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화
등잔 밑이 어둡다더니.
내 동아줄은 바로 옆에 있었다.
“허허. 신관인 라울입니다.”
“안녕하십니까, 성녀님! 허퍼슨 드만입니다. 라울 신관님을 도와 황실 예배당 관리직을 맡고 있습니다.”
“신아리예요. 오늘부터 황실 예배당에서 일하게 됐어요. 잘 부탁드려요!”
이미 얼굴도 이름도 아는 사이에 새삼스럽지만, 우리는 통성명을 했다.
그도 그럴 게, 오늘부터 황실 예배당 첫 출근이었다. 인사는 중요하지.
“성녀님과 같이 일할 수 있는 영광을 제 대에서 누릴 수 있을 줄이야. 저희 드만 가문에 대대로 전해질 크나큰 자랑거리입니다.”
“대대로씩이나….”
격양된 허퍼슨의 태도에 나는 남몰래 진땀을 흘렸다.
이렇게 반짝이는 눈은 거북하다.
‘제가 생각하시는 것만큼 대단한 인물은 아니라서요…….’
허퍼슨은 조심해야겠어.
나를 신성력 빵빵한 성녀로 보고 있는 게 틀림없을 테니까.
“허퍼슨, 그만하게. 성녀님께서 부담스러워서 자네랑 일하실 수 있으시겠나?”
“앗. 죄송합니다. 기쁜 마음에 그만 실례를 저질렀습니다.”
“아, 아니요. 전혀 실례가 아니었어요.”
나는 90도로 꺾인 허퍼슨의 허리를 세워주고 옆으로 고개를 돌렸다.
“라울 신관님, 그럼 저는 무슨 일을 하면 돼요?”
재상님은 오늘부터 예배당으로 가면 된다고 했지만, 뭘 해야 하는지는 알려주지 않았다.
내 질문에 라울 신관님은 등 뒤에서 기다란 빗자루 하나를 꺼냈다.
“청소입니다.”
“오.”
청소라니.
“뭐라고요?!”
나쁘지 않네. 라고 생각했는데 허퍼슨이 질겁하며 소리쳤다.
“라, 라울 신관님. 그게 말이 되는 소리입니까. 성녀님께 청소를 맡기시다니요.”
“잘못됐는가?”
“한참은 잘못됐습니다! 성녀님께선 좀 더 고귀하신…….”
“고귀하신?”
“신성력으로 환자를 치유하신다거나, 신성력으로 젠달의 평화를 위해
기도하신다거나…….”
헉. 역시 요주의 인물.
허퍼슨의 입을 막아야 했다.
두 사람의 대화를 듣던 나는 라울 신관님이 든 빗자루의 자루를 쥐고 다급히 말했다.
“청소! 그러고 보니 제가 있던 세계에선 청소를 참 중요시했죠! 담임, 아니, 스승님도 항상 자리를 청결하게 해라. 종 쳤다고 그냥 집에 가지 말고 청소하고 가라. 그러셨거든요.”
“호오.”
라울 신관님이 감탄사를 뱉었다.
뭔 말을 하는지 모른 채, 나는 입에서 나오는 대로 지껄였다.
“세이칸 신께서도 그러셨죠. 청결함이 제일이니 내려가서 청소를 게을리하지 말라고…!”
“세이칸께서…….”
내 청소론은 본 적도 없는 이 세계의 유일신마저 소환했다.
마침내 허퍼슨은 감명받은 얼굴로 무릎을 꿇고 빗자루를 든 내게 절했다.
“제가 어리석었습니다.”
아아, 이 꼴을 폐하가 안 보셔서 정말 다행이다.
나는 속으로 눈물을 삼켰다.
짝짝짝.
라울 신관님이 느긋한 박자로 손뼉을 쳤다.
영혼이라곤 전혀 느껴지지 않는 박수였다.
“감동적이군요.”
“맞습니다! 라울 신관님, 그러니 오늘은 예배당 대청소를 하는 게 어떻습니까?”
“허허. 허퍼슨. 대청소는 지난주에도 하지 않았나.”
“아닙니다. 지금 이 깨달음을 그냥 흘려보낼 수 없습니다. 성녀님께서 전해주신 세이칸 님의 말씀을! 행동으로 실천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허허…….”
라울 신관님의 가드는 허퍼슨의 열정을 막을 수 없었다.
그 후, 허퍼슨은 먼지 한 톨 남기지 않을 기세로 예배당을 뛰어다녔다.
끼어들 틈을 찾지 못한 나는 종이 뭉치를 분류하는 라울 신관님 주변을 빗자루질하며 맴돌았다.
“죄송해요. 저 때문에.”
“성녀님께서 마음 쓰지 않으셔도 됩니다. 어차피 허퍼슨, 저 친구가 다 알아서 할 터이니 말입니다.”
