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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략 황제의 외모가 내 취향이라 곤란하다-8화 (8/150)

8화

“알렌드. 저기 봐. 마샤 아줌마가 화가 단단히 나셨나 본데.”

“이 인간! 또 외박하고 낮에 기어들어 와? 이번이 몇 번째야!”

“아악! 마샤! 잘못했어!”

채소가게를 운영하는 마샤는 남편의 머리끄덩이를 잡았다.

도박으로 밤을 새운 게 분명한 게릭의 퀭한 얼굴이 마샤의 손에 붙들려 이리저리 흔들렸다.

“봐 봐. 알렌드. 게릭 아저씨 꼼짝도 못 하는 거. 아줌마를 화나게 하면 안 된다니까. 우리도 조심하자.”

***

알렌드는 헨켈과 기사 여럿을 데리고 사건 현장에 도착했다.

그리고 황제 일행은 눈앞의 광경에 몸을 굳혔다.

“그거 다시 말해 봐요. 다시 말해보라니까? 본인 앞에서 못 할 말을 뭐가 그렇게 재밌다고 떠들고 있었어요?”

“아닙니다! 오해이십니다!”

“다 설명해 드릴 테니 손 좀 놓아주시면, 으아악!”

“설며엉? 제가 다 들었는데 무슨 설명이 필요한지 모르겠네!”

중간에 왜곡이 생긴 보고가 아닐까 생각했었지만.

왜곡은 무슨.

보고 그대로 성녀는 양손에 귀족의 머리통을 하나씩 붙들고 있었다.

“…….”

“폐하, 어떻게 할까요.”

헨켈이 알렌드에게 물었다.

일반적인 귀족들끼리의 다툼이라면 즉시 상황을 진정시킨 뒤 진상규명을 하겠으나.

그렇게 하기 위해선 성녀와 귀족들을 떨어트려 놔야 했다.

그 점이 헨켈을 비롯한 기사들을 망설이게 했다.

‘내가 감히 성녀님의 육체에 손을 대도 되나?’

더욱이 성녀는 화를 내고 있었다.

지금 성녀를 말리는 건, 비약하자면 그녀의 의사에 반하는 행동이었다.

‘늘 해맑으신 분을…….’

‘저자들은 도대체 무슨 짓을 한 거야?’

황궁 내에서 은밀히 활동하는 자칭 ‘성녀교’ 기사들이 쩔쩔매고 있는 두 사람을 노려봤다.

시야에 땅바닥만 들어와 상황을 모르고 있는 귀족들이 이유 모를 오한에 몸을 떨었다.

일단 두 귀족이 성녀에게 해를 가할 것 같지 않자, 알렌드는 이 당황스러운 상황을 좀 더 살펴보기로 했다.

“저자들은 누구지?”

“롭휀 지역의 귀족들입니다. 황궁에서 장소를 지원하는 소모임 참석을 위해 황궁에 들어와 있습니다.”

헨켈이 막힘없이 정보를 말했다.

당일 황궁을 방문할 인원의 목록을 훑는 것이 그의 새벽일과 중 하나였다.

“앞으로 그 모임은 폐쇄하라 하게.”

“네.”

성녀는 아직도 자신들이 온 것을 눈치채지 못했다.

평소라면 이 정도 거리에서도 벌써 제 기척을 느끼고 도망치거나 눈을 반짝이거나 했을 터였다.

‘화가 난 모습을 보는 건 처음인데.’

누가 제 것을 그리 만들었는지.

알렌드의 속에서 일어난 불쾌한 감정이 그의 몸을 휘감듯 달라붙었다.

그러다 성녀 근처에서 안절부절못하는 샤를과 눈이 마주쳤다.

‘샤를 왕녀.’

황제를 발견한 그녀의 눈동자가 짧게 흔들렸다.

샤를은 시선을 바닥으로 떨어트리고 고개를 숙여 황제에게 예를 갖췄다.

“농담! 농담이었습니다!”

“농담요? 와. 그렇게 더러운 농담은 또 처음 듣네. 그리고 가족은 건드리면 안 되는 거 몰라요? 어디 가서 누가 부모님 안부 여쭙는 소리 좀 들어봐야 잘못한 걸 아시려나!”

“부모님 안부 여쭙는 게 왜……. 아아악. 서, 성녀니임!”

‘그렇군. 그렇게 됐나.’

보니아 왕가의 근친혼은 종종 질 나쁜 귀족들의 저질스러운 농담거리로 올라오곤 했다.

성녀한테 머리털을 잡힌 귀족들이 했을 대화 내용도 그와 비슷했겠지.

