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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략 황제의 외모가 내 취향이라 곤란하다-5화 (5/150)

5화

젠달의 황궁에서 주최하는 무도회의 첫 춤의 주인은 황제였다.

황제가 원하는 상대를 지목해 춤을 추며 무도회의 시작을 알리는 것이 젠달의 전통.

하지만 우리 잘나신 알렌드 칸 레오디우스 폐하는 즉위 이후 딱 한 번을 제외하고는 첫 춤을 춰본 역사가 없다고 했다.

내가 폐하의 지니가 되기 전까지.

드레스를 입은 내 어색한 모습을 볼 요량으로 빈 게 분명했던 열 번째 소원에서, 폐하는 내 의도치 않은 각기 춤이 꽤 마음에 든 모양이었다.

그날 이후, 무도회가 생길 때마다 같이 가자며 얼굴로 꾀는 바람에 나는 꾸준히 첫 춤을 추게 됐고…….

‘내가 무도회의 산 제물이란 말이 암암리에 퍼지고 있다지. 흑흑.’

지난번에는 제발 춤 잘 추는 레이디랑 추시라 폐하에게 사정했더니.

“가뜩이나 지루한 무도회인데, 성녀의 뛰어난 춤 솜씨라도 보면서 지루함을 달래야 하지 않겠습니까.”

이러고 귓가에 속삭였다.

뛰어난 춤 솜씨 아닌 거 다 알거든요!

어찌 됐든.

춤을 추지 않아도 될 기회가 왔다고 생각했는데.

“안 됩니다.”

예상치 못하게 폐하가 단호하게 나왔다.

지금은 다정 버전 아니었어요?

에본 재상 있는데? 내 의견 들어주는 척이라도 할 줄 알았는데?

“왜, 왜요. 폐하.”

“제가 성녀와 함께 추고 싶으니까요.”

환한 미소를 장착한 폐하가 빛난다. 눈이 부시게.

안 돼. 또 넘어간다!

“다, 다른 레이디들도 폐하랑 춤을 추고 싶을 거예요.”

“제 파트너는 성녀인데 다른 이들의 의사가 중요한가요?”

“어, 어차피 전 보여주기식 말이잖아요……! 사고 안 치고 얌전히 앉아만 있을게요……!”

“성녀께선 저와 첫 춤을 추는 게 싫으신 모양입니다.”

“으으…….”

폐하의 눈에 실망이 가득했다.

보이지 않는 꼬리와 커다란 귀가 축 아래로 늘어져 있을 것만 같은 댕댕이 폐하는 그 여느 때보다 강력했다.

그런 폐하의 연기에 홀랑 넘어간 에본 재상님이 ‘왜 폐하와 춤을 추지 않으시려 하느냐’란 눈으로 날 바라보고 있었고.

나는, 나는……!

‘폐하 춤추는 걸 보고 싶은 거지 내가 추고 싶은 게 아니라고요!’

하지만 부질없는 저항이었다.

결사반대를 외치는 머리와는 다르게 저 미모에 홀린 내 입이 제멋대로 말을 했으니까.

“성녀, 정말 저와 춤을 추는 게 싫으신가요?”

“싫다니요. 어디 최선을 다해 열심히 춰보겠습니다.”

그리고 나는 무참히 깨졌다.

***

“……새하얗게 불태웠다.”

보니아 왕국 사절단의 환영 연회.

연회의 마지막 순서인 무도회의 첫 춤이 끝났다.

나는 황좌 옆에 마련된 내 의자로 돌아와 멍하니 기대앉았다.

“괜찮으십니까.”

“네…….”

그런 내 옆에 호위로 서있는 헨켈 대장이 내게 말을 건넸다.

대장도 조금 전 제가 안타까웠나요. 이런 자리에선 먼저 말을 안 거시는 분이…….

넋이 나간 얼굴로 헨켈 대장을 올려다보니 대장이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다.

크흡. 위로 감사.

이번 연회는 화려했다.

그 화려한 연회의 꽃은 단연코 보니아 왕국 사절단의 무대.

과연 자국의 문화를 홍보하기 위해 하는 공연답게, 무척이나 훌륭한 무대였다.

특히 가면을 쓴 사람들이 추는 춤이 대단했지.

반나절이라고 들었을 때는 뭘 그렇게 길게 하나 했었지만,

보는 순간 정신을 잃고 홀딱 빠져서 시간 가는 줄을 몰랐다.

