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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략 황제의 외모가 내 취향이라 곤란하다-11화 (11/150)

11화

“……갔어.”

나는 빈 이불을 내려다보며 허망하게 중얼거렸다.

새 주인님은 내가 잠든 사이 홀라당 사라졌다. 한여름 밤의 꿈처럼.

“어떻게 털 한 올도 안 남기고 갈 수가 있지……!”

오는 것도 맘대로. 가는 것도 맘대로. 매정하기 짝이 없었다.

가겠다는 걸 막을 수는 없는 노릇이지만, 그래도 인사는 해주고 떠나면 얼마나 좋겠는가.

하다못해 추억을 회상할 수 있는 물건이라도!

하지만 새하얀 이불을 샅샅이 뒤져봐도 검은 털 하나 나오지 않았다.

“이럴 순 없는 거야.”

그 온기를 알아버린 이상, 이전처럼은 살 수 없었다.

이 구멍 뚫린 가슴을 채울 무언가가 필요하단 소리였다.

“후후후……. 하루의 시작은 역시 모닝 폐하지.”

말해봤자 입만 아프다. 쓸쓸한 마음을 달래는 데는 폐하의 얼굴만 한 게 없었다.

나는 가벼운 외출용 로브를 꺼내 입고 복도로 나왔다.

앞문으로 가야 하나? 뒷문?

“하아아암.”

“자네가 하품하는 걸 보니 이제 곧 교대 시간이구먼.”

“야간 순찰은 죽을 맛이라니까. 빨리 들어가서 잠이나 잤으면 좋겠어.”

건물 외벽 너머에서 투덜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하품이 끊이질 않는 걸 보니 슬린 경이 분명했다.

“그러면 뒷문이지.”

슬린 경이 속한 기사단은 정문에서 순찰 교대를 했다. 그게 새벽 4시쯤이니, 곧이다.

나는 별문제 없이 뒷문으로 나가 마음 편히 황궁을 걸어 다녔다.

쌀쌀한 새벽 공기가 폐부를 시원하게 씻겨냈다.

“아, 상쾌하다. 이 시간엔 돌아다니는 사람들이 없어서 좋단 말이지.”

순찰하는 사람들만 조심하면 누군가와 마주칠 걱정을 하지 않아도 되고.

이 시간에 일과를 시작하는 사람은 극히 드물었다.

‘그리고 그 드문 사람 중의 한 명이 우리 폐하시고.’

진짜 부지런하시단 말이야.

폐하가 거주하는 궁의 2층 서재는 오늘도 새벽에 불이 켜졌다.

창으로 보이는 폐하는 언제나처럼 꼿꼿한 자세로 앉아 일하고 계셨다.

가끔 들리는 짜증 섞인 목소리가 그렇게 환상적일 수 없다.

평소에는 절대로 못 보는 실내복 차림은 또 어떻고.

크흡. 창가에 책상을 배치한 분은 누구신지 모르겠지만 대대손손 복 받으실 거예요. 덕분에 제가 멀리서도 폐하의 용안을 영접하고 있습니다.

‘흐트러진 머리 무슨 일이야. 사람이 아침부터 저리 섹시해도 되는 거냐고요.’

실연은 사람을 한층 더 성숙하게 만든다고 했던가.

더는 잘생길 수 없을 것 같았던 폐하의 외모는 근래 들어 매일 신기록을 경신하고 있었다.

아아, 빛이 난다.

누가 아침에 일출을 보나, 폐하 얼굴이 태양인데.

으-. 치밀어 오르는 덕심을 주체할 수 없어 나는 허공에 주먹질했다.

내가 변상할 돈만 있었으면 벌써 황궁 다 부수고도 남았어.

나는 폐하의 궁과 멀찍이 떨어진 나무 뒤에 숨어 10분가량 폐하의 옆모습을 훔쳐보다, 무거운 발을 움직였다.

“이제 가자…….”

시아나가 하녀들과 함께 세숫물을 가지고 올 때까진 아직 시간이 있었지만, 오래 머물다 폐하한테 걸리면 그 끝이 별로 좋지 못했다.

온종일 폐하의 똘마니처럼 굴려지지 않으려면 내 욕망과 타협을 해야 했다.

그래도 좀 더 보고 싶으니까 나노 단위로 천천히 움직인다.

“어?”

마지막으로 고개를 돌리려던 때, 나는 막 시야에 들어온 물체에 시선을 빼앗겼다.

폐하의 궁 1층 창틀 아래에서 폴짝 뛰어오른 것이 있었다.

‘뭐지?’

