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화
“성녀님, 뭐하고 계세요?”
시아나의 물음에 나는 의자에 앉아 눈을 감은 채 대답했다.
“명상?”
시아나가 웃으며 응원의 말을 건넸다.
그 뒤로는 날 방해하려 하지 않으려 조용히 할 일을 하는 듯했다.
그래, 나는 지금 명상 중이었다.
불끈불끈 치밀어 오르는 내 욕망을 억누르기 위해.
‘폐하랑 왕녀님 얼굴 보고 싶어……!’
날 믿는다는 폐하의 말은 근신 처분이나 다름없었다.
이건 내 억측이 아니었다.
그 증거로, 프로딘타 궁에 처박힌 이틀 동안 아무도 날 찾아오지 않았다.
사흘째인 오늘 아침, 에본 재상이 안부를 묻는단 명목으로 잠시 왔다 가긴 했지만.
“폐하께서 ‘성녀님께서 잘 계시는 것 같아 마음이 놓이신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언제까지 잘 계시면 된다는 말씀은 없으셨나요?”
“없으셨습니다.”
크흡.
내 근신은 언제 풀릴지도 정해지지 않은 모양이었다.
‘이제 이틀 뒤면 왕녀님이 떠나는데……!’
보니아 왕국 사절단이 젠달에 머무는 기간은 일주일.
그동안 멀리서 왕녀님의 미모를 실컷 감상하겠다는 내 계획은 물거품이 되어 사라졌다.
연회 이후로 왕녀님을 본 것은 그 사건이 마지막.
그다음 날, 프로딘타 궁에 왕녀님이 보낸 선물이 잔뜩 왔지만, 왕녀님은 오지 않았다.
나한테는 왕녀님이 선물이었는데 말입니다.
하여튼.
도보 20분 이내에 폐하와 왕녀님이 있는데, 나는 프로딘타 궁 밖으로 나갈 수가 없다니.
‘이건 고문이야.’
자업자득이라 생각하면서도 금단증상처럼 자꾸 폐하의 얼굴이 아른거렸다.
왕녀님의 얼굴도 아른거리긴 했는데, 매일 보던 폐하의 얼굴을 못 보는 쪽이 더 괴로웠다.
‘1일 1 폐하의 삶은 축복받은 성덕의 삶이었어.’
그래서 에본 재상에게 폐하의 초상화랑 남는 제복 한 벌만 가져다주면 안 되냐고 물었는데.
뒷걸음을 치며 빠르게 사라졌다.
흑흑. 헨켈 대장이라면 들어줬을지도.
그래도 이 괴로운 시간을 버티게 해줄 위안이 하나 있었다.
‘폐하랑 왕녀님의 연애 성공!’
지금 밖에서 두 분이 열심히 연애 감정을 꽃피우고 있다면.
거기에 좀 더 행복회로를 돌려서 두 분이 결혼하시는 미래까지 상상해본다면!
폐하는 황제시니까 황궁에 남으실 거고, 왕녀님은 젠달로 오실지 모른다.
그러면 일주일이 뭐야.
일 년 내내 1일 1 폐하, 1 왕녀님이다.
“후후후.”
아차. 나도 모르게 소리를 내어 웃었다.
방에 시아나도 있는데.
민망함에 슬며시 눈을 뜨니, 아니나 다를까. 시아나가 날 보고 있었다.
“명상 중에 즐거운 일이라도 떠오르셨어요?”
“으응…….”
시아나가 그 즐거운 일이 뭐냐고 묻는 듯한 눈빛을 했지만, 말하는 즉시 난 수치사다.
다른 주제를 꺼내야겠어.
“시아나도 샤를 왕녀님 봤어? 엄청 아름다우시더라.”
“네. 성녀님이 더 아름다우시지만요.”
“……왕녀님의 미모는 차원이 다른데? 시아나가 제대로 못 봤구나? 아, 왕녀님 춤도 엄청나게 잘 추셔. 요정 같더라니까.”
“저는 성녀님 춤이 더 좋았는데요.”
“시아나, 무도회에 왔었어?”
“그럼요.”
“안 보였는데?”
“뒤쪽에서 보고 있었답니다.”
얼굴은 제대로 안 보였다 치고.
내 춤을 봤으면 왕녀님 춤도 봤을 텐데.
“시아나.”
나는 그녀를 향해 손가락 세 개를 펼쳐 마구 흔들었다.
“이거 몇 개?”
아무래도 시력에 이상이 생긴 게 분명해.