마지막에는 내 상상 속 엘프가 그대로 튀어나온 듯한 미모의 왕녀님이 내게 걸어와 화관을 씌어줬는데.

와. 심장 터지는 줄.

그런 뒤, 옆에 앉은 폐하가 한 말에는 심장이 멎었고.

“이 무대 다음엔 최선을 다한 성녀의 춤을 보겠군요.”

무대를 보느라 새까맣게 잊고 있었다. 내가 춰야 할 춤이 있었다는 사실을.

저렇게 멋진 공연 뒤에 이어질 게 내 하찮은 춤이라니?

그 순간부터 내 머릿속이 새하얘졌다.

“성녀님과 알렌드 칸 레오디우스 황제 폐하이십니다!”

빰빰빰.

멋진 오케스트라의 연주에 나는 폐하와 함께 홀 한가운데로 나갔다.

폐하랑 손도 잡고 허리도 잡고 한 거 같은데 기억이 하나도 나지 않았다.

필름이 끊긴 것처럼 단편적인 장면만이 기억에 남았는데.

죄다.

“억!”

“악. 발 밟았. 죄송합니다……!”

바닥에 머리를 박을 뻔한 거라든지, 폐하의 발을 밟은 거라든지, 드레스 자락에 구두 굽이 걸려 넘어진 거라든지…….

정말이지 내 기억력이 원망스러웠다.

그런 수치스러운 장면 말고 제복 입은 폐하가 춤추는 모습을 뇌에 박아 넣었어야 했는데.

아니면 손잡은 촉감이라도 기억을 하든가! 폐하한테서 나는 향기라도!

‘춤출 때 유일한 낙을 부담감으로 걷어차 버리다니……!’

이제 깨달았다.

쪽팔림은 한순간이요, 기억해야 할 것은 최애(몸)와의 추억이니.

‘다음엔 분발한다.’

나는 의욕에 불타는 눈으로 홀 중앙을 바라보았다.

아까부터 보고 있긴 했지만, 정말 아름다운 광경이었다.

‘미남미녀의 춤이라니. 나 앓는다.’

홀 중앙에선 폐하와 보니아 왕국 왕녀님의 춤이 한창이었다.

폐하의 미모야 워낙에 잘난 걸 지금까지 좔좔 읊고 다녔으니 말해봤자 입만 아프고.

왕녀님은.

‘언니…….’

단발의 부드러워 보이는 애쉬 블론드 머리카락이 왕녀님의 움직임을 따라 살랑거렸다.

쌍꺼풀이 또렷한 헤이즐넛 색 눈은 사랑스러움과 우아함 그 자체였고. 좌우대칭인 이목구비 또한 폐하의 미모 옆에서도 뚜렷이 자기주장을 하고 있었다.

춤추는 모습은 아까도 보긴 했지만, 그때는 힘이 좀 더 실린 춤이었다면 지금은 나비처럼 부드럽게 움직이고 계시는 게.

‘인간 아니야. 요정이다. 요정.’

왕녀님. 나이가 어떻게 되시는지 모르지만, 아시죠. 예쁘면 다 언니야.

‘폐하가 먼저 춤을 신청한 데에는 다 이유가 있었다니까.’

첫 춤이 끝나고, 나처럼 의자와 한 몸이 될 줄 알았던 폐하는 의외로 왕녀님께 가서 춤을 신청했다.

무슨 바람이 들어서인지는 모르지만.

‘내 눈은 행복해…….’

맨날 나 얼굴 밝힌다고 놀리더니.

폐하도 역시 아름다운 사람이 좋은 거죠? 그 심정 다 압니다.

어찌 됐든 천상계 급인 두 사람의 외모 시너지는 엄청나서, 홀 안의 모두의 눈을 사로잡고 있었는데.

‘응?’

예외가 있었다.

폐하와 왕녀님을 둘러싼 인파 바깥쪽에 자신들의 춤에 열중한 무리.

얼굴에 나무로 만든 반가면을 쓴 일곱 명은, 아까 무대를 보여줬던 보니아 왕국의 사람들이었다.

‘그런데 왜 저러고 있지?’

화려하고 아름다운 춤을 보여줬던 아까와는 달리 지금 추고 있는 춤은 상당히 기괴했다.

허리를 옆으로 꺾는다거나, 팔을 90도로 꺾고 흔든다거나.

좀비 같기도 하고.

저게 보니아 왕국의 전통 무도회 춤인가?

“저기 가면 쓴 저분들은 뭐 하는 거예요?”