창틀 오르기를 실패한 검은색이 몸을 움찔움찔했다.

자세히 보고 싶은데 화단의 수풀 때문에 윤곽이 또렷이 보이지 않았다.

그림자는 아니고…….

젠달은 세이칸 신의 색이라며 검은색 쓰기를 극도로 꺼리니, 바람에 굴러가는 바구니 같은 것도 아닐 가능성이 컸다.

그럼 살아있는 건가?

가령, 어젯밤의 그 귀여운 생명체라던가.

‘진짜로?’

특이한 생김새에 검은 털이라 이 세계의 신수라도 되나 싶었는데. 그래서 다시 만날 수 없으리라 생각했다.

‘설마 황궁에서 기르는 동물인가?’

가슴이 두근거렸다.

나도 동네에 친한 동물 하나 만들 수 있는 건가?

자세히 보니 날개 같은 게 파닥이는 거 같기도 하고-!

“갸-오.”

환청이지만 들린다. 집사를 부르는 소리가.

‘가까이 가서 확인해 볼까?’

이미 몸은 다시 궁을 향해 돌아섰다.

2층의 폐하는 여전히 책상 위에 시선을 두고 계셨다.

‘그래. 걸려봤자 하루 똥개 훈련밖에 더 하겠어.’

하지만 안 걸리는 게 최선은 맞았다.

나는 눈치를 살피며 1층 화단으로 조심조심 재빠르게 움직였다.

그러는 사이에 검은 물체는 어디론가 사라지고 말았다.

“창틀 아래 풀들이 짓밟혀 있어.”

그래도 헛것을 본 게 아닌 모양이었다. 아직 주위에 있을지도.

잘 다듬어진 수풀과 궁의 외벽 사이에는 공간이 있었다.

나는 눈높이를 맞추기 위해 몸을 숙였다. 그리고 그 길을 따라 기어가다 시야가 어두워짐을 느꼈다.

검은……!

“……색.”

“성녀.”

폐하의 그림자 속이었다.

언제 오신 거지. 으윽. 어둡기는 무슨. 밝다. 저 외모가 너무 밝아서 숨어버리고 싶어.

하지만 고양이 앞에 쥐처럼 바짝 굳어 옴짝달싹할 수 없었다. 어차피 도망가도 잡힌다.

나는 무릎과 손바닥을 땅에 붙인 그 자세로 폐하를 올려다보았다.

“……하하.”

어색한 내 웃음에 폐하가 짧게 조소했다.

멀찍이 떨어져서가 아닌 바로 앞에서 본 폐하의 실내복 차림은 엄청났다.

살짝 위로 올린 앞머리. 반짝반짝 빛나는 금발. 핏 좋은 베이지색 바지에 하얀 셔츠. 거기에 어제보다 더 잘생긴 눈, 코, 입. 지중해 바다보다 더 맑고 푸른 눈동자는 어떻고.

‘내 각막에 영구 소장.’

아니, 정신 차려. 이 얼굴에 영혼까지 팔 것아.

나는 최대한 태연한 모습으로 땅을 짚고 일어났다.

“여, 여기서 뭐 하는 중이세요?”

“아까부터 보고 계셨다시피. 일하고 있었습니다만.”

역시나 들켰구나.

왜인지는 모르겠는데, 폐하가 화사하게 웃었다.

주변에 심어진 황궁 정원의 탐스러운 꽃들이 눈에 들어오지 않을 정도로.

“성녀께서는.”

아침부터 목소리에 꿀이 떨어지네요. 폐하.

다음부턴 절대로 폐하 반경 2m 이내로 들어가지 말아야지.

요즘 폐하 미모는 가까이하기 위험하다니까. 나 지금 멍청한 표정일 게 분명해.

‘멍청한 표정?’

그러다 내 상태가 생각났다.

수풀에 엉켜 엉망이 된 머리카락, 세수도 하지 않은 얼굴, 풀물이 들고 흙이 묻은 슈미즈 차림.

‘안 돼!’

폐하의 각막에 이 초췌한 몰골을-!

속으로 경악하는 날 가만히 바라보던 폐하는 다정 모드로 생긋 웃으며 말했다.

“열심히 먹고 노시나 보네요.”

***

비상이다.

나는 앞 열의 장의자 책대에 팔꿈치를 올리고 깍지 낀 손에 턱을 댔다.

‘이건 무언가의 압박인 게 틀림없어.’

그동안 너무 한량처럼 지냈나?

능력 없는 성녀랍시고 하는 일이 없으니 이제 밥값이 아까워지신 걸지도 모른다.

이러다 내쫓기는 건 아니겠지.

