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화
시아나가 다가와서 어떤 소리를 해도 절대로 돌아보지 않을 거야.
나는 배부를 자격이……!
“앗, 성녀님. 여기 폐하의 얼굴이.”
“어?!”
……나를 너무나 잘 아는 시아나 덕분에 다짐은 1초 만에 끝났다.
고개를 돌린 내 입안으로 들어온 칠면조 구이 한 점.
우물우물.
입안 가득 채운 풍미가 끝내준다.
‘그만 움직여! 내 턱관절……!’
하지만 공복에 느끼는 이 맛은 참을 수 없었다.
뇌의 통제를 거부한 채 제멋대로 움직이는 턱관절에,
“얼마나 큰일을 저지르셔서 의기소침해지신 건지는 모르겠는데, 저대로 음식을 주방으로 돌려보내면 헬리가 해고당할지도 몰라요.”
시아나가 만들어준 적당한 핑곗거리까지.
……오늘만 먹는다.
나는 마지 못하는 척 시아나에게 이끌려 식탁 앞에 앉았다.
포크와 나이프를 들어 제일 먼저 칠면조 다리를 공략하자, 옆에 선 시아나가 기분 좋은 듯 웃는 소리가 들렸다.
‘조, 조금 민망한가?’
방금까지 안 먹겠다며 고집을 부린 게 민망했지만, 맛있는 거 앞에선 장사 없지.
나는 부지런히 접시 위로 손을 놀리며 비어있는 위를 채워갔다.
식사 예절대로라면 먹는 순서를 지켜야 하겠지만, 프로딘타 궁은 그런 예법에서 자유로운 편이었다.
시아나가 내게 유하기도 했지만, 나만 사용하는 별궁이라 주로 식사는 나 혼자서 하기 때문이기도 했다.
가끔 폐하와 식사할 때는 코스요리로 나와서 순서를 신경 쓸 필요도 없긴 했고.
‘솔직히 폐하랑 식사하는 자리는 음식이 코로 들어가는지 입으로 들어가는지 모를 때가 많아서……. 아, 폐하 얼굴 보고 싶다.’
허기가 채워지니 슬슬 다른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
내 먹는 속도가 느려진 걸 본 시아나가 말을 걸었다.
“이제 곧이네요.”
“곧? 뭐가?”
“보니아 왕국의 사절단이 오는 날이요. 이번 연회도 황제 폐하와 함께 참석하신다면서요?”
“아.”
지난번 종탑에서 내 의지가 폐하의 외모에 참패했을 때 승낙했던 그거.
“응. 가게 됐어.”
한숨이 나온다.
연회에 참석해 고귀한 성녀처럼 앉아만 있는 건 좀이 쑤시긴 했지만 나름대로 참을 수 있었다.
문제는 연회가 시작할 때 추는 춤.
‘이번에도 마리오네트가 되어 삐걱거리다 오겠지.’
폐하는 그걸 보고 비웃을 테고.
‘아니야. 폐하는 좋은 분이야. 이런 능력 없는 날 거둬준……, 이익.’
자기 최면을 걸어보려 해도 상황이 분한 건 어쩔 수 없었다.
이전 세계에서도 그랬지만, 내 몸뚱이는 선천적으로 춤과 전혀 친하지 않았다.
발을 움직이려 하면 손이 안 움직이고. 부드럽게 춤을 추려고 하면 관절이 딱, 딱, 거리며 존재감들을 뽐내는 하늘이 내려준 몸치.
사교댄스 수업을 받다가 우연히 본 거울 속의 내 모습은 마치 고장 난 태엽 인형 같았다.
‘그 꼴은 내가 봐도 웃겼으니까. 폐하가 비웃는 것도 이해되긴 하지.’
더군다나 폐하는 춤도 잘 췄다. 춤추는 걸 넋을 놓고 구경할 만큼.
너무 완벽해. 완벽해서 벽이 느껴진다.
‘아, 수프 맛있네.’
입안에서 뭉근하게 끓인 수프의 고기와 감자가 부드럽게 녹아내렸다.
느끼하지 않게 딱 적당히 간을 한 크림은 혀에 고소하게 남는 게, 역시 헬리의 요리 실력은 최고다.
나는 다시 수프를 숟가락 가득 떠 입으로 가져갔다.
그러자 때를 기다렸다는 듯, 잠시 조용했던 시아나가 짧게 손뼉을 치며 말했다.
“폐하는 성녀님을 마음에 두고 계시나 봐요.”
“……쿨럭.”
이게 무슨 소리야.
“콜록, 콜록.”