헨켈 대장은 혹시 알까 싶어서 넌지시 물어봤다.

대장은 보니아 왕국 사람들을 보더니, 주변에 선 부하를 불러 귓속말로 보고를 받았다.

그리곤 특유의 덤덤한 말투로 내게 말해줬다.

“성녀님의 춤이 무척이나 흥미롭다며 연습 중이랍니다. 보기 드문 춤사위라 꼭 몸에 익혀 가고 싶다고 했다는군요.”

“…….”

***

“즐겁지 않으신가 봐요.”

상대방이 불쾌하지 않을 정도로 상냥한 목소리였다.

샤를의 질문에 알렌드는 입가에 잔잔한 미소를 걸고 답했다.

“왕녀와 춤을 추고 있는데 즐겁지 않을 리가 있겠습니까.”

거짓말.

황제가 추는 춤은 더할 나위 없이 완벽했지만, 샤를은 알 수 있었다.

그가 자신과 추는 춤에 집중하고 있지 않다는 것을.

자신의 허리에 손을 올리고 서로 손을 마주 잡고 있어도, 황제의 신경은 온통 성녀가 앉아 있는 단상 위에 있었다.

“제가 사절단의 대표가 되어 폐하를 뵌 지도 햇수로 3년이 되었죠.”

“벌써 시간이 그렇게 흘렀군요.”

두 국가의 문화교류를 위해 보니아 왕국은 일 년에 한 번 사절단을 젠달에 보냈다.

제1 왕녀인 샤를이 사절단의 대표로 온 것은 이번이 세 번째.

그녀가 참석했던 2번의 연회 동안, 젠달의 황제는 그 누구와도 춤을 추지 않았다.

무도회가 시작하면 “즐기다 가시길 바랍니다.” 따위의 형식적인 말을 남긴 뒤, 황좌에 앉아 있다 홀연히 사라지곤 했다.

그러던 위인이 성녀가 소환된 해에 갑자기 첫 춤을 추고 자신에게까지 춤 신청을 하다니.

샤를의 헤이즐넛 색 눈에 흥미가 돌았다.

‘나랑 춤을 추고 있는 것도 성녀 때문이겠지?’

6년 전.

자신과 동갑인 남자가 황제로 즉위했다는 소식에 얼마나 놀라워했던가.

샤를은 한때 그와 만나기를 고대했던 적도 있었다.

능력, 외모, 성격……. 실제로 만난 황제는 무엇 하나 흠잡을 곳 없이 완벽했다.

하지만 그렇기에 샤를은 그에게 실망했다.

완벽한 것만큼 따분한 것도 없었다.

그런데 지금, 약점 하나 없을 것 같던 황제가 자신을 견제한다.

보니아 왕국의 왕녀가 성녀에게 접근할 것을 염려해서.

연회 중에는 황제나 그의 충견 헨켈 레바르튼이 성녀의 곁을 지키며 누구도 접근하지 못하게 한다는 소문을 들었지만,

이렇게 황제가 직접 움직일 줄은 몰랐다.

‘장갑을 낄 정도로 나와의 신체접촉을 꺼리면서 말이지.’

황제의 손에 끼워진 장갑.

이상할 일은 아니었지만, 성녀와 춤을 출 때는 아무것도 끼지 않았던 손이었다.

타인과의 접촉을 꺼리는 건지, 자신과의 접촉을 꺼리는 건지는 모르겠으나.

‘성녀를 대할 때와 차별을 둔다. 황제가 성녀에게 다른 감정을 품나?’

스물네 살의 황제와 스무 살의 성녀.

정보에 따르면 성녀는 신전이 아닌 황궁에 머물고 있었다.

궁. 거대하지만 좁아지려면 한없이 좁아질 수 있는 곳이었다.

젊은 남녀가 함께 있기엔 더더욱.

물론 근거 하나 없는, 샤를의 머릿속을 스쳐 지나간 억측일 뿐이지만.

‘재미있네.’

샤를은 회전하며 성녀가 있는 단상으로 힐끔 시선을 돌렸다.

다른 곳을 보던 알렌드가 샤를에게로 눈을 돌린 건 그때였다.

그것을 느낀 샤를이 다시 알렌드에게 시선을 맞췄다.

서로를 향해 눈웃음 짓는 두 사람은 옆에서 보기엔 무척이나 분위기 좋은 미남미녀의 모습이었으나,

둘 사이엔 묘한 신경전이 오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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