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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략 황제의 외모가 내 취향이라 곤란하다-18화 (18/150)

18화

나는 절실했다.

자존심이고 뭐고 이렇게 대놓고 부탁할 만큼.

“한 번만 웃어주실 수 있으신가요.”

“…….”

“지난번 마차에서 웃으셨던 것처럼……. 그 청량함을 제 눈으로 꼭 보고 싶어서…….”

아, 그 전에.

나는 후다닥 소파 뒤로 가서 폐하와 거리를 벌리고 등받이를 꼭 잡았다.

이제 위험할 건 없다 이거야.

“아임 레디.”

“……그러고 보니 성녀가 젠달에 온 지 얼마 안 됐을 때 이상한 부탁을 한 적이 있었지.”

폐하는 내 부탁을 죄다 무시하고 말했다.

“손가락으로 무슨 모양을 만들어서 날려 달라 그랬나? 지금처럼 이유 없이 웃어달라고도 했었는데.”

“으아아. 그건 제 흑역사라고요-!”

설마하니 꿈인 줄 알고 까불던 과거의 이야기를 저 입에서 들을 줄이야.

아직도 잠자다가 이불을 빵빵 차게 되는 내 흑역사를……!

“그렇게 보고 싶으면 한 번 웃겨 보든가.”

폐하는 정말 입꼬리 한 번 올려주지도 않고 도발했다.

하지만 나도 할 말은 있다.

내가 요 며칠 사이 폐하를 웃기려고 얼마나 노력해봤는가.

뭘 해도 안 먹혔다.

혹시 남다른 취향이 있으신가 해서 심혈을 기울여 엄선한 개그는 좀 전에 들을 가치도 없다는 듯 정색해버리셨고.

“전 폐하를 웃기는 재주가 없다고요!”

“하.”

“어? 폐하, 지금 왜 웃으셨어요? 왜요? 왜 웃으셨는지 말씀해주시면 안 돼요?”

폐하의 입술 사이로 헛웃음이 흘러나왔다.

그조차도 지금은 귀했기에 나는 눈을 빛내고 물었다.

웃음 포인트라도 잡자.

“글쎄.”

폐하는 답해주는 대신 자리에서 일어났다.

“곧 아침을 먹을 시간이군. 두 사람분 식사를 준비하라 할까.”

“으……. 아니요. 몰래 나온 거라 들어가 봐야 해요.”

하녀들과 함께 시아나가 세숫물을 가지고 올 시간이었다.

지난번처럼 자리를 비워 소란을 일으킬 순 없지.

어쨌든. 오늘은 더 있어봤자 소득이 없겠어.

나는 소파 등받이에서 몸을 떼고 그대로 뒷걸음질했다.

멀어지면서 정면 시야에 들어오는 폐하의 비율이 믿을 수 없이 완벽하다.

오늘은 이만 물러가지만, 다음엔 반드시.

나는 비장하게 문고리를 잡아 돌렸다.

문을 완전히 빠져나가기 전, 폐하에게 하는 선전포고도 잊지 않았다.

“다음에 또 올게요. 앗, 아침 식사 맛있게 하시고요.”

내가……. 보고야 만다. 그 웃음.

***

“샤를, 제정신이야?”

델칸은 앞서가는 샤를을 붙잡았다.

뒤를 도는 그녀의 차분한 블론드 머리칼이 어깨 위에서 살랑였다.

그녀의 매혹적인 헤이즐넛 색 눈이 델칸에게 향했다.

“뭐가?”

샤를은 아무것도 모른다는 얼굴로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리곤 델칸을 위아래로 훑어봤다.

훤칠한 미남인 그녀의 이복동생은 왕실기사단의 정복이 무척 잘 어울렸다.

“다음엔 앞머리를 위로 올려보는 건 어때? 넌 이마랑 눈썹이 잘생겼거든.”

“뜬금없는 소리 하지 말고.”

델칸의 회색 눈동자에 초조함이 깃들었다.

제2 왕자인 루이드가 후원에서 투덜거리는 소리를 듣고는 곧장 샤를에게로 달려왔다.

샤를의 제멋대로인 말을 받아줄 정신이 아니었다.

“루이드 대신에 젠달에 간다고 했다며.”

“응.”

“너 진짜…….”

델칸은 주변을 빠르게 둘러보곤 아무도 없는 것을 확인한 뒤 목소리를 낮췄다.