생각지도 못한 말에 수프가 잘못 넘어가 사레가 걸렸다.
시아나는 당황한 기색 없이 능숙한 손길로 내게 냅킨을 건넸다.
‘방심했다.’
깜빡이 좀 켜고 들어와 주세요. 시아나 님.
나는 냅킨으로 입을 닦고 시아나에게 물었다.
“마음에 두고 계신다는 건 갖고 놀기 좋은 장난감이라는 뜻?”
“성녀님도. 훌륭하신 황제 폐하께서 그런 불경한 생각을 하실 리가요.”
시아나는 폐하의 다정함에 털끝만큼의 의심도 없는 게 분명했다.
그렇지 않고서야 저런 존경의 눈빛으로 폐하를 언급할 리가 없을 테니까.
“하하. 그렇지? 폐하는 그런 생각 안 하시지.”
그래도 놀리기 좋은 부하 정도로는 생각하고 계실 거로 추측해봅니다.
내 대답에 시아나는 미소를 지었다.
“제가 말씀드린 건 ‘황제 폐하께서 성녀님을 이성으로 생각하고 계시지 않나.’ 하는 것이었답니다.”
헐.
“대체……. 어떻게 해서 그런 의견이 나온 거야?”
말도 안 되는 소리에 입맛이 뚝 떨어져 들고 있던 스푼을 내려놓았다.
내가 먹을 만큼 먹었다고 생각했는지, 시아나는 별말 없이 물잔에 물을 채워줬다.
“폐하께서는 누구에게나 상냥하시지만, 곁을 쉽게 내어주는 분은 아니시죠.”
“그런 것치곤 거의 에본 재상이나 헨켈 대장과 함께 계시던데?”
“그분들은 예외고요. 폐하가 즉위하셨을 때부터 옆에서 일하신 최측근들이시잖아요? 황제 폐하께서 두 분 외의 사람을 곁에 두신 건 성녀님이 처음이에요.”
그거, 스트레스를 풀 대상이 옆에 필요했던 게 아닐까요.
폐하의 똘마니 같은 거.
몸소 겪은 경험으로 시아나의 오해를 풀어주고 싶었으나, 내가 말할 수 있을 리 없다.
우리 폐하의 잘난 몸, 추문에 휘말리지 말고 꽃길만 걸어.
아, 이렇게 나랑 엮이는 말이 나오는 것도 추문인가?
“그으래서……?”
“즉위하시고 몇 년 만에 함께하고 싶으신 이성을 찾으신 게 아닐까요.”
“절대 아닐걸?”
내 부정에도 시아나는 폐하랑 성녀님이라면 자신은 찬성이라느니, 폐하는 다정하셔서 분명 좋은 연인이 되실 거라느니 하는 소리를 늘어놓았다.
‘그, 그만…….’
그러나 시아나가 볼에 홍조까지 띠고 들뜬 목소리로 말하는 것은 흔치 않은 일이었다.
차마 말릴 수 없었던 나는 영혼 없는 웃음으로 열심히 시아나의 말을 들어주었다.
‘시아나가 행복하면 됐어…….’
비록 왼쪽 귀로 듣고 오른쪽 귀로 흘리긴 했지만.
***
“성녀님, 아까 하셨던 말씀 중에 마음에 걸리는 게 있었는데요.”
식사 후, 시아나는 허리까지 오는 내 머리칼을 빗겨주었다.
여기에 온 후로 이상하게 머릿결이 좋아져서 굳이 빗질할 필요는 없었지만.
내 머리를 빗겨주는 게 시아나의 취미 생활인 듯해서 하루에 한 번은 머리를 맡겼다.
“누가 성녀님은 갖고 놀기 좋은 장난감이라고 말한 적이 있나요?”
“……아니. 없는데.”
시아나의 심상치 않은 분위기에 눈치를 보며 대답했다.
“만에 하나 어디서 그런 모욕을 받으셨다면, 꼭 저한테 말씀해주세요.”
“……왜?”
“왜긴요.”
거울 속 시아나와 눈이 마주쳤다.
시아나는 주황색 눈을 살포시 접어 눈웃음을 지었다.
미인의 고혹적인 미소에 나도 헤 하고 웃었다가, 뒤이어 나온 말에 입꼬리를 내릴 수밖에 없었다.
“그게 누구든 이 제국에서 살아갈 수 없게 만들겠어요. 저희 프라단 가문의 모든 권력을 써서라도 말이죠.”
***
폐하는 집무실에서 햇빛이 잘 드는 책상에 앉아 업무를 보고 있었다.
나는 맞은편 소파에 앉아 그런 폐하를 감상하고 있었고.