“……성녀님.”

“네.”

“의자가 떨립니다만.”

“아.”

시선을 돌리니 에본 재상이 의자와 함께 덜덜 떨리고 있었다.

나는 무의식중에 떨던 내 다리를 진정시키고 앉은 자세를 바로 했다.

“죄송해요.”

“아닙니다.”

재상님과 나는 기다란 의자의 끝과 끝에 앉아 있었다.

내가 먼저 앉고 재상님이 앉았지. 오늘도 날 피하는 모습이 아주 바람직하시다.

그래도 퇴근길에 순순히 잡혀 황실 예배당까지 따라와 준 것만 해도 고마울 일이었다.

“그래서 상담하실 일이 어떤 건지…….”

“그게요, 재상님도 일하시죠?”

“그렇습니다만…?”

“뭘 그렇게 당연한 소리를 하나 싶으시겠죠? 그러니깐요. 폐하께서도 열심히 일하시고, 헨켈 대장도 일하고, 시아나도 일하고. 하다못해 저기, 라울 신관님도 일하시는데-!”

“흐억.”

“응?”

열변을 토하는 와중에 이상한 소리가 들렸다.

에본과 내 고개가 동시에 돌아갔다.

문과 가까운 의자에서 기도를 드린다던 라울 신관님이 손등으로 입가를 훔치고 있었다.

그럴 리는 없겠지만 수업 시간에 졸다가 침 닦던 내 모습이랑 비슷하네.

“허허. 이 늙은이는 안 끼워주셔도 괜찮습니다.”

라울 신관님은 재빠르게 기도실로 들어갔다. 딴짓을 들켜서 도망가시는 느낌이 드는 건 기분 탓이겠지.

“어쨌든 말이죠.”

우리는 다시 대화로 돌아왔다.

재상님의 고운 옆선을 보며 나는 고해성사를 하듯 털어놓았다.

“저만 하는 일이 없어요.”

“성녀님께서 놀고먹으신다는 말씀이십니까?”

“헛. 폐하랑 그런 얘기 종종 하셨어요? 두 분이 똑같은 얘길 하시네.”

역시 비상이었어.

그래도 재상님이 이미 알고 있는 내용이라니. 상담해줄 사람을 잘 고른 모양이었다.

뭐, 선택지가 헨켈 대장과 재상님밖에 없긴 했지만.

시아나는 내가 신성력이 없다는 걸 모르니 예외였다.

“어쨌든. 재상님이 생각하시기에도 심각한 문제죠?”

“네?”

“……엥?”

내 말에 재상님이 놀란 토끼 눈을 하고 내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생각지도 못한 눈 맞춤에 놀라기는 나도 마찬가지였다.

“왜, 왜요?”

“아, 아닙니다. 하시려던 말씀 계속하시지요.”

“그래서 말인데요. 재상님, 저 일자리 좀 알선해주세요.”

“일…자리…요?”

재상님은 더듬더듬 물었다.

나는 묘하게 흔들리는 그의 보라색 눈을 보며 비장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네. 폐하 몰래요.”

이미 자존심 따윈 없어진 지 오래지만, 그래도 폐하한테 부탁할 수는 없는 일이다.

잘못해서 성격 나쁜 폐하가 나오면 큰일이지. 분명히 재밌어하며 날 놀려먹을 생각으로 일을 줄 게 뻔해.

그래, 지금 믿을 사람은 재상님밖에 없다.

“…….”

“재상님.”

나는 두 손을 모으고 재상님께 다가가 호소했다.

재상님이 몸을 뒤로 슬쩍 빼는 게 보였지만, 거기에 마음의 상처를 입을 여유는 없었다.

“제가 지금 어디서 뭘 하겠어요. 어디를 가더라도 제가 성녀인 걸 알아볼 테고, 그러면 성녀님의 능력을 보여달라 할 테고. 그런데 전 신성력이라곤 하나도 없는 요란한 빈 수레니 할 수 있는 게 없는데.”

“서, 성녀님. 그렇지만 제가 어떻게 폐하 모르시게 일자리를….”

“저 상자 접기도 잘하고, 인형 눈 붙이는 것도 잘할 수 있어요. 아, 탈 쓰고 홍보물 나눠주는 것도 가능합니다. 춤도 추라면 출 수 있어요.”

“그런….”

지금, 내 앞에 있는 사람은 재상님이 아니라 면접관이다.

나는 주먹을 불끈 쥐었다. 그리곤 열의 넘치는 준비된 인재처럼 눈을 빛냈다.

“시켜만 주시면 뭐든 열심히 할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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