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화
“앗. 표정.”
대모란 말이 기분 나빴는지 폐하의 얼굴이 팍 구겨졌다.
나는 재빨리 헨켈 대장의 눈치를 살폈다.
대장은 다행히 다른 곳을 보는 중이었다.
홀에 있는 사람들한테는 폐하의 뒷모습만 보이니 그것도 다행이었고.
“폐하, 표정요.”
“아.”
폐하를 보며 내 미간을 검지로 두드렸다.
단박에 알아들은 폐하는 미간을 풀고 자리에 앉았다.
그나저나 완벽주의자 폐하가 포커페이스에 실패할 때도 다 있네.
역시 사랑은 사람을 변하게 한다니까. 아무렴.
“대모 시켜달란 말은 좀 선을 넘었죠?”
나는 조심스레 폐하에게 속삭였다.
하긴 폐하의 아이면 황자나 황녀일 텐데.
대모로 삼을 거면 신성력이 없는 나보다는 좀 더 능력 있는 사람을 원하겠지!
“죄송해요. 그럴 생각은 아니었는데. 폐하의 개가 되는 거 말고 현실적인 걸 생각하다가 급발진해 버린 거 있죠.”
“……개?”
“그래도 제가 명색은 성녀니까 보여주기식으로 괜찮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어서-.”
“…….”
“아, 근데 그 전에 두 분이 연애하시는 게 우선이죠? 제가 또 앞서갔네요. 그럼 나중에 결혼해서 애를 낳으시면-.”
“성녀.”
폐하는 조잘거리는 내 말을 끊고 내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윽, 눈부셔.
방심하다 당했다.
내 시력 지키지 마.
“아까부터 이해할 수 없는 소리를 하는데. 누가 애를 가지고, 누가 누구랑 연애한다는 건지. 설명을 좀 해줬으면 좋겠는데.”
폐하의 말투에 살짝 모가 나 있었다.
이상하다. 왜 시치미를…….
“아.”
설마 쑥스러워하시나?
뭐야, 이런 폐하 완전 새로워.
놀리고 싶다. 하지만 참아야지.
“에이, 당연히 보니아 왕국 왕녀님이랑 폐하 얘기죠.”
내가 알아챌 것이라곤 생각하지 못했는지 폐하의 눈이 평소보다 살짝 더 커졌다.
잠시 침묵하던 폐하는 입꼬리를 비틀며 조소했다.
“성녀는 정말 아무것도 모르시는군요.”
헐. 다정 버전으로 비꼬는 거 처음이다.
이런 희귀 장면은 영상으로 박제해서 개인 소장해야 하는데!
중세에 머물러 있는 이 세계의 기술력이 심히 한탄스러웠다.
‘역시 사랑은 사람을……!’
감격스러워 울컥하는 말이 튀어 나갈 것 같아 양손으로 입을 틀어막았다.
이건 또 무슨 짓이냐고 폐하가 눈빛으로 말하는 듯했지만 별 타격은 없었지.
그러면 여기서 문제.
보기 중에서 잘생긴 화자의 의도를 정확히 파악한 것을 고르시오.
① 너(성녀)는 아무것도 모르는 바보다.
② 별 뜻 없이 새로운 모습을 떡밥으로 던지고 싶었다.
③ 부끄러우니 관심 꺼라. 내(폐하)가 알아서 할 테니 모르는 척해라.
평소라면 1번이 정답이었겠지만.
오늘의 폐하는 새로운 걸 넘어서 신선하기까지 했다.
이건 사랑으로밖에 설명할 수 없지.
‘정답은 3번이다!’
그래. 남녀 사이에 제삼자가 끼어들어서 좋을 건 없었다.
나는 빠르게 수긍한 뒤, 폐하를 향해 고개를 끄덕였다.
제가 평소에 주접을 좀 떨어서 사람이 가벼워 보이는 거지. 하지 말라고 하면 안 한다고요.
“폐하, 걱정하지 마세요. 저는 아무것도 안 하고 멀리서만 두 분의 사랑을 응원할 테니까. 안심하실 수 있게 왕녀님께는 일절 접근도 하지 않을게요.”
“……하.”
뭐라고 한마디 할 줄 알았는데.
폐하의 입에서 짧은 웃음만이 터져 나왔다.
웃는 걸 보니 기분이 좋으신가?
그러기엔 오른쪽 눈썹이 들썩였는데.
으음. 애매하네.
뭐 어찌 됐든 말이지.
‘폐하의 연애, 제가 응원합니다!’
***
그로부터 이틀 뒤.