내가 신성력이 있었으면 눈 나쁜 것 정도는 바로 고칠 수 있을 텐데.
폐하한테 잘 말씀드려…….
“응?”
“무슨 일 있나요?”
“잠시만.”
나는 의자에서 일어나 발소리를 죽이며 방을 가로질러 걸었다.
부스럭.
잘못 들은 게 아니었다.
닫힌 창 너머, 발코니에서 뭔가가 움직이는 소리.
여긴 3층인데.
‘침입자인가?’
그동안 ‘성녀’를 노리고 황궁까지 침입자가 잠입한 적은 몇 번 있었다.
그때마다 폐하가 어떻게 알고 나타나서 침입자를 물리쳐줬지만.
‘지금 침입자가 나타난다면 폐하가 오실 거란 장담은 없지. 사흘 내내 얼굴 한 번 보여주러 오지도 않았으니까!’
갑자기 서럽다.
나중에 근신 비슷한 거 시키려고 하면 무조건 소원 들어드린다고 해야겠어.
똥개 훈련이 얼굴 못 보는 것보다 낫다.
나는 발코니 문 근처에 잠시 멈춰 바깥의 동태를 살폈다.
발코니에 들리는 소리 없음. 프로딘타 궁 외벽 쪽에서도 들리는 소리 없음.
‘숨죽이고 숨어있나.’
나는 테이블 위의 티 주전자를 집어 들었다.
근처에 무기로 쓸 만한 게 이것뿐이었다.
내 분위기가 심상치 않았는지, 시아나도 경계하며 이쪽으로 다가왔다.
나는 문손잡이를 돌렸다.
“…….”
‘아무도 없어.’
발코니로 나왔다. 아무것도 없이 휑하기만 했다.
분명 사람의 발자국 같은 소리였는데.
“경비대를 불러올게요.”
시아나가 발코니 구석구석을 헤집고 돌아와 내게 물었다.
그렇지만 이제 딱히 수상한 소리가 들리지도 않고.
“아니야, 시아나. 내가 잘못 들었나 봐.”
***
티테이블 위에서 회전하던 금화는 서서히 속도가 줄어들다가 한쪽으로 쓰러졌다.
쓰러진 금화의 윗면에는 잘생긴 남자의 옆얼굴이 새겨져 있었다.
젠달의 황제, 알렌드 칸 레오디우스.
“그렇게 탐을 내도 성녀는 못 넘겨줘.”
테이블에 팔을 올려 턱을 괸 샤를은 황제가 했던 말을 떠올렸다.
“신사 같은 얼굴을 하더니.”
속에는 욕심이 그득했다.
그것은 저도 마찬가지이지만.
샤를은 황제가 저와 동류라 확신했다.
원하는 것을 위해선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다.
샤를은 표면적으론 조국을 사랑하는 애국심 넘치는 왕녀였지만, 그것은 자신의 자리를 지키기 위해 어릴 적부터 만들어낸 이미지에 불과했다.
“젠달의 황궁까지 들어와도 성녀는 통 만날 기회가 없네.”
샤를은 금화를 뒤집었다.
황제의 얼굴이 보이지 않으니 조금 기분이 나아졌다.
“그래서, 성녀님은 오늘도 본인 궁에서만 계셨다고?”
샤를의 물음에 뒤에 서 있던 남자가 고개를 끄덕였다.
가면을 쓴 남자는 겉보기에 키가 크고 몸이 좋았다.
그는 얼굴 전체를 덮는 원형의 가면을 쓰고 있었는데, 그 가면은 눈이 있는 부분을 제외하고는 모조리 막혀 있었다.
보기에도 둔탁한 가면은 보니아 왕실 호위 부대의 특징이었다.
부대원의 사사로운 감정을 죽이고, 오로지 임무를 위해 살라는 의미를 담은.
샤를은 그 가면을 좋아하지 않았다.
상대방의 표정도 보이지 않는 가면. 뭐가 좋다고들 쓰고 있담.
“둘만 있을 때는 그 가면 좀 벗어. 답답하잖아.”
“……호위로 왔으니까.”
가면 속에서 차분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샤를은 불만 어린 표정으로 남자를 바라보다 고개를 돌렸다.
그녀의 단발이 고갯짓을 따라 흔들렸다.
“됐어. 너한테 기대한 내가 잘못이지.”
“성녀를 어쩔 셈이야?”
“이제야 먼저 말을 거네. 성녀가 걱정돼서 말문이 트인 거야?”
남자는 샤를의 명을 받아 성녀를 지켜보고 왔다.
