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화
“……니요? 안 질렸다는 건가?”
“네요! 네! 질렸습니다! 사람이 어떻게 놀기만 하나요. 일하고 살아야죠!”
거짓말이다.
젠달에서 등 따습고 배부르게 지내면서 알았지. 나는 천성이 백수다.
재벌집 막내로 태어났으면 나만큼 한량 짓을 잘할 수 있는 사람도 없을 텐데.
“일하지 않는 자! 먹지도 말라!”
“그렇게 일이 좋은가? 원한다면 평생 놀고먹게 해줄 수 있는데.”
“와.”
아차, 나도 모르게.
나는 왼손으로 떡 벌어진 입을 닫고 오른손을 폐하에게 펼쳤다. 잠시 타임.
‘진정해. 이건 시험이야. 테스트라고.’
거절할 수밖에 없지만, 무지하게 매력적인 제안임은 분명했다.
나는 속으로 눈물을 삼키며 폐하께 조언했다.
“폐하, 그거 나중에 결혼하고 싶은 상대 생기시면 청혼 대사로 꼭 해주세요. 제가 장담하는데 백이면 백, 다 넘어올걸요.”
“성녀는 안 넘어오고?”
“저는-.”
당연히 넘어가죠…….
미쳤나 봐. 진짜. 그 얼굴로 놀고먹게 해준다고 그러면 누가 안 넘어와요. 누가.
하지만 그런 일이 일어날 리 없지.
그러니까 무슨 계략을 펼치시든 이번에는 안 얽힌다.
“안 넘어가죠.”
“왜?”
“전…… 일과 결혼했으니깐요.”
내가 말하고도 민망했다.
10년 차나 할 법한 소리를 고작 출근 반나절 차인 내가 하고 있으니.
‘왜냐고 물을 줄 몰랐어. 아무리 당황했어도 그렇지, 그 말이 거기서 왜 나오냐고.’
폐하가 속으로 치고 있을 코웃음이 여기까지 들린다.
모르겠다. 뻔뻔해지자.
“결혼? 성녀가 예배당 청소랑 결혼한 줄은 몰랐군.”
“……지금 놀리시는 거죠?”
“설마. 그만큼 맡은 일을 열심히 한다는 거 아닌가? 훌륭하다고 생각해.”
훅 들어온 칭찬이 내 양심을 찔렀다.
“그렇지만 그대의 본업을 잊으면 좀 곤란해서 말이야.”
“제 본업요?”
“그대가 여기로 소환된 이유.”
내가 젠달에 소환된 이유?
그거야…….
“세이칸 신의 실수?”
“음.”
신의 실수라는 말에 폐하가 침음했다.
이놈의 주둥아리. 생각나는 대로 말하지 말라고.
“아, 알죠! 성녀라서잖아요? 명목뿐이긴 하지만.”
“……성녀의 신앙심이 자유분방한 것은 좋지만, 이 세계에서 신을 모욕하는 말은 함부로 하지 않는 게 좋아.”
폐하는 평소와 달리 조심스레 타일렀다.
나도 알지.
평범한 내게 사람들이 굽신거리는 것도, 백수처럼 지내도 뭐라 말하지 않는 것도.
모두 다 내 뒤에 신 세이칸이 있다고 여기기 때문이었다.
이 세계의 사람들이 경외하는 신 세이칸. 유일한 신 세이칸.
‘금손 세이칸.’
비록 내게 신성력을 주진 않았지만, 나는 나를 이곳으로 보낸 세이칸에게 나름 감사를 하고 있었다.
저 살짝 찌푸린 미간마저 설레는 완벽한 피조물.
아마 세이칸 신이 만든 희대의 역작이 아닐까.
“그건 그렇고.”
“네, 네?”
폐하는 테이블에 왼쪽 팔꿈치를 세우고 그 손에 턱을 괬다.
“본업을 알고 계시다니 다행이군요.”
“다행……요?”
이건 다정인가, 아니면 계략인가.
고민하는 사이에 폐하의 외모 공격이 들어왔다.
슬쩍 미소만 지었을 뿐인데 온실 정원의 꽃들이 다 죽었다.
아, 나 이거 알지. 알아. 위험한 폐하잖아.
그리고 나는 얽히기 직전이고.
‘보지 마. 보지 말라고! 내 눈꺼풀, 너도 천성이 백수냐!’
그렇지만 나는 일하지 않는 눈꺼풀의 심정을 충분히 이해할 수 있었다.
‘저걸 어떻게 안 봐. 으. 저 미모를 두고두고 볼 수 없는 이 세계의 기술이 아쉽다.’
폐하는 얼빠진 내게 시선을 맞추며 물었다.