“성녀를 데려올 셈이야?”

샤를의 욕심을 아는 것은 델칸 뿐이었다.

젠달의 황제 앞에선 의기소침하게 지냈고, 보니아로 돌아와서는 왕께 성녀는 젠달을 택했으니 단념하자고 보고했지만.

델칸은 그 모든 게 샤를의 연기임을 알았다.

그러니 더 애가 타 미칠 것 같았다.

“무슨 짓을 꾸미는 거야?”

“다 알면서 뭘 묻니?”

“샤를……!”

복도의 모퉁이 너머에서 사람들의 말소리가 들렸다.

델칸은 새침하게 서 있는 샤를을 이끌고 바로 옆의 문으로 들어갔다.

집기를 보관하는 장소로, 평상시엔 인적이 드문 곳이었다.

델칸은 방의 제일 안쪽으로 들어가서야, 샤를의 손을 놓고 그녀에게 몸을 돌렸다.

“젠달은 보니아가 아니야. 가서 네 뜻대로 흘러가지 않을 수도 있다고. 거기다, 성녀를 뺏긴 젠달이 가만히 있을 것 같아? 전쟁은 피할 수 없어.”

보니아 왕국이 강대국이라는 말은 초대 성녀의 죽음을 시작으로 점점 옛말이 되어갔다.

이제는 젠달과의 전쟁에서 보니아는 승리할 수 없었다.

샤를의 말대로 오디트리아 맹약이 효과가 있어 전쟁까지는 일어나지 않는다고 해도, 젠달은 가만히 있지 않을 것이다.

보이지 않는 피해는 고스란히 보니아인의 몫으로 돌아갈 게 분명했다.

“…….”

델칸은 천천히 무릎을 꿇었다.

현재 샤를은 왕 다음으로 고귀한 피를 가졌다.

혈통이 우선시되는 보니아에서, 천한 피가 섞인 델칸이 할 수 있는 건 샤를이 마음을 돌리도록 호소하는 것뿐이었다.

“제발 젠달을 자극하지 마.”

“내가 뭘 했다고 그래? 난 아직 아무것도 안 했어.”

샤를은 짜증스럽게 입을 열었다.

이미 성녀를 몰래 데리고 올 마차까지 짜 놨는데.

아무도 모르는 곳에 가두고 저만 볼 거다.

델칸이 원한다면 보여줄 의향도 있었다.

그러면 소문도 안 나고 좋을걸.

델칸이 이렇게 사사건건 반대하는 건 썩 반가운 일이 아니었다.

무릎을 꿇은 델칸을 불만스러운 눈으로 보던 샤를의 눈빛이 달라졌다.

그녀는 유심히 델칸을 관찰하다 그의 앞에 쪼그리고 앉았다.

“뭐 하는 거야……?”

“조용히 해 봐.”

샤를은 외모에 객관적인 편이었다.

젠달의 황제만큼은 아니어도 델칸은 보기 드문 미남이었다.

‘미인계가 통했단 말이지.’

샤를은 사람들이 자신에게 갖는 호감의 종류를 파악하는 데 능숙했다.

성녀는 분명 자신의 외모를 좋아했다.

그것도 무척.

“좋아.”

델칸은 개 같은 매력이 있으니 곁에 두기에도 괜찮지.

거기에 성녀에게 끌리고 있으니 열심히 꼬리를 흔들 테고.

자기도 모르게 말이다.

델칸은 제 것이지만 잠시 다른 주인을 만들어주는 것도 나쁘지 않았다.

잘하면 집으로 돌아온 개가 새로운 주인을 데리고 올지도.

“네가 이렇게 애원하는데 어쩌겠니.”

샤를은 목소리를 누그러트리고 말했다.

“젠달엔 안 갈게.”

“샤를……!”

델칸의 얼굴이 환해졌다.

어른스러워진 이복누이의 결정이 감격스러웠다.

하지만 그 감격이 근심으로 바뀌는 데에는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샤를은 델칸의 뺨을 어루만졌다.

“네가 대신 젠달에 간다면 말이야.”

***

“이제 그걸 뒤로 돌려서 가운데를 눌러 접어보세요.”

“이렇게요?”

“오. 잘하시네요.”

청소를 끝낸 후, 허퍼슨과 나는 예배당 단상에 앉았다.

