 잔악무도한 폭군이라도 만난 양 날 향해 넙죽 엎드렸다.

푹 숙인 머리 앞쪽으로 모인 두 손이 사시나무처럼 벌벌 떨렸다.

“용서, 용서를…….”

아니, 대체 왜……?

***

그래서 다시 지금,

“…….”

아까 그 상태로 10분 정도 흐른 것 같다.

어떤 말로 어르고 달래도 초비는 요지부동이었다.

몸의 떨림도 잦아들지 않았다.

으. 저거 분명히 내일 근육통 세게 올 텐데. 내 근육이 다 아프네.

허퍼슨이 답답했는지 엎드린 초비를 향해 상체를 숙였다.

“초비, 성녀님께서 일어나도 괜찮다 하셨잖아. 대체 왜 이러는 거……흐억.”

“허퍼슨?!”

마치 그 순간을 기다리기라도 한 듯, 초비의 손이 허퍼슨의 팔을 낚아챘다.

중심을 잃은 허퍼슨이 바닥을 굴렀다.

“초비, 너……!”

“…….”

이게 대체 무슨 일이지?

예상치 못한 상황에 당황하는 사이, 엉금엉금 기어간 초비가 허퍼슨의 귓가에 뭐라 속삭였다.

잠시 뒤, 허퍼슨은 떨떠름한 얼굴로 바닥에서 일어났다.

“……성녀님, 연구소장이 성녀님께서 세이칸 신의 이름으로 용서를 해주신다면 얼굴을 들겠다고…….”

“세이칸 신의 이름이요?”

“네…….”

협상안 같은 사촌의 부탁이 수치스러웠는지, 허퍼슨의 얼굴이 새빨갛게 물들었다.

그제야 맥락 없던 초비의 행동이 조금이나마 이해됐다.

사람들이 두려워하는 건 내가 아니라 뒤에 있는지 없는지도 모르는 세이칸 신이었지. 참.

내 말보다 세이칸 신을 걸고 하는 말이 필요했던 건가?

나는 웅크린 채 떨고 있는 초비를 바라봤다.

“연구소장은 신성력이 없어서요…….”

쪼잔하다.

기왕 줄 거 다 나눠주면 얼마나 좋아?

내가 세이칸 신이 피조물을 편애한다는 건 진작 알아봤다.

편애하지 않으면 그 완벽한 사기캐가 이 세상에 나올 수가 없잖아?

그 얼굴에, 그 몸매에, 그 능력에-!

“어쩌자고 그렇게……!”

“서, 성녀님, 내키지 않으시면 이대로 영영 고개를 박고 있으라 하셔도 됩니다.”

“…….”

허퍼슨이 안절부절못하며 다급히 말했다.

나도 모르게 내뱉은 속마음이 오해를 불러일으킨 모양이었다.

그 편파적인 애정이 빚어낸 결과물에 감동하느라 그만…….

“아뇨. 저기, 초비. 뭘 용서해야 하는 진 몰라도 용서할게요. 세이칸 신의 이름……으로.”

……신의 이름으로.

입 밖으로 내뱉으니 생각보다 오글거리는 말이었다.

진짜 성녀면 몰라도 신앙심이라곤 없는 내가 하기엔 좀 그렇지. 으으.

팔에 돋아난 소름을 매만지려는 찰나, 초비가 벌떡 상체를 들었다.

갈라진 앞머리 사이로 마룻바닥 자국이 선명히 새겨진 붉은 이마.

“…….”

아직 무릎을 꿇고 있는 초비와 눈이 마주쳤다.

‘또 그러진 않겠지……?’

살짝 걱정스러운 마음이 들려는 찰나, 초비의 눈꼬리가 장난스럽게 휘고 입꼬리가 시원스레 올라가며 밝은 목소리가 터져 나왔다.

“이야~ 제가 성녀님을 뵐 줄은 상상도 못 했다니깐요!”

***

“……허퍼슨의 사촌은 여러모로 대단한 거 같아요.”

“하하……. 쟤가 좀 정신이 오락가락합니다.”

허퍼슨과 나는 먼지를 털어낸 의자에 앉아 분주하게 움직이는 초비의 뒷모습을 보고 있었다.

사방에 널려있던 잡동사니들은 모두 초비의 발명품들이었다.

도약력을 본인 키의 세 배까지 높여주는 신발이라던가, 복용자를 만 하루 동안 잠재울 수 있는 수면제라던가.

“이런 걸 만들었다고요? 천재 아니에요?”

“신발은 무릎을 부수고 수면제는 한 달 내내 불면증을 일으키지만요. 초비, 너 진짜 성녀님께 설명 제대로 안 해 드릴래?”

“말씀드리려고 했다. 뭐.”

허퍼슨이 없었으면 위험할 뻔했다.

나는 테이블 위에 놓인 감긴 눈 모양의 펜던트를 구경하다가, 초비의 목소리에 시선을 돌렸다.

“그러니까 성녀님께선 황제 폐하께 웃음을 드릴 만한 물건을 찾고 계신 거죠?”

“꼭 물건이라기보다는…….”

시야에 날개 달린 신발이 들어왔다. 내 무릎이 박살 난다고 폐하가 웃어줄 거 같진 않은데…….

멍청이처럼 보면 몰라.

“허퍼슨이 초비한테서 배운 재주 있잖아요? 저도 그런 걸 좀 배워보고 싶어서요.”

“성녀님도. 그건 애들이 장난하는 수준이죠. ……오, 여기 있었네.”

한참 여기저기를 뒤지던 초비는 책상 서랍에서 작은 유리병 하나를 꺼낸 뒤, 우리가 있는 곳으로 걸어왔다.

“그것보다는 제게 더 확실한 방법이 있어요.”

“확실한 방법요?”

고양이를 닮은 초비의 눈이 자신만만한 빛을 띠었다.

그녀는 내게 서랍에서 꺼낸 유리병을 건넸다.

코르크 마개로 막힌 향수병만 한 유리병에는 투명한 자줏빛의 액체가 들어 있었다.

“이게 뭔데요……?”

별로 예감이 좋지 않은데.

초비는 씨익 웃었다.

“사랑의 묘약요.”

***

“효과는 단 24시간!”

약을 마시고 난 뒤 처음 본 상대한테 반한다.

어디 소설이나 만화에서 나올 법한 이야기였다.

“성녀님을 사랑하시게 되면 그런 웃음쯤은 바로 보여주시지 않겠어요?”

그렇다 해도 이런 성분도 모르는 약을 폐하한테 먹일 순 없지.

본인 의사 없이 약으로 사랑에 빠지게 한다는 것도 싫었다.

나는 미련 없이 코르크 마개를 열고 안에 있는 내용물을 화단에 부었다.

‘폐하의 청량한 웃음은 내 노력으로 성취한다!’

마침 예배당 건물 맞은편에서 이동 중인 폐하가 보였다.

오늘은 운이 좋네.

그래, 이건 약에 의존하지 말고 열심히 웃겨 보라는 폐하의-!

“초비?”

폐하의 동선 끝에 숨은 분홍 머리는 분명 초비였다.

그리고 초비의 손에 들린 익숙한 모양의 병.

그 속에서 투명한 자줏빛의 액체가 찰랑거렸다.

‘저거……. 사랑의 묘약 아니야?’

저걸 가지고 뭘 하려는 거지?

유심히 보고 있는 와중, 초비가 병의 내용물을 반대편 손에 든 물잔에 모두 따랐다.

“……안 돼.”

불길함이 등줄기를 타고 흘렀다.

나는 빗자루를 내동댕이치고 달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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