라울 신관님은 단상을 가리켰다.
제단 뒤에서 쭈그리고 앉아 열심히 스테인드글라스를 닦는 허퍼슨의 뒷모습이 보였다.
그런 뒤, 내 시선은 텅 빈 제단에서 멈췄다.
“그러고 보니 신성력 측정기가 안 보이네요?”
신줏단지처럼 모시고 있던 이드만타 측정기가 보이질 않았다.
지난번 재상님과 왔을 때도 없었지?
“고장이 나서 수리를 맡기려고 치워놨습니다.”
“신께서 내린 광물인데도 고장이 나나 봐요.”
“기술은 인간의 것이니 인간의 문제이겠죠. 허허. 그것도 저만큼 나이를 먹었으니 이곳저곳 손 볼 곳이 생기나 봅니다. 한데, 성녀님.”
“네?”
두루마리 끈을 묶던 손마저 멈춘 채, 라울 신관님은 궁금해 죽겠다는 얼굴로 내게 물었다.
“돈은 벌어서 무엇 하려고 하십니까?”
“뭘 하려고 한다기보다……. 있으면 좋으니까요?”
돈 때문이 아니라 폐하한테 내쫓길 것 같아서 일한다는 소리는 차마 할 수 없었다.
그래, 돈. 있으면 좋지.
나름대로 만족스러운 대답이었던 거 같은데, 라울 신관님은 이해가 가지 않은 모양이었다.
“그러면 차라리 황제 폐하께 돈이 필요하다 말씀드리는 편이 낫지 않으십니까?”
“폐하께요?”
“예배당 봉급이 많은 편도 아니고. 황제께 말씀드리면 그 정도는 쉽게 내어주실 텐데 말입니다.”
뭐하러 고생을 사서 하냐. 이런 뜻인가?
“음…….”
그럴듯한 이유를 고민하던 중, 내 머릿속을 엄청난 미남이 스치고 지나갔다.
“저! 돈 벌어서 하고 싶은 게 생겨서요. 폐하껜 비밀로 하고요.”
“오호.”
라울 신관님은 그리 많지 않은 돈이라 했지만, 그래도 궁의 하녀는 황실 예배당 봉급이 다른 곳보다 꽤 쏠쏠한 편이라 했다.
그러니,
“조각상을 주문할까 봐요!”
“세이칸 님의?”
“아뇨, 폐하의 조각상이요!”
“……?”
“제가 초상화도 생각해 봤는데, 역시 입체감이 살아 있는 게 더 좋을 거 같더라고요! 대리석으로 만든 석상은 어떨까요? 아, 말 나온 김에 신관님. 혹시 젠달에서 가장 실력 좋은 조각사가 누군지 아세요? 그 천상계 미모를 온전히 담을 수 있는 능력자여야 하는데, 가능할까요? 그런 분은 비싸겠죠? 그러면 제가 봉급을 얼마나 모으면 될까요?”
“진정…… 진정하시죠.”
“아, 하하.”
나도 모르게 급발진을 해버렸다.
아무 일 없었다는 듯 웃음으로 분위기를 무마하려고 했는데, 라울 신관님은 의외로 흐뭇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성녀님께선 황제 폐하께 참 지극정성이십니다. 그런 계획도 갖고 계시고.”
“그럼요.”
아직 급발진의 여운이 남아있던 탓에 나는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다른 건 몰라도 그 세계문화유산 급 외모는 인류를 위해 하나라도 더 박제해서 남겨둬야 한다.
라울 신관님의 급습이 들어온 건 그때였다.
“여쭙기 외람되지만, 혹 황제 폐하께 연모의 감정을 품고 계시는 건?”
“엑.”
말도 안 되는 소리다.
그래도 너무 기겁했나 싶어 연기에 천부적인 재능이 있는 누군가를 본받아 표정을 갈무리했다.
“에이.”
나는 허공에 손을 내저었다.
“농담거리도 안 돼요.”
“잘 어울리십니다만.”
내 덕질의 끝은 폐하의 행복과 안녕이다.
폐하는 좋아하는 사람과 결혼하고, 폐하를 닮은 아이들을 낳고, 행복한 가정을 꾸리고. 나는 그걸 멀리서 지켜보고.
“라울 신관님. 폐하는 말이죠!”
나는 가슴을 당당히 펴고 주먹을 불끈 쥐었다.
내가 이것 하나만큼은 자신 있게 말할 수 있지.
“저랑은 절대 안 돼요!”
“뭐가 안 되죠?”
“허억.”
심장 바닥에 떨어질 뻔.
이 고막을 녹일 듯 감미로운 목소리는…….
나는 본능적으로 빗자루를 방패처럼 들고 뒤를 돌아봤다.
“……폐, 폐하?”
왜 기분이 나빠지셨죠……?
