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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략 황제의 외모가 내 취향이라 곤란하다-15화 (15/150)

15화

“신성력으로 만든 결계가 신전 부지 전체를 보호하고 있어 외부인의 침입에도 안전하죠.”

기회다.

나는 헤이즐의 그 말을 놓칠 수 없었다.

“제가 황궁 밖으로 나온 건 처음이라……. 혼자 신전을 산책하면서 둘러봐도 될까요?”

최대한 불쌍하게, 세상 구경도 못 해본 성녀처럼 핑계를 댔더니 호위 기사 한 명과 함께 무리에서 빠져나올 수 있었다.

마지막까지 차를 권하는 헤이즐의 얼굴에서 아쉬움이 묻어나왔다.

하지만 총장실에 앉아 학부모 면담을 하는 것 같은 그림을 그리고 싶진 않았다.

지금이야 농담인 것 같지만, 당장이라도 맘이 바뀌어서 신전에 남으라고 할 사람이 폐하인걸.

“내가 오래오래 그 얼굴을 보고 죽으려면……. 응?”

뜰을 거닐던 나는 걸음을 멈췄다.

뒤따라오던 호위 기사, 카디얀도 멈춰 섰다.

본채의 2개의 동을 연결하는 야외 복도에서 아이들이 서 있었다.

모두 내 쪽을 보고 있었는데, 초등학생에서 중학생 정도의 나이대인 듯했다.

“카디얀 경.”

“넵.”

“저 아이들이 황제 후보들이에요?”

“그렇습니다.”

아이들의 수를 세보니 딱 열 명이었다.

황제 자리는 넘겨줄 순 없지만.

“성녀님?”

나는 아이들이 있는 야외 복도로 걸어갔다.

‘미래의 고위 관료.’

어렸을 때 잘생긴 이성 소꿉친구 하나 만들어두라는 옛말도 있지 않은가.

과거에 만든 친분이 미래에 어떻게 작용할지 모른다는 거지.

큰 욕심은 없고, 통성명이나 잘해서 첫인상을 좋게 만들어야겠다는 생각이었다.

“얘들아, 안녕?”

“…….”

손까지 흔들며 최대한 밝게 인사를 했는데, 아이들이 몸을 움찔거렸다.

아, 아직 거리가 있으니 잘못 본 걸 수도 있겠어.

“오늘 날씨가 참 좋지?”

“…….”

“수업 들으러 가는 길이니?”

“…….”

하지만 착각이 아니었다.

내가 다가갈수록 아이들은 겁 많은 토끼처럼 뭉쳐서 오들오들 떨었다.

도망치고 싶어 하지만, 도망가지 못하는 이 느낌. 어쩐지 익숙한데.

“……저는 이 정도 거리가 편합니다.”

그래, 재상님이다.

젠달의 초식계 미남, 에본 하이벤이 애들한테서 보인다.

‘그러면 친해지는 건 무리겠네.’

나는 빠르게 통성명을 단념했다.

억지로 다가가 봤자 긁어 부스럼을 만들 게 뻔했다.

“하하. 초면에 너무 말을 많이 걸었네.”

나는 아이들과 3m 정도의 거리를 두고 발을 멈췄다.

폐하와 함께 지내면서 학습된 게 하나 있었다.

찍힐 것 같으면 튀어라.

내 덕질 인생을 얇고 길게 만들기 위한 생존 전략이었다.

“그럼 학업에 정진하시고. 저는 이만.”

“성녀님……?”

후다닥 자리를 뜨려는데 초등학교 고학년 정도로 보이는 소녀가 날 불렀다.

그러자 주변에 있던 아이들이 화들짝 놀라 안절부절못했다.

누가 보면 내가 정말 잡아먹는 줄 알겠다.

어이쿠, 눈에서 뭐가 흐르나.

“정말 성녀님이세요?”

물빛 머리카락의 소녀는 두꺼운 책을 품에 꼭 쥐고 날 올려다보았다.

아직 젖살이 완전히 빠지지 않은, 커다란 눈망울의 귀여운 아이였다.

“어……. 네, 제가 성녀인데요……?”

젠달의 신성력은 외모에도 비례하나. 아이들은 하나같이 외모가 출중했다.

‘나 지금 좀 행복할지도…….’