나는 폐하에게 맹세한 걸 깨버려야 할지도 모르는 상황에 부닥쳤다.
“근친?”
“뭔가, 자네. 그 유명한 이야기를 아직 몰랐나? 보니아 왕족들이 근친혼을 일삼는다네.”
“왜지?”
“왕족의 피가 섞이는 게 싫다던가. 이번에 온 왕녀도 보니아 국왕과 그의 이복누이 사이에서 태어났다고.”
“윽. 그게 가능해? 누이랑 한 이불을 덮고 자다니. 나라면 절대 못 해.”
“자네 누이랑은 못 하겠지. 자네랑 얼굴이 똑 닮지 않았는가. 보니아 왕족들은 다 외모가 뛰어나니 가능하지 않겠나?”
“하긴. 샤를 왕녀 같은 외모면 나도 할 수 있겠어. 그런 미인이 침대에 누워있다면 누이라는 게 뭐 대순가.”
비교적 인적이 드문 황궁의 정원.
귀족 남자 둘은 저딴 잡소리를 농담이라며 낄낄거렸다.
‘저 인간들이 미쳤나!’
폐하를 보러 본궁으로 가던 중에 양아치들이나 할 법한 대화가 들려서 걸음을 멈추고 좀 들어봤는데.
내용이 그냥 넘어갈 수준이 아니었다.
‘저거 왕족 모독 아니야?’
신성한 황궁 내에서 저런 범죄를!
투철한 신고 정신을 발휘하려 고개를 휙휙 돌려보았지만, 주변에 지나가는 기사들이 없었다.
그렇다고 본궁에 다녀오자니 그때는 저 귀족놈님들이 저 자리에 없을 거 같고.
‘직접 나서?’
나는 내 머리카락을 잡아당겨 눈앞으로 가져왔다.
분명, 이 평범하기 짝이 없던 흑발을 보면 ‘서, 성녀님.’하고 단박에 내 정체를 알아차릴 텐데.
‘모르는 귀족들이랑 말을 섞는 것도 좀 그렇고……. 그렇다고 저 미친 것들이 왕녀님을 모욕하는데 그냥 넘어가긴 싫고. 지난번에 가만히 있겠다고 했으니 폐하를 불러와야 하나? 아, 어쩌지?!’
고민하는 와중에도 보니아 왕가의 뒷담은 계속됐다.
“나중엔 왕녀가 두 왕자 중 하나와 결혼할지도 모르겠군. 그렇게 생각하니 역시 근친은 좀 그렇단 말이지.”
“퀸트 남작이 침대에서 연인을 묶어놓고 때린다는 이야기는 아나? 그만큼 해괴망측한 취향인 듯싶네. 고귀한 피인 척하면서 뒤로는 그 피끼리 배꼽을 맞댄다는 게. 쯧쯧.”
저, 저, 저!
당장이라도 튀어 나가 저 주둥이랑 등짝을 찰싹찰싹 때려버리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지만.
‘성급하면 안 된다. 모르는 사람 앞에서 날뛰다 무능력이 들통나면 안 된다. 안 된다. 안…….’
“참아. 젠달의 황궁이야. 문제를 일으켜선 안 돼.”
‘된다. 안…….’
“되는 게 어딨어. 저기요, 두 사람.”
깜짝 놀랐다.
인내심을 발휘하다 보니 자연히 집중력이 올라가 청력이 상승했는데, 분노를 참는 왕녀님의 목소리가 훅 들려왔다.
‘왕녀님이 듣고 있었다니.’
언제부터 듣고 계셨는지는 모르겠지만, 분개하는 보니아 쪽 시녀들의 목소리가 잇따라 들려왔다.
그렇다면 적어도 저 귀족들이 무슨 주제를 나누고 이야기를 하는지는 알아버렸다는 거겠지.
고민 따위 하고 있을 때가 아니었다.
나는 숨어있던 장소에서 뛰쳐나가 남자들 앞에 섰다.
“서, 성녀님?”
그렇게 말할 줄 알았다.
근처 나무 뒤에서 왕녀님 일행이 놀라는 소리가 들렸다.
내가 앞으로 걸어가자, 두 남자는 찔리는 구석이 있는 사람처럼 뒷걸음질을 쳤다.
나는 소매를 걷어붙였다.
“여기 입 뚫린 두 분. 일단 저 성녀 아니라 치고. 신성력 떼고 한판 붙읍시다.”
***
“야만족을 도와 무얼 하려는 건지! 그들은 은혜를 모르네!”
“베이트 반도에 빚을 만들 좋은 기회지 않습니까!”