왕족의 명을 따를 수밖에 없는 처지라 그리하긴 했지만.
“왕께서 젠달을 건드리지 말고 오라 하셨어.”
이번 보니아 왕국 사절단의 목적은 성녀의 존재 확인이었다.
하지만 남자가 보기엔 샤를은 목적을 넘어선 일을 계획하고 있는 듯했다.
“샤를, 다른 생각을 하는 건 아니지?”
“왜 그런 걸 물어? 내가 무슨 짓을 할지 궁금해?”
샤를은 의자 위로 올라갔다.
의자 뒤에 서 있는 남자보다 샤를의 눈높이가 높아졌다.
남자가 그에 맞춰 고개를 들었다.
그놈의 가면.
샤를은 눈살을 찌푸렸다.
그녀의 고운 손이 남자의 풍성한 갈색 머리카락 속으로 들어갔다.
이어, 딸깍하고 가면을 고정하던 끈의 연결고리가 풀어졌다.
“그게 알고 싶으면 호위가 아니라 내 사랑스러운 델칸이 되어야지.”
샤를의 손에 가면이 딸려 나오자 남자의 얼굴이 드러났다.
흔히 볼 수 없는 미남이었다.
샤를과 닮은 듯했지만, 그녀보다 선이 굵은 얼굴은 또 다른 분위기를 자아냈다.
델칸의 회색 눈이 샤를을 똑바로 올려다보았다.
그제야 샤를은 만족스러운 웃음을 지으며 제 이복동생을 바라봤다.
델칸의 입술이 움직이며 걱정 어린 목소리를 흘렸다.
“성녀를 어떻게 할 거야.”
샤를은 손에 든 가면을 제 얼굴 위에 얹고 말했다.
“보니아 왕국으로 데려갈 거야.”
“불가능해.”
델칸의 어조는 차분하면서도 단호했다.
제 이복누이의 성정을 그는 잘 알고 있었다.
“욕심을 부려서 되는 게 있고 안 되는 게 있어.”
샤를은 머리가 좋았다.
그렇기에 자신을 드러내지 않으면서 욕심을 채우는 법을 잘 알았다.
그동안은 희생양 한둘 정도로 넘어갈 수 있을 정도의 일이었지만, 이번에 샤를이 눈독을 들이는 대상은 그 규모가 기존과는 달랐다.
“샤를.”
“…….”
델칸은 가면을 얼굴에 얹은 채 말없이 자신을 내려다보는 이복누이를 불렀다.
“샤를.”
“……심각하긴. 누가 이번에 데려간대?”
샤를은 가면을 내던졌다. 델칸의 반대에 살짝 짜증이 난 듯 미간이 모여 있었다.
왕실 호위 부대의 가면이 바닥에 떨어져 나뒹굴었다.
“이번이 아니더라도.”
델칸은 낮은 목소리로 이복누이에게 경고했다.
한낱 서자인 그가 왕실의 혈통을 이은 왕녀에게 이래라저래라 명령할 수는 없었기에, 델칸으로서는 샤를을 설득하기 위해 노력하는 것이 최선이었다.
“성녀를 납치하면 전쟁이 일어날 거야.”
“젠달은 보니아 왕국을 공격 못 해. 오디트리아 맹약이 있으니까.”
그 황제라면 전쟁을 일으킬지도 모르지만.
샤를은 뒷말을 아끼며 델칸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욕심이 나지 않아?”
보니아 왕국에서 소환한 초대 성녀.
성녀의 역사를 기록한 책은 보니아 왕궁 깊숙한 곳에 보관돼, 소수의 왕족만 열람할 수 있었다.
그리고 거기에 적혀있던 한 구절.
[순수한 보니아 인의 피는 성녀를 갈구한다.]
순수한 보니아 인의 피.
혈통을 중요시하는 보니아 인은 왕족일수록 그 피가 짙고 순수했다.
샤를은 성녀를 본 순간, 그 구절이 허구가 아니었음을 직감했다.
그녀의 몸속에 있는 보니아 왕가의 피가 뜨겁게 달아올랐다.
그것을 느낀 이는 단연 그녀뿐만이 아니었을 터였다.
그곳에 있는 보니아 인 중에 왕가의 피를 가지고 있는 사람이 한 사람 더 있었으니.
“너도 그렇게 생각하잖아, 델칸.”
“…….”
델칸의 곧았던 시선이 처음으로 샤를에게서 떨어져 아래를 향했다.
샤를은 감미로운 노래를 부르듯 델칸에게 속삭였다.
“그 귀하신 분을, 누가 마다하겠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