하지만 꽃밭이 된 머릿속은 이내 산산조각이 났다.

소녀는 순진한 얼굴로 물었다.

“여긴 왜 오셨어요?”

***

“성녀님께서도 함께 하셨으면 좋았을 텐데 말입니다.”

헤이즐은 티타임을 갖는 장소로 자신의 방을 택했다.

고풍스러운 소파와 테이블, 한쪽 벽면을 빼곡히 채운 진열장, 특이한 장식들과 예술작품들. 그리고 꽉 닫힌 창문들과 방문.

아늑하지만 폐쇄적이었다.

실제로 그의 방엔 방음 결계가 쳐져 있어 안에서 나는 소리가 밖으로 새어 나가지 않았다.

“무척이나 아쉽군요.”

헤이즐은 그리 말하며 맞은편의 찻잔에 차를 따랐다.

진한 노란빛의 찻물에서 은은한 꽃 향이 풍겼다.

제 앞의 황제와 잘 어울리는 향이었다. 황제에겐 언제나 화려하면서도 은은한 향기가 났다.

알렌드는 차를 한 모금 음미하며 입을 열었다.

“다음에 또 기회가 있겠지요.”

“정말로 기회가 있습니까?”

헤이즐이 장난스럽게 되받아쳤다.

“성녀님을 이제야 보여주신 분께서 하시는 말씀을 믿을 수가 있어야지요.”

“총장.”

“무척 아름다우신 분이더군요. 거기에 신비로운 분위기까지.”

황제를 일별하는 그의 호박색 눈동자에 이채가 돌았다.

알렌드가 미소를 지었다.

“탐내지 마시죠.”

“……이것 참. 그냥 말해본 것뿐입니다. 황제 폐하께서 그렇게 웃으시면 제 온몸에 소름이 돋는 거 아십니까?”

헤이즐은 제 팔을 쓰다듬는 시늉을 하며 능청을 떨었다.

“저는 무표정하던 당신이 익숙하단 말입니다. 폐하를 처음 뵌 날이 생각나는군요. 살아오면서 제법 많은 아이를 봐왔지만, 지금까지도 그런 얼굴을 하는 아이는 없었어요.”

헤이즐은 알렌드를 처음 만난 날을 회상했다.

16년 전.

그는 단상 위에서 일렬횡대로 선 아이들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10명의 아이 중 가장 어린, 또 가장 눈에 띄는 외모를 가진 8살의 알렌드는 누구보다도 냉담한 눈빛을 하고 있었다.

저도 모르게 죽어있는 듯한 그 눈을 빤히 쳐다보고 있었을 만큼.

세월이 흘러도 그의 눈에 온기가 깃드는 일은 없었다.

하지만 모든 방면에서 우수했다.

다른 후보생들을 훨씬 웃도는 방대한 크기의 신성력, 그에 걸맞은 뛰어난 신체와 두뇌.

감정이 없어 보이는 것쯤은 아무런 결함도 되지 못했다.

무결한 황제의 재목.

만약, 선황제의 사망이 1년만 더 늦었더라면. 그래서 알렌드 레오디우스가 고위 신관으로 남았더라면.

헤이즐은 여생을 안타까워했을지도 모른다.

“사람은 변하기 마련이니, 총장이 익숙해지셔야죠.”

지금의 황제가 누구에게나 다정한 평화주의자가 되지 않았다면 말이다.

알렌드는 황제의 관을 머리에 얹자 다른 사람이 되어버렸다.

알렌드의 미소를 처음 보았을 때, 헤이즐은 가슴의 불씨가 사그라드는 것을 느꼈다.

“많이 변하셨군요. 소중한 사람도 생기시고.”

“소중한 사람?”

“성녀님 말입니다. 그렇게 누군가를 아끼시는 모습은 제가 또 처음 보지 않겠습니까?”

“…….”

‘소중하다’라.

알렌드는 잔잔하게 일렁이는 찻물을 내려다보다 가만히 입을 열었다.

“헤이즐 로이컨이 사물이건 사람이건 진귀한 것을 보면 눈이 뒤집힌다는 것을 알 만한 사람은 다 아는 이야기죠.”

수집광인 그가 니세포르엘 신전 가까운 곳에 수집품을 보관하기 위한 저택까지 지었다는 것은 유명한 소문이었다.