하, 햇살에 부서지는 저 금발.
일에 집중한 저 눈빛.
서류를 넘길 때마다 살짝씩 움직이는 탄탄한 삼각근. 미친다.
“폐하는 제국 밖에서 사신다면 무슨 일을 하면서 사실 거예요?”
내 뜬금없는 질문에 두 쌍의 눈동자가 내 쪽을 보았다.
한 쌍은 폐하의 아름다운 푸른 눈동자였고, 다른 한 쌍은 에본 재상의 보랏빛 눈동자였다.
“글쎄요. 한 번도 고민해 본 적이 없는 문제라 바로 대답이 나오진 않네요.”
별 시답지 않은 질문을 던지냐고 무시할 줄 알았던 폐하는, 에본 재상이 있어서인지 의외로 내 잡담에 어울려줬다.
그것도 한껏 상냥한 얼굴로.
“제국 밖이면 황제는 못 할 테니, 농사라도 지으면서 살아볼까요?”
농사라니.
순간 밀짚모자를 쓰고 괭이질을 하고 있을 폐하의 모습이 상상됐다.
땡볕 아래, 고된 농사로 그을린 구릿빛 피부. 단추 두어 개를 푸른 와이셔츠. 거기에 날카로운 턱선을 타고 흐르는 땀 한 방울.
‘농사 완전 찬성!’
아. 폐하랑 눈 마주쳤다.
“크흠, 흠. 농사도 좋죠. 사람 사는 데 제일 중요한 게 식량이잖아요?”
“그렇죠.”
폐하는 웃으며 내 눈을 외면했다.
저 수려한 옆얼굴은, 분명 내 망상을 알아차리곤 한심하게 생각하는 얼굴이다.
저런 폐하가 날 이성으로 본다니.
어림도 없지.
‘폐하는 좋은 분이다. 폐하는 좋은 분……. 폐하의 얼굴은 좋은 분……. 폐하 얼굴 최고.’
평생 보기만 할게요. 엮이지는 맙시다.
“성녀님. 보니아 왕국 사절단 환영연회의 식순입니다.”
에본 재상의 하얗고 고운 손이 시야에 들어왔다 사라졌다.
재상님은 소파 앞 테이블 위에 식순지를 공손하게 올려놓고는 재빨리 나와 거리를 벌렸다.
‘크흑. 마상 입지 마. 업보야. 업보.’
내 주접 피해자 1호였던 에본 재상은 나의 석고대죄 이후에도 도통 마음의 거리를 좁혀주지 않았다.
일과 관련된 부분은 완벽했지만, 그 외로는 경계심 많은 고양잇과 동물 같은 느낌으로 날 대하고 있단 말이지.
모든 것이 내 잘못이니 겸허히 받아들여야 한다.
그래도 미남한테 경계 당하고 있다니. 마음은 쓰리다.
“이번에는 식순이 짧네요?”
젠달의 행사는 언제나 식순이 길었다.
역사가 깊은 신성 제국이다 보니 이것저것 챙겨야 하는 예식이 많기 때문이라나.
그래서 항상 10~15번까지의 순서가 있었는데, 지금 받은 식순지에는 달랑 5개밖에 적혀있지 않았다.
“불필요한 의식은 다 뺐습니다.”
에본 재상은 폐하의 책상 옆에 찰싹 붙어 서서 설명했다.
미남 둘이 한 시야에 있다니.
아무래도 난 내가 모르는 사이에 나라를 구한 게 틀림없다.
“왜요?”
“식순의 네 번째에 보니아 왕국의 사절단이 준비한 무대가 있기 때문입니다. 그게…… 반나절 정도 걸리는 무대라.”
“헉. 엄청나게 오래 걸리네요.”
“보니아 왕국은 국민의 애국심이 높은 나라라 자국의 문화를 전하는 일에 만전을 기하는 편입니다. 외교적 문제이니 저희 쪽에서 양보하는 수밖에요. 그래서 최소한의 의식만 준비했습니다.”
에본 재상의 설명을 듣던 중 번뜩이는 아이디어가 떠올랐다.
“그럼 하나 더 빼도 괜찮지 않을까요? 마지막이 무도회니 첫 춤은 없는 걸로 하면 어때요? 다들 힘들 테니까!”
이건, 기회다!
나는 양손을 쥐고 비장하게 둘을 바라보았다.
에본은 눈을 내리깔았고 폐하는 재밌다는 듯한 얼굴로 생글생글 웃고 있었다.
“첫 춤은, 없는 걸로 하죠!”
“안 됩니다.”