만약 이게 공략 게임이고, 폐하가 플레이어라면.
나는 선택지 한 번 만에 공략당하는 대상일 게 분명했다.
“그럼 청소만큼 본업도 열심히 해주시려나요?”
“…….”
“일과 결혼하신 성녀니까.”
“그럼요.”라고 내 입이 멋대로 말했다. 고개도 제멋대로 위아래로 움직였다.
‘이…… 얼굴밖에 모르는 인간아……!’
철저하게 내 의지를 반영하지 않는 몸뚱어리를 느끼며, 나는 지난번 각오를 다짐했다.
앞으로 폐하 반경 2m 이내 접근 금지.
***
절그럭.
“와. 이거 생각보다 무겁구나.”
절그럭.
“그래도 이 정도면 웬만한 건 형태도 잘 안 보이겠어.”
나는 내 방 소파에 앉아 이리저리 시야를 살폈다.
침대 기둥의 굴곡, 테이블 모서리, 창문의 장식 무늬 반 개, 샹들리에의 제일 작은 크리스털 두어 개.
만족스러운 시야각이다.
“후후후. 완벽해.”
“……성녀님?”
목소리를 따라 고개를 돌리니 익숙한 적갈색 머리카락이 보였다.
나는 반갑게 아는 척을 했다.
“아, 시아나. 왔어?”
“성녀님, 오늘 황제 폐하와 함께 니세포르엘 신전에 가신다고…….”
“맞아. 점심 전에 출발하신다더라.”
“그렇게 가시게요?”
시아나의 목소리에 드물게 당황스러움이 섞였다.
“응. 괜찮아?”
“……그건 어디서 나셨어요?”
“이거? 예배당 건물 복도에 있는 기사 갑옷에서 빌렸어.”
나는 머리에 쓴 투구를 벗었다.
잠시 쓰고 있던 것인데도 머리가 엉망이 됐다.
그 모습을 목격한 시아나가 경악하며 내 머리를 정돈했다.
“세상에. 이건 왜 쓰신 거예요?”
“폐하랑 한 마차로 가게 됐거든.”
겉보기만 성녀인 내가 뭘 할 수 있겠는가.
본업을 열심히 해달라는 건 어디 신전에 가서 성녀 연기를 좀 해달라는 이야기였다.
춤추는 일이 아니라 다행이었지만, 문제는 마차가 한 대뿐이라는 것이었다.
마차 두 대를 건의했지만, 한 대에 붙는 인력과 기본 경비와 부대 비용과…….
나는 입을 다물었다. 돈이 없으니 별수 없었지, 뭐.
“그래서요?”
“그 말은 폐하랑 한 공간에 있어야 한다는 소리잖아? 마주 보고! 내가 슬쩍 엿들었는데, 니셀포르엘 신전까지는 반나절이 걸린다고 하더라고?”
“그렇죠. 신전이 수도 외곽에 있으니깐요.”
그냥 넘길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3시간, 무리.
“그러니까 시야를 좀 가리려고.”
“……시야를요?”
시아나가 떨떠름한 얼굴로 물었다.
외관상 좀 그렇긴 하겠지만 마차 안에서만 쓸 거니까.
게다가 나는 좁디좁은 시야각을 가진 투구가 꽤 흡족했다.
“응. 위험하니까.”
“……투구를 쓰고 다니는 편이 더 위험할 것 같은데요. 어쨌든, 성녀님의 말씀은 알겠어요.”
“어? 시아나도 괜찮다고 생각하는 거야?”
내 의견에 동조해주는 사람이 생기면 반가운 법이다.
활짝 웃는 내게 시아나는 유능한 시녀처럼 미소 지었다.
그리고 내가 들고 있는 투구에 양손을 올렸다.
“요컨대, 시야만 가리면 되는 거죠?”
***
“성녀님, 모시러 왔습…….”
“대장, 저도 알고 있거든요. 뒷말은 하지 마세요.”
제발.
프로딘타 궁의 응접실.
헨켈 대장은 응접실로 들어오는 내 모습에 말을 하다 말았다.
나는 시아나의 부축을 받으며 대장에게 걸어가는 중이었다.
헨켈 대장에게 이런 모습을 보여주자니 낯이 뜨거워 쉴 새 없이 말이 쏟아져나왔다.
“이게 사정이 있어요. 원래는 대장도 감탄할 만한 소품을 준비했는데, 어쩌다 이렇게 됐거든요. 그러니까 제 취향은 이게 아니라는….”
“잘 어울리시죠?”
“무척 잘 어울리십니다.”
“윽.”
시아나와 헨켈 대장의 연이은 칭찬에 닭살이 오소소 돋았다.