상종할 가치도 없는 것이지만, 성녀라면 그냥 듣고 흘릴 수 없었을 터였다.

‘롭휀이라. 어중이떠중이들이 많은 지역이라더니, 장소에 따라 말을 가릴 줄도 모르는군.’

알렌드는 속으로 혀를 찼다.

더러운 수준의 대화가 성녀의 귀에 들어갔다는 게 무척이나 불쾌했다.

머리를 잡힌 귀족 한 명이 고개를 들어 올린 건 그때였다.

“이러다 제 머리털이 다 뽑혀 나가겠습니다!”

남자는 두피의 평화를 얻었지만 아리의 몸이 크게 휘청였다.

달려나간 알렌드가 중심을 잃고 쓰러지려는 아리의 허리를 낚아챘다.

“아까부터 오해라고 말씀드렸지 않습니까. 성녀님께서 들으신 건 단편적인……, 으어억. 폐, 폐, 폐, 폐하.”

“폐하?!”

“…….”

남자는 상의의 구겨진 부분을 손으로 툭툭 털며 얼굴을 들다 심장이 땅으로 곤두박질하는 기분을 느꼈다.

황제가 성녀를 안고 자신의 앞에 서 있었다.

이상한 점은, 성녀가 고개를 떨구고 숨을 가쁘게 쉬며 자신의 허리에 둘린 황제의 팔 위에 벌벌 떠는 제 손을 얹으려 하고 있었다는 것이었다.

성녀는 부들대는 손으로 황제의 팔을 살짝 밀어냈다.

그러나 그 노력이 무색하게도 황제의 팔은 다시 성녀의 허리에 밀착했다.

“으아아아.”

“……흠.”

게다가 황제는 이상한 소리를 내는 성녀의 반응에 만족스럽다는 듯이 웃고 있는 게 아닌가.

뭔가 이상하긴 했지만, 남자는 황제가 기분 좋아 보이는 이 시기를 놓칠 수 없다고 생각했다.

최대한 황제에게 잘 보이기 위해 사람 좋은 얼굴로 웃었다.

그리고 잠시 뒤, 그는 기다렸다는 듯이 달려드는 기사들에게 잡혀 일행과 나란히 무릎을 꿇렸다.

“폐하, 저희는 억울합니다!”

“…….”

남자는 계속해서 우겼지만 일행은 양심이라도 있는지 얌전했다.

황제가 죄명을 하나씩 나열했다.

“타국의 왕족 모독, 황궁 내 난동, 그리고 성녀 폭행.”

성녀 폭행이라는 말에 남자가 억울하다는 눈빛을 했다.

너그러운 레오디우스 황제 폐하가 아니신가. 제국민인 자신에게 온정을 베풀어 줄지도.

하지만 황제는 단호했다.

“성녀 폭행은 신성모독인 중죄네.”

그사이 황제의 팔의 힘이 느슨해지자, 성녀는 때를 틈타 쪼르르 그의 품을 빠져나갔다.

“헨켈 경.”

“네.”

“재상에게 이 자들의 재산을 몰수하고 작위를 박탈하는 절차를 진행하라 전하게.”

“그렇게 하겠습니다.”

“폐, 폐하!”

“아량을!”

아연실색한 두 사람이 다급히 황제에게 애원했다.

그러나 알렌드는 그들에게 내린 처분을 재고할 여지가 없었다.

그는 샤를의 감사 인사를 받는 아리를 데리고 그 자리를 떴다.

“……있, 잖아요. 폐하.”

“네.”

호위 기사들도 대동하지 않고 단둘이 프로딘타 궁으로 향하는 길.

아리의 부름에 알렌드가 대답했다.

“저……. 손 좀.”

“손?”

“손 좀……. 놔주시면…….”

“뭐라고 하시는지 잘 안 들리는데.”

알렌드는 자리를 뜰 때부터 잡고 있던 아리의 손을 흔들었다.

거짓말.

저 사기급 능력 덩어리인 황제가 제가 한 말을 못 들었을 리 없다.

‘고의다. 고의가 분명해.’

아리는 울고 싶어졌다.

자신이라고 황제 폐하의 손을 놓고 싶겠는가.

이 폐하는 손마저 잘생겼다.

손가락이 길쭉길쭉 뻗은 큰 손은 검을 잡을 때 생긴 굳은살을 제외하고 보드라웠다.

제 손을 감싸 쥔 손의 온기는 어찌나 따뜻한지.