검은 머리에 검은 눈을 가진 성녀가 그의 안목에 차지 않았을 리가 없지. ……차고 넘쳤으면 모를까.

“총장이 무엇을 수집하건 제가 상관할 바는 아니지만, 요즘 들어 거슬립니다.”

“어허, 제 취미가 폐하의 심기를 언짢게 만들었나 보군요. 그래도 요즘은 합법적인 방법으로만 취미를 즐기고 있사온데…….”

“그쪽이 아닙니다.”

찻잔 손잡이의 장식을 매만지던 알렌드는 고개를 살며시 들었다.

웃고 있던 그의 입매가 어느새 굳어 있었다.

잘 뻗은 눈썹 아래 싸늘한 시선이 헤이즐을 응시했다.

당장이라도 사냥감의 목덜미를 물어뜯을 듯한 맹수처럼.

“공 하나 없는 것들이 자꾸 도둑놈처럼 내 것을 탐내거든.”

차라리 가면을 잠시 벗고 날파리를 쫓아내는 편이 나았다.

그래, 그 왕녀도.

탐욕스러움을 보이다 본국으로 돌아갔지만 언제 쥐새끼처럼 나타날지 모르는 일이다.

경고로 사라지지 않으면 그때는 제 사람을 탐낸 걸 후회하게 만들어줘야겠지.

한편, 헤이즐은 온몸이 전율할 정도로 오싹한 기분을 느꼈다.

아까는 능청이었지만 지금은 진짜였다.

같은 말이래도 누가 하느냐에 따라 시답잖은 협박이 될 수도, 목숨을 위협하는 경고가 될 수도 있는 법이었다.

그런데 어땠는가.

한때, 전쟁영웅이라 불리며 산전수전을 다 겪은 자신이 일순 겁을 먹었다.

“폐하.”

헤이즐은 가슴이 뛰었다.

선황제가 죽고, 제가 기른 열 명의 아이들이 ‘선택의 미궁’에 들어갔다.

출구로 나온 건 단 한 명.

그것도 역대 황제들보다 일주일이나 일렀다.

피를 뒤집어쓴 채 막 미궁을 나온 사내의 어깨 위로 새하얀 황제의 망토가 둘렸다.

며칠 전보다 날렵해진 턱이 하늘을 향해 올라갔을 때, 세이칸의 어둠이 세상을 감쌌다.

지금도 선연한 그 장면은 감각과 함께 헤이즐의 뇌리에 깊숙이 박혔다.

코를 찌르는 피비린내, 알렌드의 입에서 나는 무거운 숨소리, 그리고 공허한 그 눈.

피가 끓어올랐다. 이명이 이는 정적 속에서, 뜨겁게 요동치는 자신의 심장 박동이 고막을 울렸다.

그로부터 6년.

죽은 줄 알았던 그때의 감정이, 지금 잠시나마 드러난 황제의 민낯에 되살아났다.

평화주의자는 무슨.

황제는 피와 살점이 튀는 전쟁의 자극을 내게 줄 자다.

헤이즐 로이컨은 수집광 이전에 전쟁광이었다.

“제가 도울 것이 있다고 하셨죠.”

황제의 서신을 받고 통 잠을 이룰 수 없었다.

어쩌면, 어쩌면.

그는 고양되는 감정을 태연자약하게 감추고 황제에게 물었다.

“그게 대체 뭡니까?”

어쩌면 황제가 니세포르엘이란 감옥에 갇힌 무료한 자신을 꺼내줄지도 모른다.

***

“찾았다!”

“헉.”

“찾았다!”

“꺅!”

아이들의 놀라는 얼굴을 뒤로하고 방향을 틀었다.

‘조금만 더 빨리…….’

나는 눈과 귀에 온 신경을 집중하며 사방을 달리는 중이었다.

지금 중요한 건 스피드다.

‘또 어디에 있지?’

부스럭.

“……에취.”

저기다.

나는 소리가 난 두 곳을 손으로 한 번씩 짚었다.

“종탑 옆 수레 건초더미 속이랑 나무 꼭대기!”

“……헐.”

“어떻게……?”

아이들이 놀라는 소리가 들렸다.

후후후……. 순조롭군.

‘토 나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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