***
“……날씨가 참 맑네요.”
“비가 내리고 나면 맑겠지요.”
“그렇죠……?”
온실 정원의 유리 천장 너머로 보이는 하늘엔 먹구름이 잔뜩 껴 있었다.
지금 내 상황처럼.
눈앞에 먹기 좋게 구워진 스테이크는 썰어서 입에 넣기도 곤욕이었다.
‘누가 나 좀 살려줘…….’
라울 신관님은 점심 약속 핑계를 대며 허퍼슨을 데리고 튀었다.
설마하니 출근 첫날인 막내를 이렇게 버리고 갈 줄이야.
믿는 도끼에 발등 찍혔다.
‘하필이면 그때 폐하가 들어오시다니. 내 청각, 왜 일 안 했냐.’
이놈의 청력이랑 시력은 다 좋은데, 24시간 내내 열어놓을 수 없는 게 문제였다.
10분 정도 지나면 몸이 물먹은 솜처럼 축 늘어져 옴짝달싹할 수 없을 정도로 피로해진단 말이지.
“…….”
나는 고개를 들면 죽는다 싶을 정도로 접시에만 시선을 뒀다.
코앞에서 폐하의 미모를 독대할 자신도 없었거니와, 지금의 폐하는 왠지 마왕성 보스 같은 포스가 풍긴다고나 할까.
그럼 난 폐하 편. 우주 정복이든 세계 멸망이든 제가 성심성의껏 돕겠습니다.
하지만 지금은 그런 망상을 할 때가 아니다.
나는 포크로 샐러드를 뒤적이다 힐끔 맞은편 폐하의 눈치를 살폈다.
“폐하.”
매도 먼저 맞는 게 낫다.
폐하의 청량하고 맑은 벽안이 내 쪽을 바라봤다.
온실 안이라 그런지 햇살을 받은 금발이 유난히 반짝인다.
자체 보정 무슨 일이야.
나는 눈에 힘을 바짝 줬다.
이제 할 내 말에 진정성을 줘야 하는데, 저 외모에 눈이 풀리면 곤란하다.
‘확신한다. 폐하는 나랑 엮인 일이 불쾌한 거야.’
그래도 이 부분에 대해선 나도 할 말이 있단 말이지.
“그, 아까 좀 불쾌하셨죠? 걱정하지 마세요. 저는 절대 폐하께 흑심 따위 없거든요!”
제가 폐하의 외모는 참 좋아하고 거기엔 흑심이 그득한데 말입니다.
“라울 신관님이 하신 말씀처럼 제가 폐하를 연모하거나 하는 일은 없을 거예요. 저는 폐하를 이성으로 보지 않거든요.”
이성은커녕, 그냥 저랑 다른 인종이라 여기고 있습니다.
그러니 난 떳떳하다.
“…….”
식탁 위로 침묵이 감돌았다.
폐하가 나이프를 쥔 손을 움직였을 땐, 살짝 쫄았다.
다행히도 나이프의 종착지는 내 목이 아닌 접시 위였다.
“부디 그래 주시길.”
폐하는 가볍게 입꼬리를 비틀었다.
다행이었다. 평소의 성격 나쁜 폐하다.
“말씀하신 것처럼 농담거리도 안 되는 일이니깐요.”
“당연하죠.”
나는 결연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폐하의 기분이 나아졌는지는 모르겠지만, 오해가 풀렸다는 생각에 내 머릿속은 금세 꽃밭이 되었다.
마음이 가벼워지니 입도 가벼워진다.
“폐하, 오늘 예배당엔 왜 오신 거예요?”
“성녀가 취업했다는 이야기를 들어서.”
“재상님이 말씀하셨어요?”
평소엔 예배당에 오지 않는다던 폐하가 방문한 게 의아했는데, 재상님한테 들은 건가?
사실 이제 와 폐하가 아셔도 큰 상관은 없었다.
나는 이제 직장을 구했다 이거야.
“에본에게 듣지 않아도 황궁 내 인사발령 정도는 알 수 있지.”
“……으. 황궁 내에 폐하가 모르는 비밀은 없다 이거죠?”
“그래.”
잘났다. 정말.
정말 잘났다…….
“……그런데 이제 그냥 반말하기로 하신 거예요? 뭐, 지금은 듣는 사람도 없고. 저야 그편이 다정 모드랑 구분하기 쉬우니까 낫긴 한데요.”
“성녀.”
“앗. 저 지금 건방지게 말했어요? 그러려던 건 아닌데.”
반말에 설레서 그만.
폐하, 제발 부탁인데 평생 반말해주세요.
폐하는 날 빤히 바라봤다.
얼굴에 피를 쏠리게 만드는 신종 암살 방법인가를 고민하고 있을 때쯤, 폐하가 물었다.
“놀고먹는 건 이제 질렸습니까?”
“네니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