이 촉감, 이 형태, 이 온기를 재현한 손난로 굿즈라도 나온다면.

아리는 한여름에도 그걸 껴안고 다닐 수 있으리라 생각했다.

하지만.

“으……. 저 죽을 거 같단 말이에요! 심장 터져서!”

아까부터 들어오는 알렌드의 스킨십에 정신을 못 차리게 생겼다.

특히나 황제의 손이 자신의 허리를 감았을 때는.

자신이 지금 뭘 하고 있었는지조차 잊을 정도였다.

머릿속까지 세차게 뛰어 그대로 세이칸 신을 만나는 게 아닐까 싶었으니까.

“죽으면 안 되지.”

알렌드는 웃으며 아리의 손을 놓았다.

대신 그녀에게 보폭을 맞춰 나란히 옆에서 걸었다.

아리는 볼을 살짝 붉히며 힐끔 그런 그를 올려다보았다.

‘오늘 폐하 기분 좋으신가 보네.’

계 탔다.

성격 안 좋은 버전도, 다정 버전도 좋았지만.

역시 기분이 좋은 최애만큼 보기 좋은 것도 없었다.

그간 목격한 횟수가 지금을 포함해 세 번밖에 안 될 정도로 희귀한 일이긴 했지만.

‘희귀할수록 값지다……!’

아리는 덩달아 기분이 들떠 아까 있었던 일을 재잘거렸다.

“……그 사람들은 안됐다는 생각이 들기도 하고요. 순식간에 알거지가 된 거잖아요?”

시치미를 떼는 모습에 화가 더 나서 머리를 잡긴 했으나.

그 정도로 심한 처벌을 받을 줄은 몰랐다.

여기는 역시 다른 세계구나.

새삼스레 그런 생각이 들었지만, 스스로가 신기하게도 이전 세계에 미련이 들진 않았다.

아리는 알렌드를 올려다보며 활짝 웃었다.

“그렇지만 아까 멋졌어요. 폐하.”

올라가려던 알렌드의 입꼬리는 뒤이어진 아리의 말에 제자리를 찾았다.

“샤를 왕녀님도 폐하의 멋짐에 다시 한번 반했을걸요!”

아리는 두 주먹을 불끈 쥐었다.

“상황을 정리하려고 저를 데리고 나오신 건 조금 감점 요소겠지만요. 여기서부터는 저 혼자 갈게요. 폐하는 왕녀님께 가보세요!”

그러곤 지금이 점수를 딸 기회라며 밤하늘을 닮은 눈을 빛냈다.

알렌드는 짧게 헛웃음을 흘렸다.

“그들은 성녀께서 나서지 않았어도 그 정도의 처분은 받았을 겁니다. 타국의 왕녀를 모욕한 죄는 크니. 사형까지 가지 않은 걸 다행으로 알아야지요.”

“……갑자기요? 저희 지금 왕녀님 이야기하던 중…….”

“그렇지만 일이 커진 부분은 있죠. 성녀께서 그렇게 화려하게 이목을 끌어주셨으니.”

알렌드는 화사하게 웃었다.

황궁의 화려한 정원 속 어느 꽃도 그에 비할 바가 못 되었다.

아리는 몸을 움찔했다.

‘가, 갑자기 왜 기분이 나빠지셨지.’

느낌이 좋지 않았다.

이건, 성격 나쁜 버전의 그다.

“황궁 내에서 귀족의 머리카락을 잡는 분은 처음 보았습니다.”

“윽.”

“다른 이들이라면 난동죄……라 할 수 있으나.”

“헉.”

알렌드는 난감하다는 듯이 턱을 매만졌다.

그의 푸른 눈이 아리의 검은 눈에 닿았다.

당황한 기색이 역력한 눈이었다.

“제가 성녀께 죄를 단정 짓고 처벌을 내릴 수는 없지요.”

아리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짧은 순간 바가지를 차고 길에서 빌어먹고 다니는 자신의 모습까지 생각했다.

알렌드는 이어 무도회 때 아리가 한 말을 꺼냈다.

“아무것도 안 하실 테니 걱정하지 말라고 하셨죠.”

앞뒤 상황을 다 자르고 원하는 말만 고른 느낌이었으나, 이의를 제기할 순 없었다.

재산 몰수. 작위 박탈.

아리에겐 재산도 작위도 없었지만, 내쫓길 궁 하나는 있었다.

그래도 최애의 얼굴은 보고 살아야 하지 않겠는가.

“그러니 알아서 잘 계셔주리라 믿습니다.”

햇살 같은 황제의 미소에 아리는 별수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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