“투구는 절대 안 돼요.”
생각지 못한 시아나는 강경한 반대에 나는 지금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꾸며진 상태였다.
처음에는 이 정도까지는 아니었다.
시아나가 투구 대신 눈가리개로 쓰라며 건네준 리본을 내키지 않아 하고 있을 때쯤, 하녀들이 들어왔다.
“황제 폐하와 외출을 하신다고요?”
날 가운데 두고 이 옷은 어떠니 저 장신구는 어떠니 하면서 분위기를 타더니, 종국에는 국보로 보관하고 있던 성녀복까지 가져왔다.
“……국보가 왜 제 옷장에 있어요?”
“성녀님께 귀속된 물건이라 프로딘타 궁에서 관리하고 있어요.”
언젠가 소환될 성녀를 위해 장인이 지었다는 의복은, 넓은 소매가 팔꿈치에서 아래로 길게 떨어지는 오프숄더 형의 하얀색 원피스였다.
앞판은 밋밋하지 않도록 짙은 색의 천이 포인트로 들어갔고, 과하지 않은 자수와 보석이 튀지 않고 은은하게 어울렸다.
거기에 차분히 빗어 내린 내 흑발이 하얀 의복과 대조적으로 얹어지니, 거울 속의 내 모습은 어디 신성 제국의 고결한 성녀가 따로 없었다.
하지만 투구가 낫다.
‘이건 잔뜩 멋 부린 거 같잖아.’
눈가리개로 쓴 리본은 하얀 레이스에 흰색 천을 덧댄 것이었다.
의복과 깔맞춤한 듯한 하얀색.
‘나는 그냥 시야를 좀 가리고 싶었을 뿐인데-!’
리본은 절대 싫다고 저항해봤지만, 투구 쓴 내 모습에 하녀들이 울었다.
울 정도의 비주얼이었나 싶어 나도 충격을 받고. 결국 나는 내 몸을 인형처럼 순순히 내어줄 수밖에 없었다.
폐하 시력 지켜. ……그래도 이렇게까지 꾸민 건 수치스럽다.
“불편하신 곳은 없으십니까.”
“승차감요? 완벽합니다.”
헨켈 대장은 마차에 앉은 내 상태를 확인하고는 문을 닫았다.
“그럼 출발하겠습니다.”
마차의 차체가 한 번 위아래로 움직이며 바퀴가 부드럽게 굴러갔다.
가장 큰 고비는 이 앞에 있다.
***
“……그러고 가실 건가요?”
마차에 오르던 폐하는, 내 꼴을 발견하고 멈춰 섰다.
자연스럽게 앉아 있으면 자연스럽게 넘어갈 수 있으리라 생각했는데.
역시나, 어림도 없지.
“네.”
그래서 전략으로 바꿨다. 뻔뻔해지기로.
안 꾸며도 빛이 나는 폐하한테, 한껏 꾸민 데다 이상한 취미가 있어 보이는 날 보여주는 건 마주하기엔 너무나 큰 수치였다.
“흐음.”
시선 때문에 옆얼굴이 따가웠지만 무시하기로 했다.
정면, 정면만 본다.
폐하는 내 맞은편에 앉았다. 이어 문이 닫히고 마차가 굴러가기 시작했다.
다행히 눈가리개의 효과는 수치스러움과 비례했다.
‘괜찮은데?’
나는 온통 하얀색으로 번진 시야에 속으로 미소 지었다.
이제 폐하는 빛으로밖에 보이지 않는다.
“새로운 놀이인가 보지?”
둘밖에 없다고 그새 말투가 바뀌었다.
그건 별 상관없었지만.
“입고 있는 건 젠달의 성녀복인가? 이렇게까지 열심히 해줄 줄은 몰랐는데. 역시 성녀는 일과 결혼했나 보군.”
“…….”
나는 대꾸하지 않고 슬쩍 엉덩이를 떼, 마차 문에 최대한 붙여 앉았다.
도도함이라든가 자존심이라든가, 그런 문제가 아니었다.
“폐하.”
밀폐된 공간에 최애(몸)와 단둘이.
그토록 훌륭한 덕질 보상이 어디에 있을까.
눈만 가리자는 내 생각은 안일했다.
시야를 차단한다고 해도 나에겐 청각이 있었고, 또 청각이 있었다.
고막으로 집중된 감각이 폐하의 숨소리 하나하나마저 의식하게 했다.
“음?”
“입……. 조용히…….”
반경 2m 이내 접근 금지는 날 위한 것이 아니었다.
폐하를 위한 것이었지.
그러니까, 내가.
위험한 짐승이 되어버릴 것 같단 소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