나는 시범을 보이는 허퍼슨을 따라 손을 움직여 종이를 접었다.

“소식 들으셨습니까? 보니아 왕국에서 사절단이 온다는군요.”

“샤를 왕녀님네 왕국에서요? 왕녀님도 오신대요?”

눈에 아른거린다.

그 애쉬 블론드 머리카락을 가진 엄청난 외모.

사랑스러움이란 단어가 인간으로 환생하면 그런 모습이겠지.

나도 모르게 눈을 빛냈더니 허퍼슨이 난색을 표했다.

“그것까지는 저도 잘…….”

“으음……. 그럼 재상님께 물어보죠, 뭐.”

폐하한테는 여쭤보기 좀 그렇고.

왕녀님이 오신다고 해도 폐하 앞에선 표정 관리 좀 해야지.

나도 그 정도 눈치는 있었다.

“아. 맞다. 그런데 벌써요?”

“벌써라니요?”

지난번 환영연회 때 에본 재상님이 설명했던 이야기가 떠올랐다.

나는 눈과 손을 부지런히 놀리며 대화를 이어갔다.

“보니아 왕국에서 사절단이 오는 건 일 년에 한 번이라 들었는데, 이번엔 앞당겨졌나 봐요? 다녀가신 지 한 달 조금 넘은 거 같은데.”

잠시만. 설마 또 춤을 춰야 하는 건 아니겠지.

불길한 느낌이 들었다.

이것도 재상님한테 물어봐야겠어.

“아, 문화교류 말씀이시군요? 그것과 별개로 올해부터 양국의 기술을 공유하기로 했답니다.”

“기술을요?”

“보니아는 광물에 신성력을 부여하는 기술이 뛰어나고, 젠달은 신성력을 가진 광물을 제련·가공하는데 일가견이 있거든요. 양국의 이해관계가 일치한 거죠.”

“그럼 그 기술을 배우러 사절단이 오는 거예요?”

“그렇게들 말하더라고요.”

허퍼슨은 고개를 끄덕이다가 짧게 탄성을 내뱉었다.

나는 뿌듯한 표정으로 내가 만든 푸른 종이꽃을 손바닥 위에 올렸다.

이건 폐하한테 좀 먹히려나.

“나름 괜찮죠?”

“역시 손재주도 뛰어나십니다. 훌륭하시네요.”

“뭘요. 선생님이 훌륭하신 덕이죠.”

“그, 그런가요. 하하하.”

짧은 칭찬 품앗이 후, 허퍼슨이 궁금하다는 듯이 물었다.

“그런데 이런 재주는 배워서 어디에 쓰시려고요?”

“군인이 전쟁터에 총알이 없으면 안 되죠.”

“전, 전쟁터요? 성녀님께서 전쟁터에 나가신다고요? 누가 그런……! 혹시 며칠 전 월례 회의에서 그런 결정이 나왔답니까? 제, 제가 비록 신성력은 별 볼 일 없지만, 라울 신관님을 앞세워서라도 이의제기를-!”

허퍼슨은 사색이 된 얼굴로 허둥지둥거렸다.

비유였지만, 전쟁터에 나간다는 게 이렇게 필사적으로 말릴 일인가? 허퍼슨은 나를 신성력 만렙인 성녀로 알고 있을 텐데.

나는 뺨을 긁적이다 허퍼슨의 어깨를 두드렸다.

“에이. 전쟁터는 비유였어요. 준비가 왕창 필요한 일을 하고 있다. 이런 의미였다고요.”

“비유라니 다행입니다.”

허퍼슨은 그제야 안심이 된 얼굴로 가슴을 쓸어내렸다.

뭔데 그래? 대체.

“근데 허퍼슨은 이런 재주를 많이 알고 있네요.”

“사촌 중에 이런 일을 좋아하는 아이가 있어서 몇 가지 배워둔 게 있습니다.”

“그래요?”

나는 눈을 빛냈다.

“소개해주실 수 있어요?”

“……헉. 안 됩니다.”

“안 돼요?”

“제가 괜한 말을 했습니다. 그 아이는……. 저희 가문에서 쉬쉬하고 있는 아이라.”

“왜요?”

허퍼슨은 땀을 삐질 흘렸다.

그리곤 이런 표현을 성녀님 앞에서 써도 되는지 모르겠다며 망설이다 입을 열었다.

“그 아이가 살짝 제정신이 아니라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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