회의실 안은 난장판이었다.
테이블을 팡 치고 일어나 언성을 높이는 랑데트 후작, 그에 맞서는 도템판 백작.
두 사람의 의견에 동조해 날뛰는 황궁의 귀족들.
상석에 앉은 알렌드는 온화하게 웃으며 상황을 지켜보고 있었다.
‘개판이군.’
비록 속으로는 짜증이 잔뜩 나 있긴 했지만.
베이트 반도에서 과거 선황제와의 친분을 내세우며 전쟁 지원을 요청해왔다.
대충 부대 하나를 파견해 성의 표시만 하면 족할 것을.
이들이 이렇게 열을 올리는 이유는 베이트 반도의 수출품인 모피와 궐련 때문이었다.
이번 기회로 고가인 사치품의 수입 루트를 확보하려는 쪽과 그런 그들을 막으려는 쪽.
우습지도 않은 밥그릇 싸움에 아까운 시간이 축난다.
“흥. 어느 세월에 놈들하고 우호 관계를 맺어 판로를 확보하나? 차라리 성녀님께 군대의 지휘권을 드려 베이트 반도를 속국으로 만들어 달라 부탁드리는 게 빠르겠네.”
비아냥대는 랑데트 후작의 발언에 알렌드가 그를 바라봤다.
아수라장 속에서 황제의 시선을 신경 쓰는 사람은 없었다. 헨켈과 에본을 제외하고.
“그 말이 아니잖소!”
도템판 백작이 발끈했다.
랑데트 후작의 방해로 중요한 거래처 몇 개를 잃은 뒤로, 그는 후작과 대립하는 일이라면 언성부터 높이고 보았다.
이에 옳다구나 미끼를 물은 귀족들이 또다시 편을 갈라 서로를 물어뜯을 듯 싸워댔다.
신성모독이냐, 바버논 왕국의 전철을 밟을 셈이냐, 기껏 성녀를 소환해놓고 겁쟁이처럼 몸을 사리냐.
급기야는.
“그럼 이 자리에 성녀님을 모셔 와서 의견을 여쭤보든가!”
가게에서 주인 나오라 하는 진상도 아니고.
젠달을 대표하는 대신들이 모인 자리가 시장통만도 못했다.
상황을 보다 못한 재상, 에본 하이벤이 그들을 중재하려던 참이었다.
“다들…….”
“그만.”
황제의 목소리에 회의장 안이 삽시간에 조용해졌다.
시장통이든 황궁의 회의장이든. 어찌 됐건 이곳은 젠달이었다.
목소리 큰 자가 이기는 게 아니라 신성력 큰 자가 이긴다.
“진정들 하게.”
대신들은 차분한 모습으로 제자리에 앉았다.
가쁜 숨으로 들썩이는 가슴은 어쩔 수 없었지만, 아까보다는 한결 나았다.
“경들의 의견은 잘 알았네.”
“하지만 본론은 잊지 말아야지. 지금 회의의 안건은 베이트 반도에 병력 지원 여부를 결정하는 것이 아닌가. 성녀께 초점을 두는 것이 아니라.”
황제는 부드러운 말투로 타일렀다.
회의의 주제는 다시 본래의 안건으로 돌아왔다.
한 소리를 들은 후라 그런지 회의는 과열되지 않고 침착하게 흘러갔다.
베이트 반도에 한시적으로 병력을 지원하는 것으로 의견이 모일 때쯤, 문 쪽이 분주해졌다.
복도에 있는 시종의 얼굴이 희게 질린 것을 봐 급한 일인 듯싶었지만, 아직 회의 중이었다.
기사는 조용히 문을 닫았다.
그리곤 황제의 뒤를 묵묵히 호위하고 있는 자신의 상사, 헨켈 레바르튼에게 들은 내용을 보고했다.
잠잠히 보고를 받던 헨켈의 눈빛이 어두워졌다.
그는 황제에게 다가가 손으로 제 입 모양을 가린 후 작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서쪽 별궁 정원에서 소란이 일어났습니다. 성녀님께서 귀족 두 명의 머리털을 잡고 놓아주지 않고 계신답니다.”
“…….”
무슨 일이 일어난 건지 감도 잡히지 않는군.
알렌드는 몸을 일으켰다.
“……회의는 여기까지 하도록 하겠네.”
“폐, 폐하? 무슨.”
대신들이 붙들 새도 없이 황제는 그의 호위와 함께 회의장을 빠져나갔다.
자리에 남은 유능한 재상 덕에 회의는 별다른 문제 없이 정리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